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糞尿日本人に要綱を教えてくれた韓国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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過去どうして1国では国(710〜794)時代や平安(平安,794〜1192)時代までにしても

首都(首都)出回りなさいとして見ると農村と別に差なしに公知(空地)が多かったから

特別に便所を利用する仕事なしに家周りで放糞, 放尿するのが一般的だった.


しかし当時文明国だった中国, 韓国との往来がだんだん無くなりながら

これら国の風習が伝わり始めたし

この時中国のホザ(虎子),韓国の要綱(尿岡)などが入って来て一部

どうして1国貴族たちの間で使われた.

-スンソで(糞小路)と路傍便所


19世紀近世に至るまで日本人たちは路上で放尿をする癖があった.

当時日本を訪問した外国人たちは路上で放尿する日本人の姿を人形で

作って自分の国に行かせたりした.

も当時京都(京都)には ‘分所で(糞小路)’という距離(通り)があったがその理由は

が距離(通り)がすぐトイレのように誰も行って台. 小便を見たからだった.

この距離(通り)にはいつもゆばり, くそが積もっていて誰でもこの距離(通り)に入って行く時には

はいて行った履き物を脱いで入口に置かれているかかと高い下駄に変えて申告

入っ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と言う. その後天皇(天皇)が偶然にこの距離(通り)を通ってその来歴を

聞いて距離(通り)名前を変えるように指示して今日の今宵で(錦小路)になった.

明治(明治)3年(1870) 日本政府は ‘放尿ツィゼの包告’を下げた. これがきっかけが

になって横浜市内には 83ヶ所の路傍(路傍)便所が作られた.

が路傍便所は日本最初の公衆便所だったが大きい変造を地に埋めてその周りを

板で阻んだ生半可なのだった. 日本政府の努力にも吹いてして路上放尿の

風習は易しく根絶(根絶)にならなかった. しかし路傍便所の改良は続いたし

名称も路傍便所で共同便所または公共便所に改称された.

-立って小便をする日本女性
にも(江戸,1596〜1686)時代日本京都(京都)の女達は道端の小やりくりに腰を曲げて立って尋常に小便を見たと言うのにこのような風習は明治 時代末期までも残っていたと言う. 閭閻集お嬢さん. 下人を従えた上流層 奥さんたち誰一人選り分けるまでもなく道路周辺壁を向けて尻を出してのままゆばりをたれながらも恥ずかしがらなかっただけでなくそれを置いてあざ笑う人も いなかった.当時のどうして1国女人たちが線のままゆばりをたれる風習はとても一般的なことだったが日本伝統衣装である着物や作業ズボンであるモムペを着た時にもむしろ立って仕事を見ることがもっと便したかも知れない事だ.それで着物クッナラックは常に黄金色なゆばりで染まっていた.
着物身なりをした時にはウィッモムをこれから傾けて足を開けた後膝を曲げて小づまを横で集めれば良いし モムペを着た場合にはウィッモムを大きく曲げて足を開けた後服を下に 下って仕事をすれば良いからだ.このように立って小便をする習慣はパンティーを着なかった時代に自然に起きた現象だった.
20世紀に入って日本の女性たちもパンティーを着るようになったし立って小便をする習慣は徐々に消えた. しかしそれはあくまでも日本女性たちの場合であるだけだ.タイ北部ラフだと地方に住む女性たちは今も線のままゆばりをたれる.
(日本)民たちが苦しくてけち臭いことは多分天下で最高であることでたとえ我がお腹をひく格調を(格卒)で言うと言っても毎日毎日煮ったさつまいも根を二度食べてその後にご飯を食べる人は五分の仕事に過ぎない.またスゾジル何度に木器底に触れることに過ぎないから, たとえ一緒に座って食べる人が (ご飯が)いないと言っても様式一粒も分けてやらない.(私たち)六倍に焼けているなぜの船頭たちははいよって私たちが食べ物を食べさせるのに, 皆大きい筒を持って来て必ず食べ物をたくさんくれと言う.(私たち)ギョックグンドルが彼らの食べ物を貪ることをあざ笑って叱責をしてもまた恥が分からなかった. 民たちはますます栄えるのに(数字は多くなるのに)生きて行く都合がこのようにひどく苦しいから, もし彼らの船を作る能力が私たちのヨルベになったら私たち未来に近づく懸念がまた少なくなかろう気が引ける.
村は優に百号ほどなるのに皆わらぶきだったし暮すことが貧しかったし皆ぼろぼろだったしくしけずりもしなかったし洗わなかった. 女達は出る人が一人もいなかったから衣服がきれいではなくて他人に会うか恥ずかしがるからだと言う. 君をに覆った 3階位の家たちがあったが皆ジェントルマン(神舍)と承嗣(僧舍)と言う.
考功司の下に泊まった時小さな梨に木取っ手がある丸い魚網を積んだ漁夫がその妻といっしょに船をかき混ぜてイカを捕っていた. 漁夫は一者ほどなる麻布で陰部を覆ったし彼の妻も一者ほどなる麻布でスカート幅を作って先後を選り分けたから, 男女が全身を薄赤く出していた.
-スングサロック(乗四録, 18世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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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뇨 일본인에 요강을 가르쳐준 한국인

과거 왜1국에서는 나라(710∼794)시대나 헤이안(平安,794∼1192)시대까지만 해도

수도(首都)나 도시라고 해봐야 농촌과 별 차이 없이 공지(空地)가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변소를 이용하는 일 없이 집 주위에서 방분, 방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문명국이었던 중국, 한국과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이들 나라의 풍습이 전해지기 시작했고

이때 중국의 호자(虎子),한국의 요강(尿岡)등이 들어와 일부

 왜1국 귀족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

 -순소로(糞小路)와 노방변소


19세기 근세에 이르기까지 일본인들은 노상에서 방뇨를 하는 버릇이 있었다.

당시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노상에서 방뇨하는 일본인의 모습을 인형으로

만들어 자기 나라에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교토(京都)에는 ‘분소로(糞小路)’라는 거리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 거리가 바로 화장실처럼 누구나 가서 대. 소변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거리에는 언제나 오줌, 똥이 쌓여 있어서 누구든 이 거리로 들어갈 때에는

신고 갔던 신발을 벗고 입구에 놓여 있는 굽 높은 나막신으로 바꾸어 신고

들어가야 했다고 한다. 그후 천황(天皇)이 우연히 이 거리를 지나다 그 내력을

듣고 거리 이름을 바꾸도록 지시해서 오늘날의 금소로(錦小路)가 되었다.

메이지(明治)3년(1870) 일본 정부는 ‘방뇨 취제의 포고’를 내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요코하마 시내에는 83개소의 노방(路傍)변소가 만들어졌다.

이 노방변소는 일본 최초의 공중변소였는데 큰 변조를 땅에 묻고 그 주위를

판자로 막은 어설픈 것이었다. 일본 정부의 노력에도 불고하고 노상방뇨의 

풍습은 쉽게 근절(根絶)되지 않았다. 그러나 노방변소의 개량은 계속되었고

명칭도 노방변소에서 공동변소 또는 공공 변소로 개칭되었다.

-서서 오줌 누는 일본 여성
에도(江戶,1596∼1686)시대 일본 교토(京都)의 여자들은 길가의 소변통에허리를 구부리고 서서 예사롭게 소변을 보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풍습은 메이지 시대 말기까지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여염집 아가씨. 하인을 거느린 상류층 부인들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도로변 벽을 향해 엉덩이를 내놓고 선 채로오줌을 누면서도 부끄러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두고 비웃는 사람도 없었다.당시의 왜1국 여인들이 선 채로 오줌을 누는 풍습은 아주 일반적인 것이었는데일본 전통 의상인 기모노나 작업 바지인 몸빼를 입었을 때에도 오히려 서서 일을보는 것이 더 편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그래서 기모노 끝나락은 늘 누런 오줌으로 물들어 있었다.
기모노차림을 했을 때에는 윗몸을 앞으로기울이고 다리를 벌린 다음 무릎을 구부리고 옷자락을 옆으로 걷으면 되고 몸빼를 입었을 경우에는 윗몸을 크게 구부리고 다리를 벌린 다음 옷을 밑으로 내리고 일을 보면 되기 때문이다.이처럼 서서 오줌 누는 습관은 팬티를 입지 않았던 시대에 자연스럽게 일어난 현상이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일본의 여성들도 팬티를 입게 되었고 서서 오줌 누는 습관은차츰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여성들의 경우일 뿐이다.태국 북부 라후라 지방에 사는 여성들은 지금도 선 채로 오줌을 눈다.
(일본)백성들이 고생스럽고 인색한 것은 아마 천하에서 최고일 것으로 비록 우리 배를 끄는 격졸(格卒)로 말한다 하더라도 매일매일 익힌 고구마 뿌리를 두 번 먹고 그 뒤에 밥을 먹는 사람은 오분의 일에 불과하다.또한 수저질 몇번에 나무 그릇 바닥에 닿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비록 같이 앉아서 먹는 사람이 (밥이)없다고 해도 양식 한 톨도 나누어 주지 않는다.(우리)여섯 배에 타고 있는 왜의 사공들은 예에 따라 우리가 음식을 먹이는데, 모두 큰 통을 가지고 와서 반드시 음식을 많이 달라고 한다.(우리)격군들이 그들의 음식을 탐하는 것을 비웃으며 질책을 하여도 또한 부끄러움을 알 지 못하였다. 백성들은 날로 번창하는데(숫자는 많아지는데)살아가는 형편이 이와 같이 심하게 고통스러우니, 만일 그들의 배를 만드는 능력이 우리의 열배가 된다면 우리 앞날에 닥칠 근심이 또한 적지 않으리라 저어된다.
마을은 가히 백 호쯤 되는데 모두 초가집이었고 사는 것이 궁핍했으며 모두 남루했고 빗질도 안 했으며 씻지도 않았다. 여자들은 나오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으니 의복이 깨끗하지 않아 다른 사람을 만날까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널로 덮은 3층짜리 집들이 있었는데 모두 신사(神舍)와 승사(僧舍)라고 한다.
고공사 아래에 머물렀을 때 작은 배에 나무 손잡이가 있는 둥근 어망을 실은 어부가 그 아내와 더불어 배를 저어 오징어를 잡고 있었다. 어부는 한 자쯤 되는 베로 음부를 가리었고 그의 아내도 한 자쯤 되는 베로 치마폭을 만들어 앞뒤를 가리었으니, 남녀가 온몸을 벌겋게 내놓고 있었다. 
-승사록(乘사錄, 18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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