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き残ったノース様の証言
1969年 10月14日, ベトナム南部パンラングジヨックで南韓軍人たちがリーンでは(Linh Son)社お坊さんたちを向けて聡気を振り回す事件が発生した. サイゴンの報告によると南韓君一人がリンソンサでベトナム女性を戯れて株こよりに追い出されるとここに激憤, 仲間たちを駆って来て銃器を乱射したことと知られる. 銀この事件で 71歳の株こより, 69歳の老僧, 41歳の女僧, 15歳のヘングザスングなど 4人が死亡した事実をベトナム政府が公式認めたと報道した.(<人民軍>地 1969. 10. 24)
(中略)
当時唯一の生存者であるプ(78) お坊さんと現場目撃者であるウングウェンティユエンした(45)にあえた. ここまで来るうちに始終筆者を押さえ付けたりした不安が, 否認することだけしてたかった話が目の前に現実になって現われた.
児だか産婦でも事情なしに.
タイした軍人たちが先にお坊さんたちを向けて鉄砲をうったんです. 引き継いでいかしてくれと言って逃げる女菩薩様にも鉄砲をうったんです. それからは死骸を皆燃やしたんです. UN漢方医証言だ. 当時わずか 15歳だった彼は恐ろしさにあきれて叫びも上げることができずに隠れてあったと告白する. リンソンサは皆五つお坊さんが住むやや小さいお寺だった. あの時プお坊さんは方丈さんより先に村に降りて喪家から読経を読んでいた. 証言の大部分はユエンハンを通じて行われたし, その絶義唯一の生存者であるプお坊さんはものがない. 当時の話をしながらも人々はあの時その虐殺の主人公であるタイハンの後裔たちをサルトルヒ気配りする. 冷たい車を持ち出して, 果物を剥いて勧めて, パパヤを食べるために汚なくなった口をぬぐいなさいと水までバッアだ竝び焚くむっと涙が湧いた.
(中略)
女性帰って強姦した後殺害
韓国軍は残酷なホロコーストを事としてナムベトナムミンゾックヘバングゾンでは(NLF)さえなるべく直接的な交戦は避けようと思うほどだったと伝わる. 電線もなくて少なく誰だかも分からないベトナム戦でベトコンの足だまりを捜索, 破壊するという作戦上の名分が老若男女を選り分けない虐殺行為を政党化させてくれた. 筆者が持っている記録はその内容があんまり無惨で詳らかに明らかにするのに負担があったが, その一部をここに紹介する.
1965年 12月22日, 韓国軍作戦兵力 2個大隊がビンディン性, クィニョンシにあるトイプ軍, プホア死(使), トンジアング村に 500ヨバルの大砲を発射した後きれいに殺して, きれいに燃やして, きれいに破壊するという掛け声の下捜索掃討作戦を広げた. 彼らはこの村で 12歳以下 22人の子供, 22人の女性, 3人の妊婦, 70歳以上 6人の年寄りを含み, 50人余りが越える良民を虐殺した.
. とは子供を出産してから二日ぶりに鉄砲に当たって死んだ. 彼の子供は軍靴発ににじられたまま血が散り乱れて乱雑なお母さんの胸の上に投げられていた. 姙娠 8ヶ月に至った軸は弾が貫いて死んだし, 子宮が外で持ち出すんですあった. 南韓兵士は一歳排気子供を負っていたおかずも鉄砲をうって殺したし, 子供の髪を刈って地に投げ付けたし, 残ったバケツは多くの切れで切り捨ててほこり窪みに捨てた.
彼らはまた二歳排気子供の首を破って殺したし, 限り子供の身を入って来ようと木に投げて死ぬようにした後火に乗せた. それからは 12歳になった戎衣足をうって倒した後買ったままで不具塊に投げこんだ.
パンラングで別れてから二日ぶりにクィニョンシを調査中の私と私たちの連中から電話があった. 捜したんです! 当時タイソン現人民委員会柱石ですね. 1966年 3月19日課 20日二日間にかけたベトナム中部各省の戦争犯罪調査会議で南韓軍隊の罪悪上を一つ一つ明らかにしたウングウェンタンポングを言うことだ. 手に持っているこの資料がますます恐ろしくなりますね. もしかしたら私たちはこの資料をもっと補わなければならないかも知れないです. ビンディンソングを中心にこの資料に紹介された君の地域を除いても韓国軍の虐殺現場がもっとあると言いますね. 当時ウングウェンタンポングの報告によると 66年 1月23日から 2月26日まで約一ヶ月間猛虎部隊 3個小隊, 2個保安代代, 3個民間自衛隊によってこの地域でばかり皆 1200人の住民が虐殺されたし, そのうちには一人も残らず皆殺しされた家族が 8街だねなった. また 1535軒の家屋と 850万tに至る様式が燃やされたし, 649匹にのぼる水牛が銃弾に叩かれて死ぬとか燃やされた.
このような捜索掃討作戦は一次的に絨毯爆撃などで作戦地域を公開して, 韓国軍など地上軍が現場に投入されて村に残っている住民たちを即決処分した覆す燃やしてブルドーザーなどで村全体を押してしまう方式に展開された. 生存者たちの韓国軍に対する証言で共通される点は, 無差別機関銃難事, 大量殺戮, 妊婦卵子肉して, 女達に対する強姦肉して, 家屋火を放つなどだ. 生存者たちの証言を土台で韓国軍たちの良民虐殺方式を整理して見れば何種類共通された類型が現われる.
-住民たち(大部分が女性と年寄り, 子供たち)を一所に集めた後またいくつのグループで分けた後機関銃を乱射して皆殺しさせる.
-住民たちを一戸に追いこんで鉄砲を乱射した後家とともに死亡者と買った者を丸ごと燃やす.
-子供達の頭を破るとか首を首をして, 足を切るとか四肢を切断して火に投げこむ.
-女性たちを帰って強姦した後殺害して, 妊婦のお腹を胎児がすり抜けて来るまで軍靴発で踏み付ける.
-住民たちを村のトンネルに追いこんで毒ガスを噴射して窒死させる.
韓国軍のホロコーストが恣行された所には子供達の口にキャンデーやケーキが飽きていた. 年寄りたちの口にはタバコが飽きている場合が多かった. たぶん里人たちを安心させながら1ヶ所で集める一手段だったようだ.
ベトナム戦争で韓国軍の蛮行を告発して見よ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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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의 만행을 고발해보자..
살아남은 노스님의 증언
"1969년 10월14일, 베트남 남부 판랑지역에서 남한 군인들이 린선(Linh Son)사 스님들을 향해 총기를 휘두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이공의 보고에 따르면 남한군 한명이 린선사에서 베트남 여성을 희롱하다 주지승에게 쫓겨나자 이에 격분, 동료들을 몰고 와 총기를 난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은 이 사건으로 71살의 주지승, 69살의 노승, 41살의 여승, 15살의 행자승 등 4명이 사망한 사실을 베트남 정부가 공식 인정했다고 보도했다.(<인민군대>지 1969. 10. 24)"
(중략)
당시 유일한 생존자인 푸(78) 스님과 현장 목격자인 응웬티유엔한(45)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내 필자를 짓누르곤 했던 불안이, 부인하고만 싶었던 이야기가 눈앞에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아이건 산모건 사정없이.
"따이한 군인들이 먼저 스님들을 향해 총을 쏘았어요. 이어서 살려달라며 달아나는 여자 보살님에게도 총을 쏘았지요. 그리고는 시체를 모두 불태웠어요." 유엔한의 증언이다. 당시 겨우 15살이던 그는 두려움에 질려 고함도 지르지 못하고 숨어만 있었다고 고백한다. 린선사는 모두 다섯 스님이 거처하는 자그마한 절이었다. 그때 푸 스님은 주지스님보다 먼저 마을에 내려가 초상집에서 독경을 읽고 있었다. 증언의 대부분은 유엔한을 통해 이뤄졌고, 그 절의 유일한 생존자인 푸 스님은 말이 없다. 당시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람들은 그때 그 학살의 주인공인 따이한의 후예들을 살뜰히 배려한다. 시원한 차를 내오고, 과일을 깎아 권하고, 파파야를 먹느라 지저분해진 입을 닦으라고 물까지 받아다 줄 때는 울컥 눈물이 솟았다.
(중략)
"여성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
한국군은 잔혹한 대량학살을 일삼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조차 가급적 직접적인 교전은 피하려 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전선도 없고 적이 누군지도 모르는 베트남전에서 베트콩의 근거지를 수색, 파괴한다는 작전상의 명분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학살행위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기록은 그 내용이 워낙 끔찍해 자세히 밝히기에 부담이 없지 않았지만, 그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1965년 12월22일, 한국군 작전병력 2개 대대가 빈딘 성, 퀴년시에 있는 투이프 군, 프 호아 사(使), 턴지앙 촌에 500여발의 대포를 발사한 뒤 "깨끗이 죽이고,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파괴한다"는 구호 아래 수색소탕작전을 펼쳤다. 그들은 이 마을에서 12살 이하 22명의 어린이, 22명의 여성, 3명의 임산부, 70살 이상 6명의 노인을 포함, 50여명이 넘는 양민을 학살했다.
". 랑은 아이를 출산한 지 이틀 만에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아이는 군화발에 짓이겨진 채 피가 낭자한 어머니의 가슴 위에 던져져 있었다. 임신 8개월에 이른 축은 총알이 관통해 숨졌으며, 자궁이 밖으로 들어내져 있었다. 남한 병사는 한살배기 어린아이를 업고 있던 찬도 총을 쏘아 죽였고, 아이의 머리를 잘라 땅에 내동댕이쳤으며, 남은 물통은 여러 조각으로 잘라내 먼지구덩이에 버렸다.
그들은 또한 두살배기 아이의 목을 꺾어 죽였고, 한 아이의 몸을 들어올려 나무에 던져 숨지게 한 뒤 불에 태웠다. 그리고는 12살 난 융의 다리를 쏘아 넘어뜨린 뒤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넣었다."
판랑에서 헤어진 지 이틀 만에 퀴년시를 조사중인 "나와 우리" 일행에게서 전화가 왔다. "찾았어요! 당시 따이선 현 인민위원회 주석 말이에요." 1966년 3월19일과 20일 이틀간에 걸친 "베트남 중부 각 성의 전쟁범죄조사회의"에서 남한 군대의 죄악상을 낱낱이 밝혔던 응웬탄퐁을 이르는 말이다. "손에 들고 있는 이 자료가 점점 두려워지는군요. 어쩌면 우리는 이 자료를 더 보충해야 할지도 몰라요. 빈딘성을 중심으로 이 자료에 소개된 네 지역말고도 한국군의 학살현장이 더 있다고 하는군요." 당시 응웬탄퐁의 보고에 따르면 66년 1월23일부터 2월26일까지 약 한달 동안 맹호부대 3개 소대, 2개 보안대대, 3개 민간자위대에 의해 이 지역에서만 모두 1200명의 주민이 학살됐고, 그중에는 한명도 남김없이 몰살당한 가족이 8가구나 됐다. 또한 1535채의 가옥과 850만t에 이르는 양식이 불태워졌고, 649마리에 이르는 물소가 총탄에 맞아 죽거나 불태워졌다.
이러한 수색소탕작전은 일차적으로 융단폭격 등으로 작전지역을 공개하고, 한국군 등 지상군이 현장에 투입되어 마을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즉결처분한 뒤 집을 불사르고 불도저 등으로 마을 전체를 밀어버리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생존자들의 한국군에 대한 증언에서 공통되는 점은, 무차별 기관총 난사, 대량살육, 임산부 난자살해, 여자들에 대한 강간살해, 가옥 불지르기 등이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국군들의 양민학살 방식을 정리해보면 몇 가지 공통된 유형이 나타난다.
-주민들(대부분이 여성과 노인, 어린이들)을 한데 끌어모은 뒤 다시 몇개의 그룹으로 나눈 다음 기관총을 난사해 몰살시킨다.
-주민들을 한집에 몰아넣고 총을 난사한 뒤 집과 함께 죽은 자와 산 자를 통째로 불태운다.
-아이들의 머리를 깨뜨리거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절단해 불에 던져넣는다.
-여성들을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나올 때까지 군화발로 짓밟는다.
-주민들을 마을의 땅굴로 몰아넣고 독가스를 분사해 질식사시킨다.
한국군의 대량학살이 자행된 곳에는 아이들의 입에 캔디나 케이크가 물려 있었다. 노인들의 입에는 담배가 물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마을사람들을 안심시키면서 한곳으로 모으는 한 수단이었던 듯하다.
"1969년 10월14일, 베트남 남부 판랑지역에서 남한 군인들이 린선(Linh Son)사 스님들을 향해 총기를 휘두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이공의 보고에 따르면 남한군 한명이 린선사에서 베트남 여성을 희롱하다 주지승에게 쫓겨나자 이에 격분, 동료들을 몰고 와 총기를 난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은 이 사건으로 71살의 주지승, 69살의 노승, 41살의 여승, 15살의 행자승 등 4명이 사망한 사실을 베트남 정부가 공식 인정했다고 보도했다.(<인민군대>지 1969. 10. 24)"
(중략)
당시 유일한 생존자인 푸(78) 스님과 현장 목격자인 응웬티유엔한(45)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내 필자를 짓누르곤 했던 불안이, 부인하고만 싶었던 이야기가 눈앞에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아이건 산모건 사정없이.
"따이한 군인들이 먼저 스님들을 향해 총을 쏘았어요. 이어서 살려달라며 달아나는 여자 보살님에게도 총을 쏘았지요. 그리고는 시체를 모두 불태웠어요." 유엔한의 증언이다. 당시 겨우 15살이던 그는 두려움에 질려 고함도 지르지 못하고 숨어만 있었다고 고백한다. 린선사는 모두 다섯 스님이 거처하는 자그마한 절이었다. 그때 푸 스님은 주지스님보다 먼저 마을에 내려가 초상집에서 독경을 읽고 있었다. 증언의 대부분은 유엔한을 통해 이뤄졌고, 그 절의 유일한 생존자인 푸 스님은 말이 없다. 당시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람들은 그때 그 학살의 주인공인 따이한의 후예들을 살뜰히 배려한다. 시원한 차를 내오고, 과일을 깎아 권하고, 파파야를 먹느라 지저분해진 입을 닦으라고 물까지 받아다 줄 때는 울컥 눈물이 솟았다.
(중략)
"여성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
한국군은 잔혹한 대량학살을 일삼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조차 가급적 직접적인 교전은 피하려 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전선도 없고 적이 누군지도 모르는 베트남전에서 베트콩의 근거지를 수색, 파괴한다는 작전상의 명분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학살행위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기록은 그 내용이 워낙 끔찍해 자세히 밝히기에 부담이 없지 않았지만, 그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1965년 12월22일, 한국군 작전병력 2개 대대가 빈딘 성, 퀴년시에 있는 투이프 군, 프 호아 사(使), 턴지앙 촌에 500여발의 대포를 발사한 뒤 "깨끗이 죽이고,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파괴한다"는 구호 아래 수색소탕작전을 펼쳤다. 그들은 이 마을에서 12살 이하 22명의 어린이, 22명의 여성, 3명의 임산부, 70살 이상 6명의 노인을 포함, 50여명이 넘는 양민을 학살했다.
". 랑은 아이를 출산한 지 이틀 만에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아이는 군화발에 짓이겨진 채 피가 낭자한 어머니의 가슴 위에 던져져 있었다. 임신 8개월에 이른 축은 총알이 관통해 숨졌으며, 자궁이 밖으로 들어내져 있었다. 남한 병사는 한살배기 어린아이를 업고 있던 찬도 총을 쏘아 죽였고, 아이의 머리를 잘라 땅에 내동댕이쳤으며, 남은 물통은 여러 조각으로 잘라내 먼지구덩이에 버렸다.
그들은 또한 두살배기 아이의 목을 꺾어 죽였고, 한 아이의 몸을 들어올려 나무에 던져 숨지게 한 뒤 불에 태웠다. 그리고는 12살 난 융의 다리를 쏘아 넘어뜨린 뒤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넣었다."
판랑에서 헤어진 지 이틀 만에 퀴년시를 조사중인 "나와 우리" 일행에게서 전화가 왔다. "찾았어요! 당시 따이선 현 인민위원회 주석 말이에요." 1966년 3월19일과 20일 이틀간에 걸친 "베트남 중부 각 성의 전쟁범죄조사회의"에서 남한 군대의 죄악상을 낱낱이 밝혔던 응웬탄퐁을 이르는 말이다. "손에 들고 있는 이 자료가 점점 두려워지는군요. 어쩌면 우리는 이 자료를 더 보충해야 할지도 몰라요. 빈딘성을 중심으로 이 자료에 소개된 네 지역말고도 한국군의 학살현장이 더 있다고 하는군요." 당시 응웬탄퐁의 보고에 따르면 66년 1월23일부터 2월26일까지 약 한달 동안 맹호부대 3개 소대, 2개 보안대대, 3개 민간자위대에 의해 이 지역에서만 모두 1200명의 주민이 학살됐고, 그중에는 한명도 남김없이 몰살당한 가족이 8가구나 됐다. 또한 1535채의 가옥과 850만t에 이르는 양식이 불태워졌고, 649마리에 이르는 물소가 총탄에 맞아 죽거나 불태워졌다.
이러한 수색소탕작전은 일차적으로 융단폭격 등으로 작전지역을 공개하고, 한국군 등 지상군이 현장에 투입되어 마을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즉결처분한 뒤 집을 불사르고 불도저 등으로 마을 전체를 밀어버리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생존자들의 한국군에 대한 증언에서 공통되는 점은, 무차별 기관총 난사, 대량살육, 임산부 난자살해, 여자들에 대한 강간살해, 가옥 불지르기 등이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국군들의 양민학살 방식을 정리해보면 몇 가지 공통된 유형이 나타난다.
-주민들(대부분이 여성과 노인, 어린이들)을 한데 끌어모은 뒤 다시 몇개의 그룹으로 나눈 다음 기관총을 난사해 몰살시킨다.
-주민들을 한집에 몰아넣고 총을 난사한 뒤 집과 함께 죽은 자와 산 자를 통째로 불태운다.
-아이들의 머리를 깨뜨리거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절단해 불에 던져넣는다.
-여성들을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나올 때까지 군화발로 짓밟는다.
-주민들을 마을의 땅굴로 몰아넣고 독가스를 분사해 질식사시킨다.
한국군의 대량학살이 자행된 곳에는 아이들의 입에 캔디나 케이크가 물려 있었다. 노인들의 입에는 담배가 물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마을사람들을 안심시키면서 한곳으로 모으는 한 수단이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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