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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年隠蔽された韓国の日本式古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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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 30年前「隠蔽」された日本式古墳「長鼓墳(前方後円墳)」…もう話せる



▲1991年、長鼓(チャンゴ)墳で初めて内部構造を明らかにした全南咸平新徳古墳。典型的な日本式古墳(長鼓墳あるいは前方後円墳)と分かって学界の関心を集めた。しかし発掘調査報告書は出なかった。|国立光州博物館提供


「いやこれは…。」 1991年3月26日、全南(チョンナム)咸平(ハムピョン)新徳古墳を調べた国立光州(クァンジュ)博物館調査チームは目の前に繰り広げられた光景に話す言葉を失ってしまった。古墳の原形部西側に盗掘口が見えたのだ。さらにこの盗掘口はわずか数日前に作られた跡が明らかだった。

(中略:盗掘犯は2年半後に逮捕。以下長文につき、日本関連のみ抄訳。元記事に出土物など写真多数)


国立光州博物館などは4月から40日以上、本格発掘を行った。発掘が終わると学術資料蓄積のために通常は発掘調査報告書を出す。ところが、同博物館は苦心の末、新徳古墳発掘報告書をださないことにする。行政報告書を作っただけだ。なぜこんなことが起きたのか。新徳古墳が初めて公式に調査されたいわゆる長鼓墳だったからだ。


日本では「前方後円墳」という。「前は四角(前方) 後ろは丸(後円)」の形から名付けられた墓(墳)だ。韓国では「長鼓(チャンゴ)」に似ているとして「長鼓墳」という。西暦3世紀中葉~6世紀後半にかけて日本で流行し、日本全域に2000基以上分布している。日本古代国家形成期の日王墓は全部この形だ。最も有名な長鼓墳は399年に死亡したニントク(仁徳)日王の墓だ。


新徳古墳が初めてではない。日帝強占期に日本の学者が、その後も1972年に韓国の学者二人が「忠南扶余に長鼓墳がある」と主張した。韓国考古学界は蜂の巣を突付いたように沸き立った。緊急文化財委員会が招集されて二人の発表を聴取した。しかし、文化財委員の反応は冷たかった。雲をつかむような話だけに発掘調査する必要はない、と一蹴した。


その12年後、1983年6月、カン・イング嶺南大教授がさらに一歩出る。「慶南固城(コソン)などと、全南羅州・霊岩・務安・咸平など様々な場所に長鼓墳が見える」と主張したのだ。国内学界では特に注目しなかった。もちろんカン教授は「‘前方後円墳’(長鼓墳)は日本の固有墓ではなく、韓半島から渡って発展したもの」と主張した。国内学界は特別な反応を見せなかった。


日本学界は二つに分かれた。元老学者は主に日王家系で神聖視される墓の形態が韓半島に存在するはずがないと首を横に振った。しかし「韓半島長鼓墳」を任那日本府と連結する人々が現われた。一部は長鼓墳が特に固城など伽耶地域で確認されるというカン教授の主張に興奮した。それこそ任那日本府の決定的な証拠ではないか。


そのような状況でもう一つの長鼓墳として知られた新徳古墳が初めて正式発掘された。果たして日本の古墳形式という長鼓墳だった。墓内部にも日本色が見えた。天井と4壁、扉の内側は全部朱漆がされていた。赤く塗られていたという事だ。出土した大型刃物は取っ手の穴が船山古墳(熊本県)の遺物と類似の形だ。墓では武寧王陵で使われたコウヤマキ製の棺の跡が見えた。金銅冠と金銅履き物の破片も数点出土した。


このような状況で報告書をだしても日本の学界に利用されるだけではないか。実際、1994年5月20日の日本朝日新聞1面主要記事で「韓国光州の明花洞(ミョンファドン)古墳で前方後円墳に似た古墳が発掘された。日本文化もまた韓半島に流入したことを立証する」と報道している。


朝日新聞の記事が報道された翌日(21日)、明花洞古墳を発掘した国立光州博物館に大統領府教育文化首席が電話してきて「私たちがあちら(日本)の支配を受けたという事か?何か対策が必要ではないか」と注文したのだ。当時は日本の近・現代史歪曲のために死にそうな時だった。


長鼓墳発掘が続いて資料が蓄積され本格的な議論が進められた。この墓の起源は韓半島か日本か、また、墓を作ったのは日本人(㣦人)か、百済人(あるいは馬韓出身の土着勢力)か。


結論は何か。韓国人か日本人か明らかにしろと問い詰めるなら言えることはない。むしろそんなこともあって、あんなこともありうるというのが正解であろう。


5世紀末~6世紀前半、栄山江一帯は想像よりはるかに開放的だったのかもしれない。日本を訪問した百済人が巨大な日本の長鼓墳を見て帰ってから似た墓を作ったのかも知れない。また「外国人優待政策」をとった百済の朝廷に出仕して百済官僚あるいは貴族になった㣦人の墓もありうる。


いずれの場合でも今の瞬間の民族感情で1400年前を裁くのはいかに偏狭なことか。


イ・キファン京郷新聞選任記者

ソース:京郷新聞(韓国語)30年前’隠蔽’といいながら隠した日本式古墳…もう話せる

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108240500001


http://awabi.2ch.sc/test/read.cgi/news4plus/1629807605/


盗むのは韓国人

隠すのも韓国人

日本式の古墳の存在は30年もの隠蔽が必要な出来事だったようです。

最後のごまかしがまた酷い。

そして相変わらず天皇と言えないのですね。


・・・おそろしいです (´゚д゚`) 


しかも、あごが大変と. (´゜゜`)



この記事のどこが気に入らないのでしょう。ふしぎですね。

レステロ襲撃のためコメントを救済します。



 plum0208    21-08-25 20:48

それがいつの間にかにサーバーが日本側に移っているんですって。

朝鮮半島に置いたままだと危険だと逃げ出したのでしょうか^^;


 PoPon7  21-08-25 20:45

何時になったら運営者はテロレスに対応すんだろう。。。。。。。

まあ、、、、韓国の掲示板に秩序を求めても無駄かも知れないが。。。。。。。w


 PoPon7  21-08-25 20:30

朝鮮半島は日本領だったんですね。。。。。。。。w


 plum0208    21-08-25 18:32

>長鼓墳発掘が続いて資料が蓄積され本格的な議論が進められた。この墓の起源は韓半島か日本か、また、墓を作ったのは日本人(㣦人)か、百済人(あるいは馬韓出身の土着勢力)か。

学者の苦悩した問題点をよく考えなさい。

この2説を30年間隠蔽し続けた理由が何か?

それはこの2説のうちの1説が韓国の自尊心を傷つける事実に繋がるからにほかなりません。


 chaboom  21-08-25 18:21

何の遺物がある?わずか小型ゾンバングフワンブン 13個でそんな主張をするか? そんな論理なら日本列島全体は一クラス係遺物で覆い被せているのに?w


 plum0208    21-08-25 18:02

だからあなたの説だとそうなりますよという話です。

日本では縄文時代や㣦人の時代に朝鮮半島の南部が日本の勢力化にあったことは常識です。

新羅の勢力が増してきて

半島との関係が途切れたのが663年の白村江の戦いです。


 chaboom  21-08-25 17:53

日本書紀を作りながらもう韓半島との連関性をすべて不正だ. 自ら列島でばかりあった万歳日計と主張するのに.


 plum0208    21-08-25 17:48

百済武寧王没年(523年)は墓室はレンガ式で中国南朝方式という。

chaboom 氏の説は物語としては興味深いけれどもっと韓国の学者の話を聞いたらどうだ?

それから日本が半島勢力内およびその末裔だとするならば秀吉の朝鮮出兵は侵略ではなく内乱に過ぎないことになる。


 chaboom  21-08-25 17:35

甕棺墓勢力は実はゾンバングフワンブン勢力の親戚で誰がの上だった構わない..どうせすべて百済の臣下だ. これらをすべて縛ってなぜ(yamato)でブルロッウルゴッで推正する. 三国史記創始期のなぜは韓半島内の勢力だった.


 plum0208    21-08-25 17:30

甕棺墓が石の積み上げ?

時代も構造も勘違いしていないか?

ちなみに百済武寧王没年(523年)の棺は木製で素材は日本産。


 chaboom  21-08-25 17:25

単純に土をサッアオルリンゴと石で部屋をマンドヌンゴッとどれが高難易度なのか? そして日本の巨大古墳は王権安定期に行くほど小くなっていると日本学者さえ認めた.


 plum0208    21-08-25 17:12

韓国の考古学者はなんとかして百済人(あるいは馬韓出身の土着勢力)ではないか?と頑張っています^^;

もっと素直に隠蔽を暴露した学者たちの声を聞いてみてはいかが?


 chaboom  21-08-25 17:07

あの地域の親分は甕棺墓勢力でゾンバングフワンブン勢力は彼らより下位だった. 甕棺墓は数百区なのにゾンバングフワンブンは 13旧だけだった. 百済トンソン王と武寧王が日本で帰国する時連れて来た日系シンハイルゴッに推測される. 当時日本列島には百済の植民地があったし列島出身無事集団を本国の危機に活用しなかっただろうか思う.


 plum0208    21-08-25 17:03

韓国の考古学者は古墳と認めて研究しているのですが^^;

その罵声は韓国の考古学者へ向けたものですね。(´゚д゚`) 


 桜井誠  21-08-25 16:59

全然古墳と見えないが馬鹿や. k

翻訳を見る

30해은폐 된 한국의 일본식 고분

【한국】 30년전 「은폐」된 일본식 고분 「장고분(전방 후원분)」…이제(벌써) 이야기할 수 있다



▲1991년, 장고(체고) 분으로 처음으로 내부 구조를 분명히 한 전남함평 신덕고분.전형적인 일본식 고분(장고분 있다 있어는 전방 후원분)이라고 알아 학계의 관심을 모았다.그러나 발굴 조사보고서는 나오지 않았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아니 이것은….」 1991년 3월 26일, 전남(조남) 함평(함폴) 신덕고분을 조사한 국립 광주(광주) 박물관 조사 팀은 눈앞에 전개된 광경에 하는 말을 잃어 버렸다.고분의 원형부 서쪽으로 도굴구가 보였던 것이다.한층 더 이 도굴구는 불과 몇일전에 만들어진 자취가 분명했다.

(중략:도굴범은 2년반 후에 체포.이하 장문에 대해, 일본 관련만 초역.원기사에 출토물 등 사진 다수)


국립광주박물관 등은 4월부터 40일 이상, 본격 발굴을 실시했다.발굴이 끝나면 학술 자료 축적을 위해서 통상은 발굴 조사보고서를 낸다.그런데 ,동박물관은 고심의 스에, 신덕고분 발굴 보고서를 내지 않기로 한다.행정 보고서를 만들었을 뿐이다.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신덕고분이 처음으로 공식으로 조사되어 이른바장고분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전방 후원분」이라고 한다.「전에는 사각(전방) 뒤는 환( 후 엔)」의 형태로부터 이름이 붙여진 무덤(분)이다.한국에서는 「장고(체고)」를 닮아 있다고 하여 「장고분」이라고 한다.서기 3 세기 중엽~6세기 후반에 걸쳐 일본에서 유행해, 일본 전역에 2000기이상 분포하고 있다.일본 고대국가 형성기의 날왕묘는 전부 이 형태다.가장 유명한 장고분은 399년에 사망한 닌트크(인덕) 일 왕의 무덤이다.


신덕고분이 처음은 아니다.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학자가, 그 후도 1972년에 한국의 학자 두 명이 「충남부여에 장고분이 있다」라고 주장했다.한국 고고학계는 벌집을 돌 붙은 것처럼 들끓었다.긴급 문화재 위원회가 소집되어 두 명의 발표를 청취했다.그러나, 문화재 위원의 반응은 차가왔다.구름을 잡는 듯한이야기인 만큼발굴 조사할 필요는 없다, 라고 일축 했다.


그 12년 후, 1983년 6월, 캔·잉령남대교수가 한층 일보 나온다.「경남고성(코손)등과 전남 나주·령암·무안·함평 등 님 들인 장소에 장고분이 보인다」라고 주장했다것이다.국내 학계에서는 특히 주목하지 않았다.물론 강 교수는 「‘전방 후원분’(장고분)은 일본의 고유무덤이 아니고, 한반도로부터 건너 발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국내 학계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 학계는 두 개로 나누어졌다.원로 학자는 주로 날왕가계로 신성시되는 무덤의 형태가 한반도에 존재할 리가 없으면 거절했다.그러나「한반도 장고분」을 임라 일본부와 연결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일부는 장고분이 특히 고성 등 가야 지역에서 확인된다고 하는 강 교수의 주장에 흥분했다.그야말로임라 일본부의 결정적인 증거가 아닌가.


그러한 상황으로또 하나의 장고분으로서 알려진 신덕고분이 처음으로 정식 발굴되었다.과연 일본의 고분 형식이라고 하는 장고분이었다.무덤 내부에도 일본색이 보였다.천정과 4벽, 문의 안쪽은 전부주홍옻나무가 되고 있었다.붉게 칠해지고 있었다고 하는 일이다.출토한 대형 칼날은 손잡이의 구멍이 후나야마 고분(쿠마모토현)의 유물과 유사한 형태다.무덤에서는 무녕왕릉에서 사용된 코우야마키제의 관의 자취가 보였다.금동관과 금동 신발의 파편도 몇 점 출토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고서를이고라고도일본의 학계에 이용될 뿐(만큼)이 아닌가.실제, 1994년 5월 20일의 일본 아사히 신문 1면주요 기사로 「한국 광주의 명화동(몰파돈) 고분에서 전방 후원분을 닮은 고분이 발굴되었다.일본 문화도 또 한반도에 유입한 것을 입증한다」라고 보도하고 있다.


아사히 신문의 기사가 보도된 다음날(21일),명화동고분을 발굴한 국립광주박물관에 대통령부 교육 문화 수석이 전화하고 와 「우리가 저쪽(일본)의 지배를 받았다고 하는 일인가?무엇인가 대책이 필요하지 않은가」라고 주문했던 것이다.당시는 일본의 근·현대사 왜곡을 위해서 죽을 것 같은 때였다.


장고분발굴이 계속 되어 자료가 축적되어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었다.이 무덤의 기원은 한반도나 일본인가, 또, 무덤을 만든 것은 일본인(?사람)인가, (쿠다라)백제인(있다 있어는 마한 출신의 토착 세력)인가.


결론은 무엇인가.한국인이나 일본인인가 분명히 하라고 캐묻는다면 말할 수 것은 없다.오히려 그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5 세기말~6세기 전반, 영산코우이치대는 상상보다 훨씬 개방적이었던가도 모른다.일본을 방문한 (쿠다라)백제인이 거대한 일본의 장고분을 보고 돌아가고 나서 닮은 무덤을 만들었을지도 모르다.또 「외국인 우대 정책」을 취한 (쿠다라)백제의 조정에 출근해 (쿠다라)백제 관료 있다 있어는 귀족이 되었어?사람의 무덤도 있을 수 있다.


어느 경우에서도 지금의 순간의 민족 감정으로 1400년전을 재판하는 것은 얼마나 편협한 일인가.


이·키판 옛 쿄토의벼슬아치 신문 선임 기자

소스:옛 쿄토의벼슬아치 신문(한국어) 30년전’은폐’라고 하면서 숨긴 일본식 고분…이제(벌써) 이야기할 수 있다

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108240500001


http://awabi.2ch.sc/test/read.cgi/news4plus/1629807605/


훔치는 것은 한국인

숨기는 것도 한국인

일본식의 고분의 존재는 30년의 은폐가 필요한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속임이 또 심하다.

그리고 변함 없이 천황이라고 말할 수 없군요.


···무섭습니다 (′˚д˚`) 


게다가, 턱이 큰 일. (′˚˚`)



이 기사의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이상하네요.

레스테로 습격을 위해 코멘트를 구제합니다.



plum0208 21-08-25 20:48

그것이 어느새인가에 서버가 일본 측에 옮기고 있대요.

한반도에 둔 채로라면 위험하다고 도망갔는지요^^;


PoPon7 21-08-25 20:45

몇 시가 되면 운영자는 테로레스에 대응 살았지.......

뭐, , , , 한국의 게시판에 질서를 요구해도 쓸데 없을지도 모르지만.......w


PoPon7 21-08-25 20:30

한반도는 일본령이었군요........w


plum0208 21-08-25 18:32

>장고분발굴이 계속 되어 자료가 축적되어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었다.이 무덤의 기원은 한반도나 일본인가, 또, 무덤을 만든 것은 일본인(?사람)인가, (쿠다라)백제인(있다 있어는 마한 출신의 토착 세력)인가.

학자의 고뇌한 문제점을 잘 생각하세요.

이 2설을 30년간 은폐 계속 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 2설 중 1설이 한국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사실에 연결되기 때문에 외 되지 않습니다.


chaboom 21-08-25 18:21

무슨 유물이 있다?불과 소형 존방후원분 13개로 그런 주장을 할까? 그런 논리라면 일본 열도 전체는 1 클래스계 유물로 덮어씌우고 있는데?w


plum0208 21-08-25 18:02

그러니까 당신의 설이라고 그렇게 되어요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일본에서는 죠몽 시대나?사람의 시대에 한반도의 남부가 일본의 세력화에 있던 것은 상식입니다.

신라의 세력이 늘어나 와

반도와의 관계가 중단된 것이 663년의 백촌강의 싸움입니다.


chaboom 21-08-25 17:53

일본 서기를 만들기면서 이제(벌써) 한반도와의 연관성을 모두 부정하다. 스스로 열도에서(뿐)만 있던 만세 일계라고 주장하는데.


plum0208 21-08-25 17:48

(쿠다라)백제 무령왕몰년(523년)은 묘실은 벽돌식에서 중국 남조 방식이라고 한다.

chaboom 씨의 설은 이야기로서는 흥미롭지만 와 한국의 학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어때?

그리고 일본이 반도 세력내 및 그 후예라고 한다면 히데요시의 한국 출병은 침략은 아니고 내란에 지나지 않게 된다.


chaboom 21-08-25 17:35

도기로 된 독을 사용한 관무덤 세력은 실은 존방후원분 세력의 친척으로 누가의 위였다 상관없다..어차피 모두 (쿠다라)백제의 신하다. 이것들을 모두 묶어 왜(yamato)로 브르롯우르곡으로 추정 한다. 삼국사기 창시기의 왜는 한반도내의 세력이었다.


plum0208 21-08-25 17:30

도기로 된 독을 사용한 관무덤이 돌의 쌓아 올려?

시대도 구조도 착각 하고 있지 않는가?

덧붙여서 (쿠다라)백제 무령왕몰년(523년)의 관은 목제로 소재는 일본산.


chaboom 21-08-25 17:25

단순하게 흙을 삿아오르린고와 돌에서 방을 만드는곡과 어떤 것이 고난이도인가? 그리고 일본의 거대 고분은 왕권 안정기에 가는 만큼 소구 되어 있으면 일본 학자마저 인정했다.


plum0208 21-08-25 17:12

한국의 고고학자는 어떻게든 해 (쿠다라)백제인(있다 있어는 마한 출신의 토착 세력)이 아닌가?(와)과 노력하고 있습니다^^;

더 솔직하게 은폐를 폭로한 학자들의 소리를 들어 봐 어떠세요?


chaboom 21-08-25 17:07

그 지역의 두목은 도기로 된 독을 사용한 관무덤 세력으로 존방후원분 세력은 그들보다 하위였다. 도기로 된 독을 사용한 관무덤은 수백구인데 존방후원분은 13 구 뿐이었다. (쿠다라)백제 톤 손왕과 무령왕이 일본에서 귀국할 때 데려 온 일본계 신하이르곡에 추측된다. 당시 일본 열도에는 (쿠다라)백제의 식민지가 있었고 열도 출신 무사 집단을 본국의 위기에 활용하지 않았던 것일까 생각한다.


plum0208 21-08-25 17:03

한국의 고고학자는 고분으로 인정해 연구하고 있습니다만^^;

그 욕설은 한국의 고고학사람에게 보낸 것이군요.(′˚д˚`) 


사쿠라이 마코토 21-08-25 16:59

전혀 고분과 안보이지만 바보나.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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