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志願兵で見た朝鮮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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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の写真は 1939年朝鮮人黄君志願兵統計資料, 学歴, 職業, 各道別志願者数現況

志願兵で見た朝鮮人 - 朝鮮総督府学務局長時オハラドキサブで

古くから朝鮮で兵士と僧侶は特殊階層で他の人に寄生する生活者に蔑視されて来た. ¥"良い鉄はくぎで使わないで良民は兵士に使わない¥"は考えは電話(戦禍)が絶えなかった中国でばかり通じる諺ではなく朝鮮でも特殊な社会的環境によってこのような考えが民心を支配していた. そういう朝鮮に皇国兵役制度に採択された志願兵制度が実施されたので朝鮮はモールでは全国民が画期的と言いながらノルラウォしたし朝鮮の状況が分からない人は時期尚早だと反対したりした. 朝鮮に実施された志願兵制度は陸軍特別志願兵制度と呼ばれるのに ¥"特別¥"という言葉が ¥"普通¥"と対比される言葉で受け入れやすくて, まるで朝鮮人志願兵が特別な取り扱いや教育を受ける兵士に考えられているから先にこの制度の概要を明らかにしておこうとする.

日本の兵役制度はピルイムウィム(必任義務:満 17歳で満 40歳まですべての男の義務)である強制徴兵制度というのが公式的な方針だが支援による病的編入が認められていることも周知の事実で兵役関係は無関,海軍各課いわゆる候補生, 陸軍のすべての生徒, 海軍の学生生も, 支援による兵士と 5種支援による服務の道が開かれている. 支援による役は陸海だね皆 ¥"戸籍法の適用を受ける男¥"という規定で,¥"戸籍法の適用を受けない朝鮮人,台湾人はいくら本人が熱裂に望んでも ¥"戸籍法の適用を受けるこれ¥"の家に入籍しない以上, 兵士になることが許諾されなかった. 兵士以外に規定上特別に明示がない限り戸籍法適用の有無を問わないから現在朝鮮出身無関はすべて列挙することができない位でもう戦争に出征してかっかくした武功を立てたこれもある. しかし ¥"戸籍法の適用を受けないこれ¥"は兵士にな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が異例的な道を開いたことが陸軍特別志願兵制度で昭和 13年(1938) 春勅令で陸軍特別志願兵領が発砲されたし施行 1年半が経ってもうやっと第一歩を踏み出した制度だ. 名前は特別だが見た制度によって支援して一応兵役に服務すれば ¥"戸籍法の適用を受ける ¥"一般壮丁と等しい兵役関係と兵役の義務が生じて入隊期間中の大宇はモールでは退役後の服務期間も等しくて以前からあった志願兵制度による志願兵と全然違うことがない.

ただ特別な点は ¥"戸籍法の適用を受けないこれ¥"が兵士になるためには朝鮮総督府設立陸軍病志願者訓練所(修了期間 5ヶ月)を修了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点だ. この訓練所は陸軍病志願者に対して予備訓練を施行する目的に設立されたが特別な軍事教育が行われない. 現在朝鮮の教育方針である皇国臣民教育の方針に従って教育をさせて訓練所を修了した人だけが兵役に編入することができるのだ. 以上と一緒に制度に対する概要は朝鮮人志願兵を説明する予備知識として必ず必要なので前に説明した. そして ¥"戸籍法の適用を受けないこれ¥"は現在朝鮮人と台湾人だが陸軍病志願者訓練所に入所する者は本籍地の道知事がお勧めした人の中で選抜して入所させるようになっているので事実上取り扱いと手続きの面で台湾に戸籍を置いた人は陸軍特別志願兵にな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この制度は朝鮮人に特別に用意された制度なのを付け加えて言っておく.

過去朝鮮での軍隊に対する観念と陸軍特別志願兵制度の本質で見ていろいろに反対する批評や意見があったが, この制度が公布されて新聞とラジオで発表されると一月も経たなくて警察と憲兵隊, 郡庁に支援申し込みをした朝鮮青年が 3,619名もいたしその中には多数の血書き支援もいていくら朝鮮人たちが兵役がほしかったのかを分かった. 当時陸軍特別志願兵領が発砲されてからいくら経たなかったしサポート手続きも分からなくて制度がどんなゴッインジさえよく分からない時の状況がこうだった.

このような国民的な感情, 国家意識の自覚は一朝一夕にできるのではなくてまたオックヌリョで言っても押えつけることができないし先導してできることでもない. なおかつ兵役は犠牲する義務なのでこれは朝鮮青年がいくら憂国指定に燃えて, 今度日中戦争の展開可否が日本にあっていくら興廃の岐路に立った問題なのか徹底的に認識した結果であることだ. 朝鮮人にも兵役の義務を負担するようにしなさいという朝鮮民族の要望は日中戦争で現われたのではなくもう満州の変当時から徐徐に高揚されたことで施政 30年の間隠密に成長した朝鮮人の愛国心が満州の変で育てられて日中戦争に熟したのだ. 日中戦争が勃発してから一月後の調査によれば朝鮮人従軍者は約 6百人でこれらは軍用自動車の運転手,通訳,案内軍部などそれぞれの職業によって第一線で勇ましく従軍した. 日中戦争が起こって数日後, どの朝鮮人篤志家が国防義勇団を編成率いて第一線で奉公の誠心をつくすという内容を新聞に発表すると一日ぶりに約 50人の応募者がいたことを見てもこの戦争をきっかけで朝鮮人に義勇奉公しようとする忠誠心がいくらおこっていたのか見当をつけることができる.

そういう愛国運動は派手な従軍支援だけではない. 幼い学童たちが松かさを拾って集めて国防献金を出した話, その日の食事も難しいやもめが節米(節米)をして慰問献金を言ったこと, 何も奉事することができないから草を切って言葉の食糧ででも献納しようと何日をかかって遠い道を尋ねて来た農夫の話など, このような資料を集めれば莫大な羊になるでしょう. このような運動と誠意の足では朝鮮の身分,階級を問わず今日皇国臣民になるための当たり前の義務で考えられるほどに民衆の感情が熟している. 朝鮮統治上画期的だと言う陸軍特別志願兵制度は日中戦争をきっかけに誕生されたことだがそれは施政 30年の政治功績とここに感応した朝鮮人の愛国心, 国家意識の自覚が持って来た制度だとするでしょう. 黄道の撞木(撞木)と朝鮮民族の聡い種(綜)よお互いにでくわして自然に鳴らす天が下った音という立派な比喩を一人がいるが日照洞である(一朝同仁)の聖地(聖旨)に基礎した半島統治の道義性に対して朝鮮人も直ちに応じて皇国臣民で住んだし, また生きて行っていることを立証したのだ.

昭和 13年(1938) 11月末第 1期修了生で陸軍病志願者訓練所を修了して現役歩兵に入営した志願兵異人席上等兵は軍隊で第 1期教育を受けてからいくばくもなくて北支(ブックズンググック, 中国の華北地方) 出動命令を受けて勇躍して戦場に発ったこれに, 昭和 14年(1939) 5月 21日夜山墅の討伐前で志願兵最初の貴重な犠牲者になって戦死した. その晩中隊長に引き続き先頭に立った異人席軍は中国兵士が投げた手榴弾破片で腹部からなどまで貫通傷を負って職人切断して電信が血だらけになって倒れた. この時中隊長が異人席,異人席して何回呼んで彼を励ましたがそのまま精神を失ってしまった. 2時間位苦闘したあげくもう再生不可能さが分かった時,つらい呼吸をして天皇陛下万歳を三度叫び終わる何らの後悔がオブソ. 戦友たち, なにとも中国兵士らを打ち破ってください. 日本はこの聖典(聖戦)で必ず勝って将来に立派に日本と中国の提携する日が来るはずです. ただ盛業(聖業)の途中に先に行くことが惜しいプンイオだと遺言して故郷にいる両親,兄弟,妻子, 皆八人の貧しい遺族には全然ものともしなくて看護病に手を任せたままほほ笑みさえ帯びながら酸化したという通知が訓練所に到着した. 彼の脳裏にはイルオック軍国のために殉国して皇国臣民の義務を果たした感激で一杯で多分自分が朝鮮人という考えや観念を少しもなかったはずだ.

朝鮮では人が死んだ場合に今日にもやれやれ,やれやれと大きく悲しく泣くのに彼が戦死したという通知が来て軍需と警察署長が遺族を慰めに行った時彼の両親の態度ももとのままだったと言う. わずか 6ヶ月の間の訓練所での訓練と短い軍隊生活期間の教育だけでこんなに立派な皇国臣民が誕生したと思うことはちょっと軽率で大胆なの話だが, すべての要素たちが彼の精神を成したのだ. モールでは教育自体を否定することではない. 初めて訓練所に入って来る当時の志願兵は日常生活との差で戸惑ってして, 規範上でもこんな軍隊生活ができるかと思うこれもある. 入浴法でから食事の時の規範, 寝具整頓, 内務班整理など軍隊生活に入って来ればないしの一般壮丁も大きく状況が変わる法なのに朝鮮人志願兵には私たち船生活が慣れないで食べ物も違ったらまさに生活が大きく変わるのだ. したがって税収,トイレ出入りに至るまで地図が必要になる. また初めて京城に出て煙突のない電車が走ると言う田舍者もいる.

志願兵志願者として入所しようとするこれは体力等位が甲種である人, 小学校卒業, 志操があって家計が困らない人という適格条件があって道知事に推薦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しさらには徴兵-身体検事と学科試験, 人物の調査を通して選発された人なので知識の程度に見てもないしである一般壮丁と比べて全然遜色があるわけがない. それに昭和 13年(1938)には約 3千人の支援者の中に 400人を, 昭和 14年(1939)には約 1万 2千 3百名義志願者の中に 600人のために上で言った適格者の中に選抜したから言わば朝鮮青年の精鋭だと見られる. がのように選抜者の生活様式と水準などが以上のようなので残りは推し測るに値するが, 6ヶ月の訓練所生活を通じて生活の差によるすべての不便と差し支えを乗り越えて生き方を改善して入営するようになる.

サポート目的や心得が確固で性分が善良な青年を選抜しても入所当時は寄せ集めだと酷評にあうがそんな人も修了時期が近くなって兵役編入のための国軍の検閲が行われる頃には立派な帝国軍人になって精神はモールでは顔表情でから全然違った人になって頼もしい. 朝鮮人はないし, 満洲, 中国, その外の各地域でさまざまな不平を聞くようになるのに移住労動者として教養も何もない人を除いた一般朝鮮人特に志願兵としての朝鮮人は真実で愛国的情熱を持って人格が陶冶された立派な皇国臣民なのを筆者は確認するところ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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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병으로 본 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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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1939년 조선인 황군 지원병 통계자료, 학력, 직업, 각 도별 지원자 수 현황

지원병으로 본 조선인 -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시오하라 도키사부로

옛부터 조선에서 병사와 승려는 특수계층으로 다른 이에게 기생하는 생활자로 멸시당해 왔다. "좋은 쇠는 못으로 쓰지 않고 양민은 병사로 쓰지 않는다"는 생각은 전화(戰禍)가 끊이지 않던 중국에서만 통하는 속담이 아니라 조선에서도 특수한 사회적 환경으로 인하여 이러한 생각이 민심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한 조선에 황국병역제도로 채택된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었으므로 조선은 몰론 전국민이 획기적이라며 놀라워했고 조선의 상황을 모르는 사람은 시기상조라고 반대하기도 했다. 조선에 실시된 지원병제도는 육군 특별지원병제도라고 불리는데 "특별"이라는 말이 "보통"과 대비되는 말로 받아들이기 쉽고, 마치 조선인 지원병이 특별한 취급이나 교육을 받는 병사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먼저 이 제도의 개요를 밝혀 두고자 한다.

일본의 병역 제도는 필임의무(必任義務:만 17세에서 만 40세까지 모든 남자의 의무)인 강제 징병 제도라는 것이 공식적인 방침이지만 지원에 의한 병적편입이 인정되고 있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며 병역관계는 무관,해군 각과 소위 후보생, 육군의 모든 생도, 해군의 학생생도, 지원에 의한 병사와 5종 지원에 의한 복무의 길이 열려 있다. 지원에 의한 역은 육해군 모두 "호적법의 적용을 받는 남자"라는 규정이고,"호적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조선인,대만인은 아무리 본인이 열렬히 바라더라도 "호적법의 적용을 받는 이"의 집에 입적하지 않는 이상, 병사가 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병사 이외에 규정상 특별히 명시가 없는 한 호적법 적용의 유무를 묻지 않기 때문에 현재 조선출신 무관은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며 이미 전쟁에 출정하여 혁혁한 무공을 세운 이도 있다. 그러나 "호적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이"는 병사가 될 수 없었지만 이례적인 길을 연 것이 육군 특별지원병제도이고 쇼와 13년(1938) 봄 칙령으로 육군 특별지원병령이 발포되었고 시행 1년 반이 지나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디딘 제도이다. 이름은 특별하지만 본 제도에 의해 지원하고 일단 병역에 복무하면 "호적법의 적용을 받는 "일반 장정과 동일한 병역관계와 병역의무가 생기고 입대기간 중의 대우는 몰론 퇴역 후의 복무 기간도 동일하여 이전부터 있던 지원병제도에 의한 지원병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단지 특별한 점은 "호적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이"가 병사가 되기 위해서는 조선총독부 설립 육군병 지원자 훈련소(수료기간 5개월)를 수료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훈련소는 육군병 지원자에 대해서 예비훈련을 시행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특별한 군사 교육이 행해지지는 않는다. 현재 조선의 교육방침인 황국신민교육의 방침에 따라 교육을 시키고 훈련소를 수료한 사람만이 병역에 편입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제도에 대한 개요는 조선인 지원병을 설명하는 예비지식으로서 꼭 필요하므로 앞서 설명하였다. 그리고 "호적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이"는 현재 조선인과 대만인이지만 육군병 지원자 훈련소에 입소하는 자는 본적지의 도지사가 추천한 사람 중 선발하여 입소시키도록 되어 있으므로 사실상 취급과 수속의 면에서 대만에 호적을 둔 사람은 육군특별지원병이 될 수 없으므로 이 제도는 조선인에게 특별히 마련된 제도임을 부언해 둔다.

과거 조선에서의 군대에 대한 관념과 육군특별지원병제도의 본질로 봐서 여러가지로 반대하는 비평이나 의견이 있었지만, 이 제도가 공포되고 신문과 라디오에서 발표되자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경찰과 헌병대, 군청에 지원신청을 한 조선청년이 3,619명이나 있었고 그 중에는 다수의 혈서 지원도 있어 얼마나 조선인들이 병역을 원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당시 육군특별지원병령이 발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지원 수속도 모르고 제도가 어떤 것인지조차 잘 모를 때의 상황이 이러했다.

이러한 국민적인 감정, 국가의식의 자각은 일조일석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억누려고 해도 억누를 수 없고 선동해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병역은 희생하는 의무이므로 이는 조선청년이 얼마나 우국지정에 불타고, 이번 중일전쟁의 전개 여부가 일본에게 있어 얼마나 흥패의 기로에 선 문제인지 철저하게 인식한 결과인 것이다. 조선인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부담하게 하라는 조선민족의 요망은 중일전쟁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만주사변 당시부터 서서히 고양된 것이고 시정 30년 동안 은밀하게 성장한 조선인의 애국심이 만주사변에서 키워지고 중일전쟁으로 무르익은 것이다. 중일전쟁이 발발한지 한 달 후의 조사에 의하면 조선인 종군자는 약 6백 명이고 이들은 군용 자동차의 운전수,통역,안내군부 등 각각의 직업에 따라 제일선에서 용감하게 종군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얼마 후, 어느 조선인 독지가가 국방의용단을 편성 인솔하여 제일선에서 봉공의 성심을 다하겠다는 내용을 신문에 발표하자 하루만에 약 50명의 응모자가 있었던 것을 봐도 이 전쟁을 계기로 조선인에게 의용봉공하고자 하는 충성심이 얼마나 일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애국운동은 화려한 종군 지원만이 아니다. 어린 학동들이 솔방울을 주워 모아 국방헌금을 낸 이야기, 그날의 끼니도 어려운 과부가 절미(節米)를 하여 위문헌금을 한 이야기, 아무것도 봉사할 수 없으니 풀을 베어 말의 식량으로라도 헌납하고자 며칠을 걸려 먼 길을 찾아 온 농부의 이야기 등, 이러한 자료를 모으면 막대한 양이 될 것이다. 이러한 운동과 성의의 발로는 조선의 신분,계급을 막론하고 오늘날 황국신민이 되기 위한 당연한 의무로 생각될 정도로 민중의 감정이 무르익고 있다. 조선통치상 획기적이라고 할 육군특별지원병제도는 중일전쟁을 계기로 탄생된 것이지만 그것은 시정 30년의 치적과 이에 감응한 조선인의 애국심, 국가의식의 자각이 가져온 제도라고 할 것이다. "황도의 당목(撞木)과 조선민족의 총명한 종(綜)아 서로 마주쳐 저절로 울리는 하늘이 내린 소리"라는 훌륭한 비유를 한 사람이 있지만 일조동인(一朝同仁)의 성지(聖旨)에 기초한 반도 통치의 도의성에 대해서 조선인도 즉각 반응하여 황국신민으로 살았고, 또한 살아가고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쇼와 13년(1938) 11월 말 제 1기 수료생으로 육군병 지원자 훈련소를 수료하고 현역 보병으로 입영한 지원병 이인석 상등병은 군대에서 제 1기 교육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북지(북중국, 중국의 화북지방) 출동 명령을 받고 용약하여 전장으로 떠난 이로, 쇼와 14년(1939) 5월 21일 밤 산서의 토벌전에서 지원병 최초의 귀중한 희생자가 되어 전사하였다. 그날 밤 중대장에 이어 선두에 선 이인석 군은 중국 병사가 던진 수류탄 파편으로 복부에서 등까지 관통상을 입고 장이 절단되어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이때 중대장이 "이인석","이인석"하고 여러번 불러 그를 격려했으나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2시간 정도 고투한 끝에 이미 재생 불가함을 알았을 때,괴로운 호흡을 하며 천황폐하만세를 세번 외치고 "나는 아무런 후회가 없소. 전우들, 부디 중국 병사들을 무찔러 주시오. 일본은 이 성전(聖戰)에서 반드시 이겨 장래에 훌륭하게 일본과 중국이 제휴할 날이 올 것이오. 다만 성업(聖業)의 도중에 먼저 가는 것이 아쉬울 뿐이오"라고 유언하고 고향에 있는 양친,형제,처자, 모두 여덟명의 가난한 유족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간호병에게 손을 맡긴 채 미소마저 띠며 산화했다는 통지가 훈련소에 도착했다. 그의 뇌리에는 일억 군국을 위해 순국하고 황국신민의 의무를 다한 감격으로 가득하여 아마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생각이나 관념을 조금도 없었을 것이다.

조선에서는 사람이 죽었을 경우에 오늘날에도 "아이고,아이고"하고 크게 슬피 우는데 그가 전사 했다는 통지가 와서 군수와 경찰서장이 유족을 위로하러 갔을 때 그의 양친의 태도 또한 의연했다고 한다. 고작 6개월 간의 훈련소에서의 훈련과 짧은 군대생활 기간의 교육만으로 이렇게 훌륭한 황국신민이 탄생했다고 보는 것은 다소 경솔하고 대담한 얘기지만, 모든 요소들이 그의 정신을 이룬 것이다. 몰론 교육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 훈련소에 들어올 당시의 지원병은 일상생활과의 차이로 당혹해 하고, 규범상으로도 이런 군대생활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이도 있다. 입욕법에서 부터 식사시의 규범, 침구 정돈, 내무반 정리 등 군대생활에 들어오면 내지의 일반 장정도 크게 상황이 달라지는 법인데 조선인 지원병에게는 우리선 생활이 익숙하지 않고 음식도 다르니 그야말로 생활이 크게 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수,화장실 출입에 이르기까지 지도가 필요하게 된다. 또 처음 경성에 나와서 굴뚝이 없는 전차가 달린다고 하는 시골사람도 있다.

지원병 지원자로서 입소하려는 이는 체력 등위가 갑종인 사람, 소학교 졸업, 지조가 있고 가계가 곤란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적격 조건이 있어서 도지사에게 추천을 받아야 하고 나아가서 징병-신체 검사와 학과 시험, 인물 조사를 거쳐 선발된 사람이므로 지식의 정도로 봐도 내지인 일반 장정과 비교해 전혀 손색이 있을리가 없다. 게다가 쇼와 13년(1938)에는 약 3천 명의 지원자 중에 400명을, 쇼와 14년(1939)에는 약 1만 2천 3백 명의 지원자 중에 600명을 위해서 위에서 말한 적격자 중에 선발했기에 말하자면 조선청년의 정예라 볼 수 있다. 이 처럼 선발자의 생활양식과 수준 등이 이상과 같으므로 나머지는 미루어 짐작할 만 하지만, 6개월의 훈련소 생활을 통하여 생활의 차이로 인한 모든 불편과 지장을 극복하고 생활태도를 개선하여 입영하게 된다.

지원 목적이나 마음가짐이 확고하고 성품이 선량한 청년을 선발해도 입소 당시는 오합지졸이라고 혹평을 당하지만 그런 사람도 수료 시기가 가까워지고 병역 편입을 위한 국군의 검열이 행해질 즈음에는 훌륭한 제국 군인이 되어 정신은 몰론 얼굴표정에서 부터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믿음직 스럽다. 조선인은 내지, 만주, 중국, 그 밖의 각 지역에서 여러가지 불평을 듣게 되는데 이주 노동자로서 교양도 아무것도 없는 사람을 제외한 일반 조선인 특히 지원병으로서의 조선인은 진실되며 애국적 정열을 지니고 인격이 도야된 훌륭한 황국신민임을 필자는 확인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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