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デモ鎮圧の象徴、戦闘警察が42年の歴史閉じる=韓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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デモ鎮圧の象徴、戦闘警察が42年の歴史閉じる=韓国
2013年09月27日17時39分

  デモ鎮圧の象徴のように見なされた戦闘警察(戦警)が創設42年で歴史の中へと消えた。25日午後、ソウル渼芹洞(ミグンドン)の警察庁で最後の戦警(3211期)183人の合同転役式が開かれた。韓国現代史の一つの軸をなした戦警の歴史を、ストーリーテリング形式で振り返ってみた。

  怒った群衆が石や火炎瓶を投げる。「護憲撤廃独裁打倒」。厳粛な祈祷文のようなスローガンがソウルの上空を揺るがす。石や火炎瓶が野手の送球のように飛んでくるデモ現場。“私たち(戦警)”は、そこから一歩も動けなかった。

  私たちは私たちなりにデモ隊に対応した。催涙弾を発射すればデモ隊はもたもたと逃げ始めた。彼らはすぐに涙と鼻水でぐしょぐしょになった。私たちは鎮圧棒を振り回して彼らを追った。1980年代、火炎瓶と催涙弾が豪雨のように降り注ぐ日々が続いていた。

  ◆一時は民主化を弾圧する公共の敵

  人々は私たちを“戦警”と呼んだ。正式名称は戦闘警察巡査。軍に入隊をして抽出され警察に配置された若者たちだった。誰も志願したことはなかった。だが、私たちから指差される人が多かった。民主化運動の真っ最中だった時期には特にそうだった。デモ現場で戦警とデモ隊は戦闘に近い戦いを行った。催涙弾を発射して鎮圧棒を我を忘れて振り回してみたら、共にキャンパスで学んだ友人たちに出会ったこともあった。

  特に87年は忘れられない年だ。大統領直選制を要求するデモが野火のように全国に広がっていった。私たちは催涙弾を発射しながら、その野火を消さ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その年の6月9日。延世(ヨンセ)大学の前でデモをしたイ・ハニョル君(当時21歳、延世大経営学)が私たちの中の誰かが撃った催涙弾に当たって亡くなった。当時のデモ現場では私たちが撃った催涙弾で亡くなったりケガをしたりした人々が続出した。私たちの強硬鎮圧は「87年民主抗争」の導火線になった。私たちの出生日は71年1月1日。人で言うなら42歳の中年に達した私だ。2013年9月25日。私たちは42年間の命脈を受け継いできた戦警の歴史に終止符を打った。最後の戦警(3211期)183人がソウル渼芹洞の警察庁大講堂で合同転役式をした。国防部と警察は兵役減少を勘案し、2012年1月から戦警の抽出をしなかった。

  42年間の戦警の歴史が終えられる今日、戦警という名前は人々にどのように記憶されるだろうか。

  先立って話したように、韓国には恥ずかしい歴史がある。民主化闘争時代に戦警はデモを鎮圧するのが任務であった。その時、合法デモは存在しなかった。私たちは無条件にデモ隊を防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しかし私たちの歴史に強硬鎮圧の場面だけがあるのではない。

  事実私たちは、対スパイ作戦のために創設された。68年に北朝鮮軍31人が青瓦台(チョンワデ、大統領府)を目標に侵入してきたいわゆる「金新朝事件」が契機となった。70年12月31日に戦闘警察隊設置法が公布された。翌年から軍入隊者の中から一部が戦警に選ばれた。以後42年間、戦警で服務し転役した人員は32万9266人に及ぶ。

  時代ごとに私たちの役割は少しずつ変わっていった。70年代は対スパイ作戦に主に投入された。その時はスパイがしばしば出没した。75年9月11日には全羅北道高敞郡(チョンラブクド・コチャングン)のチャリョンリ浜辺に現れた武装スパイと交戦を繰り広げたキム・カプチュン一警(当時21歳)ら戦警3人が殉職もした。

  80年代から90年代中盤まではデモの鎮圧が私たちの主な任務であった。人々は私たちが乗るバスを「鶏舎車」と呼んだ。その時の私たちの境遇がまさにそうだった。私たちはいつ捕まって食べられてしまうかも知れない鶏のようにデモ現場に乗せられていった。そちらで怒ったデモ隊に対抗して催涙弾を発射し、鎮圧棒を振り回した。別の見方をすれば20代青年の同じ年頃同士が命をかけた戦いを行っていた局面だった。大学生のデモ隊に向かって大学生戦警が催涙弾を発射した。大学生の戦警を狙って大学生デモ隊は石と火炎瓶を投げた。相互の区分が曖昧なデモ現場で、デモ隊も戦警も命を落とすことが少なくなかった。

  ◆釜山東義(トンウィ)大学デモ時は火炎瓶に3人殉職

  激動の現代史は私たちにも危うい時だった。42年間、デモ鎮圧や対スパイ作戦など任務を遂行していた間に殉職した戦警は322人に達する。

  89年5月3日、釜山東義大学デモ現場ではモ・ソンテ三警ら戦警3人が殉職した。当時の学生デモ隊は戦警5人を監禁したし、彼らを救出する過程で学生たちが投げた火炎瓶で火事が起こり惨劇が広がった。

  後日、東義大デモ学生46人は民主化運動の関連者と認定されて補償を受けたが、戦警の殉職者には400万ウォン余りの補償金が全てであった。4月に補償手続きがしっかり行われて遺族にそれぞれ1億1400万ウォン余りが支給された。

  90年代後半から石と火炎瓶を動員したデモは、ほとんど消えたようなものだ。このため2000年代以後、私たちの主な任務は警察の治安業務を補完することに変わった。しかし2000年代以後も私たちがデモ現場に投入されることは続いた。人々は賃金の引き上げを要求するために、米国牛肉輸入反対のために、自由貿易協定(FTA)反対のために広場に集まった。2008年BSE(牛海綿状脳症)ろうそくデモの時に私たちは光化門(クァンファムン)に鶏舎車で車壁を作ってデモ隊を全身で防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一部のデモ隊は火炎瓶の代わりに鉄パイプや竹槍を使った。下手をすると命が脅威にさらされる状況でも私たちは盾一つで耐え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2006年には「戦警・機動警察の保護者の集い」が結成されデモ隊の暴力性を糾弾もした。しかしこの頃も私たちに向かって鉄パイプを振り回す暴力デモ隊は消えなかった。戦警という名前が歴史の中に消える今日、「戦警=加害者」「デモ隊=被害者」という等式も共に消え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

  ◆32万9266人服務…最後の期が転役

  42年間、戦警は韓国現代史の重要な場面ごとに欠かさなかった。時々私たちは民主勢力を弾圧する公共の敵のようにあらわれた。だが、それは法秩序の守護という私たちの使命を忠実に履行する過程で広がった不祥事であった。私たちがしてきた役割は、義務警察巡査(機動警察)と職業警察に渡る。軍に入隊して選び出された戦警と違い、機動警察は初めから警察に志願して21カ月間義務服務する。機動警察はこの頃、警察公務員就職に有利だという理由などで若者の間で人気だという。

  私たちは、軍隊から選び出されて警官服を着て、除隊して軍服を再び着た。軍人も警察でもない不明瞭な身分。しかし私たちの所属がどこであったのかは重要ではないのかも分からない。この日最後の戦警転役式でイ・ソンハン警察庁長官が話した。「戦闘警察隊員は国家のために、活気盛んな青春を捧げました」。大韓民国の戦警42年。私たちの盛んな栄辱の歴史が裏舞台から消えていった。

http://japanese.joins.com/article/576/17657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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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 진압의 상징, 전투 경찰이 42년의 역사 닫는다=한국

데모 진압의 상징, 전투 경찰이 42년의 역사 닫는다=한국
2013년 09월 27일 17시 39분

  데모 진압의 상징과 같이 보여진 전투 경찰(전경)이 창설 42년에 역사안으로 사라졌다.25일 오후, 서울渼근동(미군돈)의 경찰청에서 마지막 전경(3211기) 183명의 합동전역식이 열렸다.한국 현대사의 하나의 축을 이룬 전경의 역사를, 스토리테링 형식에서 되돌아 보았다.

  화낸 군중이 돌이나 화염병을 던진다.「호헌 철폐 독재 타도 」.엄숙한 기도문과 같은 슬로건이 서울의 상공을 흔든다.돌이나 화염병이 야수의 송구와 같이 날아 오는 데모 현장.“우리(전경)”는, 거기로부터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나름대로 데모대에게 대응했다.최루탄을 발사하면 데모대는 우물쭈물도망치기 시작했다.그들은 곧바로 눈물과 콧물로 흠뻑 젖어 있게 되었다.우리는 진압봉을 휘두르고 그들을 쫓았다.1980년대, 화염병과 최루탄이 호우와 같이 쏟아지는 날들이 계속 되고 있었다.

  ◆한때는 민주화를 탄압하는 공공의 적

 사람들은 우리를“전경”라고 불렀다.정식명칭은 전투 경찰 순경.군에 입대를 해 추출되어 경찰에 배치된 젊은이들이었다.아무도 지원했던 적은 없었다.하지만, 우리로부터 가리켜지는 사람이 많았다.민주화 운동으로 한창이었던 시기에는 특히 그랬다.데모 현장에서 전경과 데모대는 전투에 가까운 싸움을 실시했다.최루탄을 발사해 진압봉을 넋을 잃어 휘둘러 보면, 모두 캠퍼스에서 배운 친구들을 만난 적도 있었다.

 특히 87년은 잊을 수 없는 해다.대통령직 선거제를 요구하는 데모가 야화와 같이 전국에 확대되었다.우리는 최루탄을 발사하면서, 그 야화를 지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그 해의 6월 9일.연세(욘세) 대학의 앞에서 데모를 한 이・하뇨르군(당시 21세, 연세대경영학)이 우리안의 누군가가 공격한 최루탄에 해당되어 죽었다.당시의 데모 현장에서는 우리가 공격한 최루탄으로 죽거나 상처를 입거나 한 사람들이 속출했다.우리의 강경 진압은「87년 민주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우리의 출생일은 71년 1월 1일.사람으로 말한다면 42세의 중년에 이른 나다.2013년 9월 25일.우리는 42년간의 명맥을 계승해 온 전경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마지막 전경(3211기) 183명이 서울渼근동의 경찰청대강당에서 합동전역식을 했다.국방부와 경찰은 병역 감소를 감안해, 2012년 1월부터 전경의 추출을 하지 않았다.

  42년간의 전경의 역사를 끝낼 수 있는 오늘, 전경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국에는 부끄러운 역사가 있다.민주화 투쟁 시대에 전경은 데모를 진압하는 것이 임무였다.그 때, 합법 데모는 존재하지 않았다.우리는 무조건 데모대를 막지 않으면 안 되었다.그러나 우리의 역사에 강경 진압의 장면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대스파이 작전을 위해서 창설되었다.68년에 북한군 31명이 청와대(톨와데, 대통령부)를 목표로 침입해 나무 도미「김 아라타 아침 사건」가 계기가 되었다.70년 12월 31일에 전투 경찰대 설치법이 공포되었다.다음 해부터 군입대자중에서 일부가 전경으로 선택되었다.이후 42년간, 전경으로 복무해 전 부린 인원은 32만 9266명에 이른다.

  시대 마다 우리의 역할은 조금씩 바뀌어 갔다.70년대는 대스파이 작전에 주로 투입되었다.그 때는 스파이가 자주 출몰했다.75년 9월 11일에는 전라북도고창군(톨라브크드・코체군)의 체롤리 해변에 나타난 무장 스파이와 교전을 펼친 김・카프틀일경(당시 21세) 등전경 3명이 순직도 했다.

 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는 데모의 진압이 우리의 주된 임무였다.사람들은 우리가 타는 버스를「닭장차」라고 불렀다.그 때의 우리의 경우가 확실히 그랬다.우리는 언제 잡혀 먹을 수 있어 버릴지도 모르는 닭과 같이 데모 현장에 실려 갔다.그 쪽에서 화낸 데모대에게 대항해 최루탄을 발사해, 진압봉을 휘둘렀다.다른 견해를 하면 20대 청년의 같은 년경끼리가 목숨을 건 싸움을 실시하고 있던 국면이었다.대학생의 데모대를 향해 대학생전경이 최루탄을 발사했다.대학생의 전경을 노려 대학생 데모대는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상호의 구분이 애매한 데모 현장에서, 데모대도 전경도 목숨을 잃는 것이 적지 않았다.

  ◆부산동 도리(톤위) 대학 데모시는 화염병에 3명 순직

  격동의 현대사는 우리에게도 위험할 때였다.42년간, 데모 진압이나 대스파이 작전 등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동안에 순직한 전경은 322명에 이른다.

 89년 5월 3일, 부산 동의대학 데모 현장에서는 모・손테3경등전경 3명이 순직했다.당시의 학생 데모대는 전경 5명을 감금했고, 그들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으로 화재가 일어나 참극이 퍼졌다.

  후일, 동의대 데모 학생 46명은 민주화 운동의 관련자라고 인정되고 보상을 받았지만, 전경의 순직자에게는 400만원 남짓의 보상금이 모두였다.4월에 보상 수속이 확실히 행해져 유족에게 각각 1억 1400만원남짓이 지급되었다.

  90년대 후반부터 돌과 화염병을 동원한 데모는, 거의 사라진 것 같은 것이다.이 때문에 2000년대 이후, 우리의 주된 임무는 경찰의 치안 업무를 보완하는 것에 바뀌었다.그러나 2000년대 이후도 우리가 데모 현장에 투입되는 것은 계속 되었다.사람들은 임금의 인상을 요구하기 위해서,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를 위해서, 자유무역협정(FTA) 반대를 위해서 광장에 모였다.2008년 BSE(우해면상뇌증) 양초 데모때에 우리는 광화문(쿠팜)에 닭장차로 차벽을 만들어 데모대를 전신으로 막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부의 데모대는 화염병 대신에 철파이프나 죽창을 사용했다.잘못하면 생명이 위협에 노출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방패 하나로 참지 않으면 안 되었다.2006년에는「전경・기동 경찰의 보호자의 모임」가 결성되어 데모대의 폭력성을 규탄도 했다.그러나 요즘도 우리를 향해 철파이프를 휘두르는 폭력 데모대는 사라지지 않았다.전경이라는 이름이 역사안에 사라지는 오늘, 「전경=가해자」「데모대=피해자」라고 하는 등식도 모두 사라질 수 있을까.

  ◆32만 9266명 복무…마지막 기가 전역

  42년간, 전경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장면 마다 빠뜨리지 않았다.가끔 우리는 민주 세력을 탄압하는 공공의 적과 같이 나타났다.하지만, 그것은 법질서의 수호라고 하는 우리의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는 과정에서 퍼진 불상사였다.우리가 해 온 역할은, 의무 경찰 순경(기동 경찰)과 직업 경찰에 건넌다.군에 입대해 골라내진 전경과 달라, 기동 경찰은 처음부터 경찰로 지원해 21개월간 의무 복무한다.기동 경찰은 요즘, 경찰 공무원 취직에 유리하다고 하는 이유등에서 젊은이의 사이에 인기라고 한다.

 우리는, 군대로부터 골라내져 경관옷을 입고, 제대해 군복을 다시 입었다.군인도 경찰도 아닌 불명료한 신분.그러나 우리의 소속이 어디서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이 날 마지막 전경 전역식에서 이・손한 경찰청 장관이 이야기했다.「전투 경찰대원은 국가를 위해서, 활기 번성한 청춘을 바쳤던 」.대한민국의 전경 42년.우리의 번성한 영욕의 역사가 뒤무대로부터 사라져 갔다.

http://japanese.joins.com/article/576/17657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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