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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人の朝鮮人狩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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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人ドンドエンダ".. 子供-女までセキズルで首縛って連れて行って


忘れた戦争 "丁酉災乱"
10火: 朝鮮人奴隷狩り

壬辰の乱と丁酉災乱当時名古屋性一帯を描いた ‘ヒゼンナゴヤソングドビョングプング(肥前名護屋城図屏風・名古屋性博物館所長)’ 絵(左側)と現在の名古屋性一帯(右側). 倭軍たちの朝鮮侵略司令部だ.“日本であらゆる商人たちが (朝鮮で) 来た. その中に人を売買する者もいた. 本陣の後を付きまとって老若男女するまでもなく買受けた. 子で首を縛った後多くの人を幾列にも縛りつけて駆って行くのに, よく歩いて行くことができなければ後から棒で叩いてぶんなぐった. 地獄の亜房(阿房)という獅子が罪人を押しこめて苦しめるのがこれと同じだろう.”(‘朝鮮日日記’, 1597年 11月 19日)

倭軍のゾンググンウィスング(従軍医僧)であるゲイネン(慶念)は朝鮮人たちを猿のように縛った後牛馬(牛馬)をひくようにして, 重い荷物を背負って行くようにしながらせがむ日本商人たちの行動を蹴るよ目で見られないと記録した. 丁酉災乱勃発初年度初冬, 湖南を含めた大部分の南部地方が倭軍の手元に落ちた時だった.

朝鮮は当時日本商人たちにはおびただしいお金を儲けることができる機会の市場だった. 倭軍に付いて朝鮮に入って来た商人たちは軍糧と軍需物資を調逹する一方で人売買にまで手を出した. 特に人商売は最高の異聞が残った.

商人たちに朝鮮人を売る主体は倭軍だった. 戦争以前倭寇たちが朝鮮海岸地域を侵奪して朝鮮人を捕えて連れ行って日本で強制労役をさせたのとは全然性格が違った. 倭軍は朝鮮人を取れば現地で日本人人身売買上に売ってしまうとか日本に連れて行って一生するように奴婢にこき使った. このために戦争都市の名古屋性は朝鮮人虜たちにあふれた. 丁酉災乱の時の七酸度で倭軍にブッドルリョガンゾングフィドックは “帰国途中立ち寄った名古屋性で向い合う人の中に反以上が朝鮮人だった”(‘月峯海上録’)で記録した.

朝鮮人奴隷たちの膏血で賑わった軍事都市

130余個の大名陣営たちが聞いてあった名古屋城跡. 佐賀県=パク・ヨンチョル記者 skyblue@donga.com記者は先週日本九州西北団サガ(佐賀) 現がラス(唐津) 市の名古屋性(愛知現の名古屋性と区別してヒゼンナゴヤソングともする)を捜した. がラスは日本人たちが中国を示す表現である ‘党(唐)’に行く ‘渡り場(津)’という意味で, かつてから大陸を行き交う港だった. こちらから釜山までは海路で 278km 余りだ. 倭軍の出兵拠点誌と同時に電線司令部である名古屋性が建てられた背景だ.

豊臣秀吉は 1592年わずか 5ヶ月ぶりにこの性を完成した. 面積は約 17万 m〓. 秀吉が一生の力作で作った大阪城次の行く大きさだった. 彼は戦争初期に名古屋性泉水閣にとどまりながら命令を下した. 性周辺の半径 3km 出す日本各地で差出された大名(大名・領主)たちの陣営でごった返した. 大名たちはこちらで旗下部隊員たちを導いて朝鮮で支払って行って, こちらに帰還した. 壬辰の乱と丁酉災乱をひっくるめて 20万兵力が名古屋性で朝鮮に出兵した. 今も当時の陣営ところには城壁とToruなどが比較的良好な状態で残っている.

名古屋性でナゴヤポ(万)につながる海までの野原には壬辰の乱と丁酉災乱当時人口 10のみを越す軍事都市が形成された. 朝鮮で惨めな殺戮と拉致が起っているうちに秀吉は黄金茶の間(黄金茶室)で金になった湯飲みによる車と一緒に遊興を楽しんだ. 城内では日本伝統の仮面劇櫓(能)と歌連歌(連歌)が公演されるなど不夜城を成した.

名古屋性でひかれて来た朝鮮人虜たちは日本内各大名たちの領地に引かれて行くとか, 当時国際貿易港だった長崎に移されて奴隷に売れて行った. 一部大名たちははじめから朝鮮人たちを奴隷に売るつもりで名古屋性南側の長崎港でゴッザング入港したりした.

ポルトガルまで介入した国際掻例挙という

16世紀日本長崎港でポルトガル商人たちとイエズス会宣教師, 日本人たちが交流する場面を盛った ‘南蛮屏風(南蛮屏風)’.日本人たちが朝鮮人を奴隷に売ることにポルトガル人たちが積極介入されていた. 当時全世界奴隷市場を掌握していたポルトガル奴隷上たちはスーダンと方法を選り分けない人間狩りで悪名が高かった. ポルトガル奴隷上たちの運勢を受けた日本人たちは朝鮮人拉致を一攫千金の機会に思った.

“前進(戦陣)の (倭軍) 祭場(諸将) の中ずるい者ははじめから人身売買を目的に朝鮮人たちを大量盗みして来たりした. (奴隷市場に興盛した長崎の) 一部日本人たちは朝鮮人をつかまえて来るために朝鮮に渡航するために努力した. 彼らは朝鮮南部など各地を捜し回って男女を問わず朝鮮人を直接買受けて長崎等地に連れて行ってポルトガル商人にチォルポ(弔銃)や絹を受けて売ってしまった.”(‘耶蘇会宣教師の朝鮮?〓救済教化’)

はなはだしくはポルトガル商人が朝鮮に入って来て直接取り引きしたと見られる資料もある. ポルトガル商人たちが倭軍が朝鮮南部地方に駐屯している時わざわざ現地にインメソン(人買船・奴隷売買船)を送って朝鮮虜を直接収容したという記録(1598年 9月 4日, 日本耶蘇会 宣教聖職者会 報告)と, 戦争が終わった後朝鮮の備辺司が審問した虜たちの中にポルトガル商人早秧メンドス, 南蛮係黒人 1人などもあった(1604年 6月 22日, ‘登録遺草’)は供招記録だ.

日本の国際貿易港である長崎(長崎)とヒでも(平戸) 等地で売買された朝鮮人たちは香港, マカオ, マニラを含めてインド, ヨーロッパにまで売れて行った.

“驚くべきである位多くの朝鮮砲でが日本に送致されて主に長崎方面で売れた. ポルトガル商人はこういうわけで莫大な利益を得た.”(‘耶蘇会宣教師の朝鮮?〓救済教化’)

お金になる人身売買には称えるという(カトリック) 大名たちも積極介入されていた. 当時ヨーロッパ宣教師たちが人身売買に介入したカトリック大名たちの波紋を決めるほどに大規模で行われていた. 大名と兵士らするまでもなく朝鮮人奴隷獲得と売買に熱をあげたから丁酉災乱は奴隷戦争でもあった.(‘壬辰・丁酉倭乱時 朝鮮?虜奴隷問題’)

あふれる朝鮮人奴隷たちによって全世界奴隷市場の価格が下落するほどだった. 朝鮮人婦女子と子供の場合一人価格が当時日本の貨幤単位で約 2〜3門位だった. 弔銃 1本当に価格は 120門だった.

1598年 3月頃当時長崎に泊まったイタリア商人プランチスコカルルレティは “朝鮮で男と女, 少年と少女など年を選り分けないで数え切れなく多くの人々がつかまって来た. これらは皆極めて捨値に奴隷に売れて行った”(‘私の世界一週忌’)で記録した.

カルルレティは 12スクも(scudo・ポルトガル昔の貨幤単位・日本貨幤では約 30円)を支払って朝鮮人 5人を買受けた. カルルレティはこれらを長崎のイエズス会教会で洗礼を受けるようにした後インドに連れて行って 4人を解いてくれて, 残り一人はイタリアフィレンツェ(フィレンチェ)まで連れて行って自由人に方面した. カルルレティはその恨み人がローマにあるはずであり, 名前が ‘アントニオ’で知られていると記録した. 以後アントニー来るローマに井州しながら教会仕事に携わっている途中画家ルーベンスに目立って ‘韓服着た男(Man in Korean Costume)’の絵モデルになったと言う(絵の中モデルが韓国人ではない中国人というなど多くの異説もある).

同胞を相手で銃刀を持た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朝鮮青年たち

朝鮮では倭軍に引かれて行った民間人たちを疲れである(被虜人)と呼んだ. ‘捕らわれることを当ぎり人’という意味だ. 倭軍は疲れ人を兵力補充用でも利用した. 主に男の子や若い青年がその対象だった. 壬辰の乱の時の虜でザブヒョガンこれらは母国の軍事たちと争う精鋭病で育てられた.

“壬辰・啓辞(壬辰・癸巳・1592-1593年)に我が国の子供たちがたくさんつかまって行ってもう成長した年になって整容(情勇)と強い(強悍)するのがもともと日本軍よりましだが, 精油(丁酉・1597年) 再侵入の時これらの中に少ない付いて来た者がすごく多かった. ところで本国(朝鮮)で逃げて来る寝る少なくて敵国(日本)で度に逃げだした人が多かった. また朝鮮男として前後に取って来た者が砲うったり煮って, 刀使ったり煮って, 梨使うことも煮って, 競走も煮って, 強壮(強壮)と勇猛するのが本当の倭人よりましだ.”(‘月峯海上録’)

1597年倭将である加藤紀要マーサ陣営を探偵(探偵)一四溟大師は “加藤の陣営に 15〜16歳になる年若くて精鋭した者は朝鮮人で軍勢が以前に来た敵とは違う”と言いながら “日本大軍が入って来る直前に決戦すること”を主張したりした.(‘先祖実録’)

丁酉災乱時期にも子供たちがたくさんつかまって行った. そのうちには 1597年 8月南原性戦闘で争って壮烈に戦死した将軍の息子もいた. 全裸病魔節度使イボックナムのセッチェアドル理性県(李聖賢・雨季李さん系図には 慶宝で表記)の場合だ. 理性県は当時 7歳の年に倭軍につかまって引かれて行った. 以後彼は ‘リノ−イにMotohiro(李家元宥)’に改名して日本女と結婚して 3男 4女を置いたと言う. リノ−イに家門は江戸時代以後朝鮮李さん(朝鮮李氏)と呼ばれながらイボックナムの血統を引き継いだ.(‘羽渓李氏 族譜’)

日本朝日新聞出版局長と朝日学生新聞社社長などを歴任したリノ−イにマーサ後尾(李家正文・1998年死亡) さんがすぐリノ−イに家門の子孫だ. 長い間自分の根を捜した彼は 1982年韓国を尋ねて先祖たちの史跡地と墓所を参拜して帰った.

女性たちは労動力搾取に利用されて

豊臣秀吉が名古屋ぶりに浮かんでいた朝鮮侵略電線たちを見下ろしたはずなのを知らせてくれる記念碑(右側). 倭軍たちは朝鮮人を拉致してヒゼンナゴヤソング, 長崎等地でひいて来て奴隷に売るとか奴婢に使った(左側).女性疲れ人たちは主に長期的で安定的な労動人力を確保するための手段に利用された. 朝鮮では穀物運送をするとか綿花や禾谷を取り入れる単純労動に主に投入された. 日本に引かれて行っては大名の家奴婢や下女になって死ぬまで惨めな生活をした. 美貌と才能が抜群とか身分が高い女性の場合, 支配層の否認(夫人)や包み(妾)になったりした.(‘壬辰の乱に拉致された朝鮮人の日本生活’)

丁酉災乱時期朝鮮人拉致規模は物物しい. 韓国学界では 10万人規模で見る一方, 日本側は初めには 5万〜6万人で推正している途中現在は 2万〜3万人水準だと主張する. しかし日本側主張は歴史的記録に照らして途方もなく縮まったことで思われる.

1617年慶尚道かたがた私服(慶尚道兼司僕) 精神島が疲れである転移生(全以生)の書簡を紹介する上書では “転移生のような境遇で薩摩(薩摩)につかまっている疲れ人が 3万700余人もなるのに, 別に一区域に集まって住んでから将来 24年になって行く”(‘光海君日記(年始本)’)で記録されている. 転移生の明らかにした数字がちょっと課長であることができるが, 一ジヨックエだけも 3万人が超える疲れ人がいるという記録は当時ハイジャックの規模を見当をつけるようにする.

戦争が終わった後朝鮮朝廷は疲れ人を故国で呼び入れようと思った. しかし実際に帰って来た数は公式的に 5000〜7000余人しかならなかった. 帰って来た人の少ない理由は日本側の非協助, 朝鮮朝廷のいかがわしい疲れである大宇政策などを指折ることができる. 疲れ人たちは故国に帰って来ても罪人のように差別と蔑視を受けた. 賎民出身は帰って来た後にも賎民世話が免れ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帰還した両班たちも大部分官職に任用され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まま在野で生き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朝鮮は日本に引かれて行った自体を絶義(節義)を失ったことで不気味に見たのだ.

記者は名古屋城跡高い所に上がった. 遠く万をはめたところに開かれた. 7ズガブ(周甲・1箱は 60年で 420年) 前朝鮮で侵奪して来た奴隷たちと財物を敷いて座って賑わった都市は野原に変わってのんびりしたように見えたし, 穏かな海は平和に見えた.

名古屋城跡にある名古屋性博物館は公式案内文で壬辰の乱と丁酉災乱を ‘誤った侵略戦争’と規定している. 罪のない良民の鼻を枕にして, けだものを狩るように老若男女を選り分けないで無差別に捕獲して奴隷に売ってしまった世界戦争社で類例を捜しにくい極悪した戦争犯罪に対する説明ではあまりにも微弱な表現だが, それさえも自分たちの過ちを認める日本内数少ない展示機関の中一所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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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조선인 사냥

조선인 돈된다".. 아이-여자까지 새끼줄로 목 묶어 끌고가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
10화: 조선인 노예사냥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나고야성 일대를 묘사한 ‘히젠나고야성도병풍(肥前名護屋城圖屛風·나고야성박물관 소장)’ 그림(왼쪽)과 현재의 나고야성 일대(오른쪽). 왜군들의 조선 침략 사령부다.“일본에서 온갖 상인들이 (조선으로) 왔다. 그중에 사람을 사고파는 자도 있었다. 본진의 뒤를 따라다니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들였다. 새끼로 목을 묶은 후 여럿을 줄줄이 옭아매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지옥의 아방(阿房)이라는 사자가 죄인을 잡아들여 괴롭히는 것이 이와 같을 것이다.”(‘朝鮮日日記’, 1597년 11월 19일)

왜군의 종군의승(從軍醫僧)인 게이넨(慶念)은 조선인들을 원숭이처럼 묶은 뒤 우마(牛馬)를 끌게 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게 하면서 볶아대는 일본 상인들의 행태를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다고 기록했다. 정유재란 발발 첫해 초겨울, 호남을 비롯한 대부분의 남부 지방이 왜군의 수중에 떨어진 때였다.

조선은 당시 일본 상인들에게는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시장이었다. 왜군을 따라 조선에 들어온 상인들은 군량과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한편으로 사람 매매에까지 손을 댔다. 특히 사람 장사는 최고의 이문이 남았다.

상인들에게 조선인을 파는 주체는 왜군이었다. 전쟁 이전 왜구들이 조선 해안지역을 침탈해 조선인을 잡아가 일본에서 강제 노역을 시키던 것과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 왜군은 조선인을 잡으면 현지에서 일본인 인신매매상에게 팔아넘기거나 일본으로 끌고 가 평생토록 노비로 부려먹었다. 이 때문에 전쟁 도시인 나고야성은 조선인 포로들로 넘쳐났다. 정유재란 때 칠산도에서 왜군에게 붙들려간 정희득은 “귀국 도중 들른 나고야성에서 마주치는 사람 중에 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月峯海上錄’)고 기록했다.

조선인 노예들의 고혈로 흥청거린 군사도시

130여 개의 다이묘 진영들이 들어서 있던 나고야 성터. 사가현=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기자는 지난주 일본 규슈 서북단 사가(佐賀) 현 가라쓰(唐津) 시의 나고야성(아이치 현의 나고야성과 구별해 히젠나고야성이라고도 함)을 찾았다. 가라쓰는 일본인들이 중국을 가리키는 표현인 ‘당(唐)’으로 가는 ‘나루(津)’라는 뜻으로, 예전부터 대륙을 오가는 항구였다. 이곳에서 부산까지는 해로로 278km 남짓이다. 왜군의 출병 거점지이자 전선 사령부인 나고야성이 세워진 배경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불과 5개월 만에 이 성을 완성했다. 면적은 약 17만 m². 히데요시가 평생의 역작으로 지은 오사카성 다음 가는 크기였다. 그는 전쟁 초기에 나고야성 천수각에 머물면서 명령을 내렸다. 성 주변의 반경 3km 내는 일본 각지에서 차출된 다이묘(大名·영주)들의 진영으로 북적거렸다. 다이묘들은 이곳에서 휘하 부대원들을 이끌고 조선으로 치러 가고, 이곳으로 귀환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틀어 20만 병력이 나고야성에서 조선으로 출병했다. 지금도 당시의 진영 터에는 성벽과 토루 등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나고야성에서 나고야포(만)로 이어지는 바다까지의 들판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인구 10만을 넘어서는 군사도시가 형성됐다. 조선에서 비참한 살육과 납치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히데요시는 황금다실(黃金茶室)에서 금으로 된 찻잔에 따른 차와 함께 유흥을 즐겼다. 성내에서는 일본 전통의 가면극 노(能)와 노래 렌가(連歌)가 공연되는 등 불야성을 이루었다.

나고야성으로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은 일본 내 각 다이묘들의 영지로 끌려가거나, 당시 국제무역항이던 나가사키로 옮겨져 노예로 팔려나갔다. 일부 다이묘들은 처음부터 조선인들을 노예로 팔 요량으로 나고야성 남쪽의 나가사키 항으로 곧장 입항하기도 했다.

포르투갈까지 개입한 국제 노예거래

16세기 일본 나가사키항에서 포르투갈 상인들과 예수회 선교사, 일본인들이 교류하는 장면을 담은 ‘남만병풍(南蠻屛風)’.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노예로 파는 데는 포르투갈인들이 적극 개입돼 있었다. 당시 전 세계 노예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포르투갈 노예상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사냥으로 악명이 높았다. 포르투갈 노예상들의 사주를 받은 일본인들은 조선인 납치를 일확천금의 기회로 생각했다.

“전진(戰陣)의 (왜군) 제장(諸將) 가운데 약삭빠른 자는 처음부터 인신매매를 목적으로 조선인들을 대량 노략질해오기도 했다. (노예시장으로 흥성했던 나가사키의) 일부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붙잡아오기 위해 조선으로 도항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조선 남부 등 각지를 찾아다니며 남녀를 막론하고 조선인을 직접 사들여 나가사키 등지로 끌고 가 포르투갈 상인에게 철포(조총)나 비단을 받고 팔아넘겼다.”(‘耶蘇會宣敎師の朝鮮俘擄救濟敎化’)

심지어는 포르투갈 상인이 조선에 들어와 직접 거래했다고 볼 수 있는 자료도 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왜군이 조선 남부 지방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일부러 현지에 인매선(人買船·노예매매선)을 보내 조선 포로를 직접 수용했다는 기록(1598년 9월 4일, 日本耶蘇會 宣敎聖職者會 報告)과,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의 비변사가 심문한 포로들 중에 포르투갈 상인 조앙 멘드스, 남만계 흑인 1명 등도 있었다(1604년 6월 22일, ‘등록유초’)는 공초 기록이다.

일본의 국제무역항인 나가사키(長崎)와 히라도(平戶) 등지에서 매매된 조선인들은 홍콩, 마카오, 마닐라를 비롯해 인도, 유럽에까지 팔려나갔다.

“놀라울 만큼 많은 조선 포로가 일본으로 송치돼 주로 나가사키 방면에서 팔렸다. 포르투갈 상인은 이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耶蘇會宣敎師の朝鮮俘擄救濟敎化’)

돈이 되는 인신매매에는 기리시단(가톨릭) 다이묘들도 적극 개입돼 있었다. 당시 유럽 선교사들이 인신매매에 개입한 가톨릭 다이묘들의 파문을 결정할 정도로 대규모로 행해지고 있었다. 다이묘와 병사들 할 것 없이 조선인 노예 획득과 매매에 열을 올렸으니 정유재란은 노예전쟁이기도 했다.(‘壬辰·丁酉倭亂時 朝鮮俘虜奴隸問題’)

넘쳐나는 조선인 노예들로 인해 전 세계 노예시장의 가격이 하락할 정도였다. 조선인 부녀자와 아이의 경우 한 명 가격이 당시 일본의 화폐 단위로 약 2∼3문 정도였다. 조총 1정 값은 120문이었다.

1598년 3월경 당시 나가사키에 머물렀던 이탈리아 상인 프란치스코 카를레티는 “조선에서 남자와 여자, 소년과 소녀 등 나이를 가리지 않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왔다. 이들은 모두 극히 헐값에 노예로 팔려나갔다”(‘나의 세계 일주기’)고 기록했다.

카를레티는 12스쿠도(scudo·포르투갈 옛 화폐단위·일본 화폐로는 약 30엔)를 지불하고 조선인 5명을 사들였다. 카를레티는 이들을 나가사키의 예수회 교회에서 세례를 받도록 한 뒤 인도로 데려가 4명을 풀어주고, 나머지 한 명은 이탈리아 플로렌스(피렌체)까지 데려가 자유인으로 방면했다. 카를레티는 그 한 명이 로마에 있을 것이며, 이름이 ‘안토니오’로 알려져 있다고 기록했다. 이후 안토니오는 로마에 정주하면서 교회 일에 종사하다가 화가 루벤스의 눈에 띄어 ‘한복 입은 남자(Man in Korean Costume)’의 그림 모델이 됐다고 한다(그림 속 모델이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이라는 등 여러 이설도 있다).

동포를 상대로 총칼을 들어야했던 조선 청년들

조선에서는 왜군에게 끌려간 민간인들을 피로인(被虜人)이라고 불렀다. ‘사로잡힘을 당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왜군은 피로인을 병력 보충용으로도 이용했다. 주로 남자아이나 젊은 청년이 그 대상이었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이들은 모국의 군사들과 싸울 정예병으로 길러졌다.

“임진·계사(壬辰·癸巳·1592-1593년)에 우리나라의 어린아이들이 많이 잡혀가서 이제 장성한 나이가 돼 정용(情勇)하고 강한(强悍)하기가 본시 일본군보다 나은데, 정유(丁酉·1597년) 재침 때 이들 중에 적을 따라 온 자가 무척 많았다. 그런데 본국(조선)으로 도망해 오는 자는 적고 적국(일본)으로 도로 도망간 사람이 많았다. 또한 조선 남자로서 전후에 잡아온 자가 포 쏘기도 익히고, 칼 쓰기도 익히며, 배 부리는 것도 익히고, 달리기도 익혀서, 강장(强壯)하고 용맹하기가 진짜 왜놈보다 낫다.”(‘月峯海上錄’)

1597년 왜장인 가토 기요마사 진영을 탐정(探偵)한 사명대사는 “가토의 진영에 15∼16세 되는 나이 젊고 정예한 자는 조선 사람으로 군세가 종전에 온 적과는 다르다”고 하며 “일본 대군이 들어오기 직전에 결전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선조실록’)

정유재란 시기에도 어린아이들이 많이 잡혀갔다. 그중에는 1597년 8월 남원성 전투에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장군의 아들도 있었다.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의 셋째아들 이성현(李聖賢·우계이씨 족보에는 慶寶로 표기)의 경우다. 이성현은 당시 7세의 나이에 왜군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이후 그는 ‘리노이에 모토히로(李家元宥)’로 개명하고 일본 여자와 결혼해 3남 4녀를 두었다고 한다. 리노이에 가문은 에도시대 이후 조선이씨(朝鮮李氏)로 불리면서 이복남의 혈통을 이어갔다.(‘羽溪李氏 族譜’)

일본 아사히신문 출판국장과 아사히학생신문사 사장 등을 역임한 리노이에 마사후미(李家正文·1998년 작고) 씨가 바로 리노이에 가문의 후손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뿌리를 찾던 그는 1982년 한국을 찾아 선조들의 사적지와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갔다.

여성들은 노동력 착취에 이용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고야 만에 떠 있던 조선 침략 전선들을 내려다보던 터임을 알려주는 기념비(오른쪽). 왜군들은 조선인을 납치해 히젠나고야성, 나가사키 등지로 끌고 와 노예로 팔거나 노비로 부렸다(왼쪽).여성 피로인들은 주로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노동 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됐다. 조선에서는 곡물 운송을 하거나 면화나 화곡을 거두어들이는 단순 노동에 주로 투입되었다. 일본으로 끌려가서는 다이묘의 집안 노비나 하녀가 돼 죽을 때까지 비참한 생활을 했다. 미모와 재능이 출중하거나 신분이 높은 여성의 경우, 지배층의 부인(夫人)이나 첩(妾)이 되기도 하였다.(‘임진왜란에 납치된 조선인의 일본 생활’)

정유재란 시기 조선인 납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한국 학계에서는 10만 명 규모로 보는 반면, 일본 측은 처음에는 5만∼6만 명으로 추정하다가 현재는 2만∼3만 명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 측 주장은 역사적 기록에 비춰 터무니없이 축소된 것으로 여겨진다.

1617년 경상도겸사복(慶尙道兼司僕) 정신도가 피로인 전이생(全以生)의 서한을 소개하는 상소문에서는 “전이생과 같은 처지로 사쓰마(薩摩)에 잡혀 있는 피로인이 3만700여 명이나 되는데, 별도로 한 구역에 모여 산 지 장차 24년이 되어간다”(‘광해군일기(정초본)’)고 기록되어 있다. 전이생이 밝힌 숫자가 다소 과장일 수 있으나, 한 지역에만도 3만 명이 넘는 피로인이 있다는 기록은 당시 피랍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 조정은 피로인을 고국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 돌아온 수는 공식적으로 5000∼70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돌아온 이가 적은 이유는 일본 측의 비협조, 조선 조정의 어정쩡한 피로인 대우 정책 등을 꼽을 수 있다. 피로인들은 고국으로 돌아와서도 죄인처럼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 천민 출신은 돌아온 뒤에도 천민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귀환한 양반들도 대부분 관직에 임용되지 못한 채 재야에서 살아가야 했다. 조선은 일본으로 끌려간 자체를 절의(節義)를 잃은 것으로 곱지 않게 보았던 것이다.

기자는 나고야 성터 높은 곳으로 올라가봤다. 멀리 만을 낀 바다가 펼쳐졌다. 7주갑(周甲·1갑은 60년으로 420년) 전 조선에서 침탈해온 노예들과 재물을 깔고 앉아 흥청거렸을 도시는 들판으로 변해 한가로워 보였고, 잔잔한 바다는 평화로워 보였다.

나고야 성터에 있는 나고야성박물관은 공식 안내문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잘못된 침략 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무고한 양민의 코를 베고, 짐승을 사냥하듯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포획해 노예로 팔아넘긴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극악한 전쟁범죄에 대한 설명으로는 너무도 미약한 표현이지만, 그나마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본 내 몇 안 되는 전시 기관 중 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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