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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味津津な話中国 申国と日本 Yam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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差や百科事典に登載されている注油王-週評王時の西株末葉で同舟草葉の国である ¥"神国申国¥"に対する部分を専門翻訳したから青臭くて誤役や間違いがあっても指摘してくださって了解お願いいたします.
彊域の地名に対する現在地理上の位置非情は違うこともできるから参照で見て四書の記録たちも引用されていて役に立つようであげます.
車や高等学校教材に記述される部分も出ていて彼らの教育内容も分かる部分もあります.

株周国成立以前のいち不足にブルグァハルテから株王朝の先祖たちは西戎西戎である姜融姜戎とお互いに隣合って過ごして民たちはもちろん高空段歩みたいな不足の章たちも姜融特に ¥"神さま申¥"と相互間に婚姻関係を結んで似合ったし株周国成立の時姜太公の登竜で姜融姜戎不足たちは株周国の多くの諸侯国たちにも封ざれて食邑を受けるのに至りました.
西週後期西周後期にもこんな慣習は完全に消えないで伝わってかなり多い数王たちが神国申国の ¥"申女=姜女¥"野と婚姻したし西株末葉取り持ち王時神国申国の申白申伯がグックグになって王室と関係が深くなって株王室子孫の諸侯国であるドンググェック-回(本当に鄭に滅亡される) 南側の河南南洋一帯のサグック謝国の地に封ざれながら西南の一手上流の険峻した所に位したヒョングチォ荊楚と一手重傷類である東南一帯に位した数隨などを含めた男のみを牽制する株周国の最南端辺方を引き受ける重要なフグックになったので西週末株周国の最大彊域と東夷の版図が分かるようにしてくれるという点でも重要な位置にある国だと考えられます.


〓 間違いに抜け落ちされた部分があって中間に添付しました. 四書に記載した ¥"神さま申¥"の地理と位置に関する部分だから非常に重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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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神国申国 (バイドバックグァサゾン)

川姜シソングの国で伯爵伯爵の作為を持った.

《左前左伝・恩功元年隠公元年》に至るのを “ゾングムゴング鄭武公二伸申国から妻を迎え入れたしご安泰武羌だから早かった”と言った.
姜姓国。伯爵。《左伝・隠公元年》曰:鄭武公娶於申,曰武羌。

《国語国語・主語中周語中》には “私の斉, 虚許, 神さま申, リョ呂はだいたい大姜を本にする”した.
ウィソ韋昭-ウィジンシデ呉の史家-は “4国が皆川姜シソングだ.” と言った.
《国語・周語中》:斉′許′申′呂由大姜。 韋昭:四国皆姜姓。

神さま申国人々の根源は姜融姜戎であり初期には島で陝西 未知県米脂県及びその以北地球に居住したし初期にファハ華夏族といっしょに競うお互いに融合した西戎西戎で見ることが当たる.
申人源於姜戎,早年居於今陝西米脂県及以北地区,是較早与華夏融合的西戎。

船主先周時期フィソング姫姓義州周国人々は世代ごとに神さま申国人たちといっしょに婚姻して平安になった. 株太王周太王の雨, 超王 係季の雨, 注文王周文王の祖母等は皆 “テガング太姜”と称するのがすぐ当たる. 西週後期西周後期に神国申国が重ねて王室といっしょに通婚することを切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また株王室が重任する要職を引き受けていてズリョワング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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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진진한 이야기 중국 申國과 일본 Yamato



차이나 백과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주유왕-주평왕때인 서주말엽에서 동주초엽의 나라인 "신국申國"에 대한 부분을 전문 번역하였으니 미숙하여 오역이나 실수가 있더라도 지적해주시고 양해부탁드립니다.
강역의 지명에 대한 현재지리상의 위치비정은 다를 수도 있으니 참조로 보시고 사서의 기록들도 인용되어 있어 도움이 될 것 같아 올립니다.
차이나 고등학교 교재에 기술되는 부분도 나와있어 그들의 교육내용도 알 수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주周나라 성립이전의 일개 부족에 불과할때부터 주왕조의 선조들은 서융西戎인 강융姜戎과 서로 이웃해 지내며 백성들은 물론 고공단보같은 부족의 장들도 강융 특히 "신申"과 상호간에 혼인관계를 맺어 어울렸으며 주周나라 성립시 강태공의 등용으로 강융姜戎부족들은 주周나라의 여러 제후국들에도 봉해져 식읍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서주후기西周後期에도 이런 관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전해져 상당수 왕들이 신국申國의 "申女=姜女"들과 혼인하였으며 서주말엽 주선왕때 신국申國의 신백申伯이 국구가 되어 왕실과 관계가 깊어져 주왕실후손의 제후국인 동괵-회(정鄭에 멸망됨) 남쪽의 하남 남양일대인 사국謝國의 땅에 봉해지면서 서남의 한수상류의 험준한 곳에 위치한 형초荊楚와 한수 중상류인 동남일대에 위치한 수隨등을 비롯한 남만을 견제하는 주周나라의 최남단 변방을 맡는 중요한 후국이 되었으므로 서주말 주周나라의 최대강역과 동이의 판도를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나라라 생각됩니다.


☞ 실수로 누락된 부분이 있어 중간에 첨부하였습니다. 사서에 기재된 "신申"의 지리와 위치에 관한 부분이라 매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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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국申國 (바이두백과사전)

강姜씨성의 나라이며 백작伯爵의 작위를 가졌다.

《좌전左傳·은공원년隱公元年》에 이르기를 “정무공鄭武公이 신申나라로부터 아내를 맞아들였으며 무강武羌이라 일렀다”고 하였다.
姜姓國。伯爵。《左傳·隱公元年》曰:"鄭武公娶於申,曰武羌。

《국어國語·주어중周語中》에는 “제齊, 허許, 신申, 려呂는 대강大姜을 본으로 한다”하였다.
위소韋昭-위진시대 오나라의 역사가-는 “4나라가 모두 강姜씨성이다.” 라고 하였다.
"《國語·周語中》:"齊、許、申、呂由大姜。" 韋昭:"四國皆姜姓。"

신申나라 사람들의 근원은 강융姜戎이며 초기에는 섬서陝西 미지현米脂縣및 그 이북지구에 거주하였으며 초기에 화하華夏족과 더불어 겨루다 서로 융합한 서융西戎으로 보는 것이 맞다.
申人源於姜戎,早年居於今陝西米脂縣及以北地區,是較早與華夏融合的西戎。

선주先周시기 희성姬姓의 주周나라 사람들은 세대마다 신申나라사람들과 더불어 혼인하여 평안해졌다. 주태왕周太王의 비, 왕王 계季의 비, 주문왕周文王의 조모등은 모두 “태강太姜”이라 칭하는 것이 바로 맞다. 서주후기西周後期에 신국申國이 거듭 왕실과 더불어 통혼하는 것을 끊지 못하였고 또한 주왕실이 중임하는 요직을 맡고 있어 주려왕周厲王, 주유왕周幽王은 모두 주려왕周厲王의 대신 “신계申季”와 더불어 신申나라 여자들을 아내로 맞이해 후손을 두고자 하였다.
先周時期姬姓周人便與申人世爲婚姻,周太王之妃、王季之妃、周文王之祖母等皆稱"太姜"即是。西周後期,申國仍不斷與王室通婚,且在周王室中任要職,如周厲王大臣"申季",周厲王、周幽王皆娶申女爲後。

주선왕周宣王때 ‘남토南土’의 판세를 억누르고자 왕의 장인인 신백申伯을 현 하남성河南省-남양시南陽市로 고쳐 봉하여 사국謝國의 토지위에 읍을 건설하고 나라를 세우도록 살피어 더 강하게 대처하였다.
이로서 세워진 신국申國을 칭하기를 “남신南申”이라 하였고 서토申國의 신국申國은 서신西申이라고 칭하였다.
周宣王時,爲了加強對"南土"局勢的控制,改封王舅申伯於今河南省-南陽市,在原謝國的土地上建邑立國。此申國遂稱"南申",西土之申國可稱西申。


주평왕周平王이 동천(BC771년,진국辰國 단군 사벌 2년)한 이후에 남신南申은 동주東周 왕실王室의 남쪽 대문이 되어 형초荊楚의 침범을 방비하였고 주周는 이곳에 군대를 머무르도록 주둔시켰다. 신국申國은 중원내지의 제후와 더불어 연계하여 더 강해졌고 일찍이 정무공鄭武公에게도 신후의 여식을 혼인보내었다.
周平王東遷以後,南申是東周王室的南大門,爲了防備荊楚侵犯,周在此駐紮了軍隊。申國也加強了與中原內地諸侯的聯系,曾將申女嫁於鄭武公。


춘추초기, 초국楚國이 북상하면서 거처하는 땅이 요충지였던 신국申國은 공격목표의 하나가 되었고 노장공魯莊公 6년(BC688년 진국辰國 단군 매륵 17년)초에 초사楚師는 등鄧나라를 친다하여 길을 빌리고는 신申나라를 공격하였다. 대개, 초문왕楚文王때에는 신국申國은 멸망을 당하게 되고 현縣이 설치되기에 이른다. 하호선생은 이를 기원전 687~기원전 684년사이에 있었던 일로 생각한다.
春秋早期,楚國北上,地處要沖的申國成了攻擊目標之一。魯莊公六年(前688年)楚師假道於鄧伐申。大概在楚文王時,申國被滅,設爲縣。何浩先生認爲約在前687-前684年之間。

신국申國의 옛 성 북쪽 즉 후세의 남양南陽 옛 완성宛城소재지는 현 남양시구 동북부에 위치하며 대소양중 주대周代와 한대漢代의 문화를 받아들인 곳이다. 1981년 이 부근의 서주묘지西周墓중에서 남신국南申國의 청동기가 거듭 출토되었다. 1975년 청리清理의 한 춘추중기 묘지에서 초국楚國 신현현공申縣縣公의 청동기가 출토되어서 초楚가 신申을 멸한 이후에 일찍이 신국申國의 일부 귀족과 평민은 동쪽의 신양信陽일대 안읍安置으로 옮겨가 초의 부용국附庸國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이로서 춘추시기 신양信陽의 신申으로 말미암아 신양信陽의 신申은 동신東申이라 칭한다.
申國故城北即後世的南陽古宛城所在,位於今南陽市區東北部,有大小兩重,文化內涵爲周代和漢代。1981年在此附近的西周墓中,曾出土南申國青銅器。1975年清理的一座春秋中期墓,出土了楚國申縣縣公的青銅器。楚滅申後,曾將申國的部分貴族平民遷往東面的信陽一帶安置,成爲楚之附庸。這就是春秋時期信陽之申的由來。信陽之申稱東申。

《좌전左傳》소공昭公 13년에 기재하기를 “초楚나라는 채蔡를 멸망시키고 령왕靈王이 허許, 호胡, 침沈, 도道, 방房, 신申을 荊으로 옮기었다.” 동신東申은 초楚땅으로 피하여 옮기어 갔으며 초평왕楚平王때 신申은 다시 신양信陽을 회복하였다. 남신南申의 망국은 전국시대 초중기때였다는 견해를 따른다.
《좌전左傳·昭公十三年》載:"楚之滅蔡也,靈王遷許、胡、沈、道、房、申於荊焉"。東申被遷往楚地,楚平王時申又在信陽恢複。南申亡國約在戰國中早期。

정현鄭玄의 《시전詩箋》에 “신국申國은 진陳(현 하남 회양淮陽)과 정鄭(현 하남 신정新鄭)의 이남이다”
“申國在陳(今河南淮陽)、鄭(今河南新鄭)之南”[鄭玄《詩箋》]

《상서尚書·우공禹貢》편에 이르길 “형荊-초나라-과 예豫 두 나라사이에 끼어 망망사경-사방이 칼날로 에워싸인 고단한 형세-이고 뒤에는 장회長淮가 둘러싸고 있고 그 앞에는 험한 관문이 우뚝 솟아 있다.”고 하였다.
“介荊豫之間,芒芒四境,長淮繞於後,岩關峙於前”[《尚書·禹貢》]。

**** 누락부분 추가 ****

신국申國은 주나라초에 백하白河유역인 당唐에 봉해져 남양시南陽市북쪽인 사謝땅에 도성을 세웠다. (고교교재《중국고대사》87페이지) 서주西周말엽에 이르러 주선왕周宣王은 나라를 평안히 안정시키고자 현실을 등용하고 방숙方叔의 대군을 보내어 초국楚國을 쳐서 깨드리고 소백召伯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회이淮夷를 정벌하였다.
申國周初封於唐、白河流域,建都在南陽市北謝地 [高校教材《中國古代史》87頁],到西周末,周宣王任用賢臣安邦定國,派方叔大軍打敗楚國,派召伯率軍征伐淮夷;


신백申伯은 문무를 겸비하고 주周를 보좌한 공로가 있어 선왕宣王이 다시 신백申伯에게 회하淮河 상류지구를 봉하여 소백召伯에게 명하여 새 읍성인 사성謝城을 가서 만들도록 하였다.
[명明,청清《일통지》 : 옛 “사성謝城은 신양주信陽州 서북육십리에 있는데 주周가 신백申伯에게 내린 봉토이다” ]
申伯文武兼備,佐周有功,宣王又增封申伯淮河上遊地區,命召伯往營新邑謝城
[ 明、清《一統志》:古“謝城在信陽州西北六十裏,周申伯所封”。]

선왕宣王이 “신백의 남으로 돌아감”에 송별연을 벌여 전별하여 보내며 동이족 초楚나라를 방어하고 대비하여 “남토南土”를 보위하도록 하였다. [《시詩·채기采芑·숭고崧高·서묘黍苗》]
宣王餞送“申伯還南”,防禦夷楚,保衛“南土”[《詩·采芑·崧高·黍苗》]。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 : “신申은 남양南陽 완현宛縣에 있으며 신백申伯의 나라로 여태공呂太公(=본명이 여상인 강태공)의 봉지로....,” “신申의 강역은 명액冥厄의 이북이며 회수淮水의 이남이다”
《漢書·地理志》載:“申在南陽宛縣,申伯之國,呂太公所封,……”,“申之疆域,在冥厄之北,淮水之南”。

***** 누락부분 추가 *****

신국申國은 동으로는 현弦(지금의 광산현光山縣 서북), 황黃(지금의 황천현潢川縣서쪽), 강江(지금의 정양현正陽縣 동남)일대에 접하고 서로는 료蓼(지금의 당하현唐河縣서남 호양진湖陽鎮), 등鄧(지금의 양양襄陽북쪽인 등주시鄧州市일대), 여呂(지금의 남양시南陽市 서쪽) 일대에 연해있었으며 북으로는 악鄂(달리 이름하기는 “악噩” 지금의 남양시南陽市 동북), 도道(지금의 확산현确山县 북쪽), 채蔡(지금의 상채上蔡、여남汝南)와 이웃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운鄖(지금의 호북湖北 안륙安陸), 수隨(지금의 수주隨州), 당唐(지금의 수隨 서북지역)과 가까웠다.
申國東接弦(在今光山縣西北)、黃(在今潢川縣西)、江(在今正陽縣東南),西連蓼(在今唐河縣西南湖陽鎮)、鄧(在今襄陽北至鄧州市一帶)、呂(在今南陽市西)、北鄰鄂(又作“噩”,在今南陽市東北)、道(在今確山縣北)、蔡(在今上蔡、汝南),南近鄖(在今湖北安陸)、隨(在今隨州)、唐(在隨西北)。

신국은 방백의 대국으로 신후申侯, 신농神農, 사악四嶽-4 제후-의 후예로 강성姜姓, 백작伯爵으로 옛날 칭하기는 신백申伯이라 하였다. 서주西周건립초기에 강성姜姓씨인 신申, 여呂와 동성을 가진 蔣(현 회빈현淮濱縣), 식息(현 식현息縣)및 운鄖, 수隨, 당唐등 “한나라 초엽의 모든 희姬씨들”에게 나눠 봉하였고 남방의 파巴, 복濮, 등鄧, 초楚등의 부분도 살피어 더하여 주어 강성해졌다. [고등학교교재 《중국고대사》 87페이지]
申國爲方伯大國,申侯,神農、四嶽之後,姜姓,伯爵,故稱申伯。西周建立初期,分封姜姓申、呂和同姓蔣(在今淮濱縣)、息(在今息縣)及鄖、隨、唐等“漢初諸姬”,是爲了加強監控南方的巴(在今四川重慶)、濮(在巴東楚南)、鄧、楚等部[見高校教材《中國古代史》87頁]。

(아래부분은 신국의 남변인 호양湖陽진 일대의 관련기록을 가져와 추가로 덧붙인 것입니다.)

호양湖陽의 명칭은 하夏나라에서 기원하였다. 숙안叔安이 치수로 홍수를 트이게 하자 료국蓼國을 분봉받아 호양湖陽에 도읍을 두었다. 춘추때에는 초나라로 들어갔고 전국시대에는 한나라땅이 되었다. 진이 24현을 두었는데 호양이 그 중의 하나였다. 동한東漢 류수劉秀가 제를 칭한 이후 그 손위누이 류황에게 이곳의 읍지를 봉해주어 이것으로 호양湖陽이라는 이름을 얻어 호양공주湖陽公主라고 일컬어져서 “금호양金湖陽”, “제帝가 봉한 고을”이란 아름다운 칭찬을 받았다. 당송唐宋이래로는 모두 현이 되었다.
湖陽起源於夏,叔安疏洪治水,分封蓼國,都置湖陽;春秋歸楚,戰國歸韓。秦置二十四縣,湖陽爲其一;東漢劉秀稱帝後,將其姊劉潢封邑於此,謂湖陽公主,湖陽因此而得名,素有“金湖陽”、“帝封之鄉”之美譽。唐宋以來皆爲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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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족은 고대 중국의 이방민족이라고 전해진 유목민족으로 전욱의 후예라고 표명된 바가 있다. 이들은 산악 지방에 살아왔으며 중원을 자주 침입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내역은 이러하다.

융족들은 3황 5제 중의 임금이자 진(陳 : 3528~2383)나라 26대 임금인 전욱을 따르던 무리들로 이들은 전욱의 재위기간 때 출현했다. 이들은 산 속에 오두막집을 짓고 샤냥과 유목을 일삼아왔고 유제품과 육류를 먹어온 데다 기마술과 전술에 능통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을 융(戎)이라고 말하지 않고 야마토(Yamato)라고 말했는데 이는 산 속에 살았다는 의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언어가 고대 일본어와 흡사해보였으며 그들의 고유 명칭인 야마토가 일본의 그것과 같았다고 볼 수 있다. 야마토(大和, 日本, 倭)의 속뜻이 야마(山), 토(口, 門), 즉 산 속에 살았다는 뜻이 담겼지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일본인이 융족의 후예라고 전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융족과 일본인의 흡사성의 증거는 이러하다. 예를 들자면 이들은 같은 각발(角髮 : 고대 일본의 헤어스타일인 미즈라)에 곡옥(曲玉)을 착용했으며 팔다리를 묶는 옷과 바지를 입었고 괘갑과 흡사한 갑옷도 입었다. 그리고 상투를 틀었다고 전해지고 갈관 같은 모자는 일본 다이묘의 모자와 흡사해보였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신관의 모자와 일본의 관모가 흡사한 데 있었는데 신관의 모자는 진(秦 : BC 770~207)나라의 관모와 똑같으며 관모의 몸통은 가죽 재질에 일본의 관모와 같은 형태에 귀까지 가리는 방한형태를 지녔으며 모자 위에 세갈래 관대가 달려있다. 그리고 일본의 관모는 습기가 찬 기후에 따라 방한형태가 아닌 머리 위에만 쓰는 것이고 뒤에는 관대가 겹쳐지거나 하나로 달려졌다.

또다른 예를 들자면 융족 내시의 모자, 백제(百濟 : BC 258~AD 660)의 관모가 일본의 에보시와 흡사했는데 융족 내시의 모자는 진나라의 그것과 같은 형태로 길고 주발형이었으며 일본 에보시와 비슷한 형태다. 이 비슷한 형태가 일본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문관, 내시의 복장도 일본, 진나라의 직의(直衣)와 똑같은 형태를 지녔다고 볼 수 있었다. 게다가 무관의 사냥옷도 진나라와 일본의 수의(狩衣)와 같은 형태를 지녔다. 이로서 융족과 일본인의 복장, 진나라의 복장과 백제의 복장이 거의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신앙을 보자면 이들은 일본인들과 같은 태양신을 섬겨왔으며 다신교도였고 고대 일본의 무녀와 융족 무녀의 복장이 매우 흡사하다고 봐야 옳을 것 같다. 제사 방식도 일본인의 그것과 매우 똑같았고 지배 방식도 일본 사회체제, 진나라 제도와 매우 똑같았으며 풍습도 똑같았다. 이들 융족은 여융(驪戎), 강융(姜戎), 견융(犬戎), 산융(山戎)으로 나누어졌으며 지역마다 다 달라보였다. 이들의 영역은 일본 열도와 조선 반도 남부에까지 미쳤다고 전해진다. 산해경에 의하자면 왜(倭)는 연나라에 속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는 조선반도 남부와 일본열도의 산융족을 통틀어말한 것이고 다시 말하자면 산융족들은 연나라에 복속된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중요한 사실은 화장인데 이들은 일본인, 백제인과 똑같은 화장을 한 것이다. 중국 역사에 의하자면 시황제가 수은으로 화장을 했다는 것으로 오시로이(白分) 화장을 한 거였다. 이런 화장은 귀족에게 성행되었는데 먼저 눈썹을 뽑고 얼굴에 쌀가루나 수은 분말을 하얗게 칠한 다음 뽑힌 눈썹 위에 눈썹을 동그랗게 그렸다. 이런 화장 형태는 융족 전통 화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풍습이 일본, 백제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들의 풍습은 일본, 백제, 진나라에 깊숙히 스며들어있었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이들의 성씨는 백리(百里), 제갈(諸葛), 탁발(拓拔), 영(瀛-水), 진(秦), 염(苒-艸), 조(趙) 등이다. 이들은 백인 계통이라는 것인데 한국 순환학회에 의하자면 진나라, 서라벌은 슬라브족들이 세운 나라로 슬라브인들은 아리아인이라고 했다. 이것이 그 증거들로 융족들이 바로 슬라브인이라는 거였고 백인이었다. 아리아인들은 모두 백인 계통이다. 인도에 출현한 아리아인들 중 슬라브인들은 백인계통이니 더이상 진실을 감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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