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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人の神風特攻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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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東亜戦争において、当時は日本であった韓国でも、多くの方が日本人として戦い、散華されました。この方々は日本人として日本を守り抜く為に命を落とされた、護国の英雄です。その中には特別攻撃隊要員つまり特攻隊員として志願し、出撃、散華された立派な朝鮮人もいらっしゃいます。


卓庚鉉(たくこうげん)(日本名・光山文博)

大正9年慶尚南道生まれ
昭和20年5月11日第51振武隊 第7次航空総攻撃として沖縄西海方面に陸軍戦闘機 隼にて出撃 戦死 24歳 2階級特進 大尉
伊藤博文を心から尊敬していたことから、文博という日本名を自分で考えたそうです。
陸軍航空隊を志願し、 昭和18年10月に特別操縦見習士官一期生として難関を突破しみごと合格した光山文博は大刀洗陸軍飛行学校分教所(知覧)に配属となり、一年間の訓練のちに19年10月に少尉に任官す。 11月に軍人になることを反対した母を亡くしています。その母の死に目に駆け付けた光山少尉に対して彼の父は、「ひと足遅かったなあ。お母さんは、随分待っていたのになあ…。お母さんなあ、お前の事を心配していたが、なくなる前には、もう諦めの心境なのか、『文博はもうお国に捧げた体だから、十分に御奉公するようにいって下さい』と言い残したんだよ」「じゃあ、お父さんも、僕が戦死しても嘆きませんね」すると父は「日本が勝か負けるか、大変な戦争だよ。お前も十分戦ってくれ」

光山少尉は基地に戻ってただちに特攻志願の願書を書いて、師団長に提出。
三重県明野で編成された陸軍特別攻撃隊第51振武隊に所属。昭和20年4月、知覧に進出。

卓庚鉉大尉と とめさん
特攻の母と呼ばれ、幾人もの特攻隊員を自身の経営する富家食堂でもてなし、そして「見送った」鳥浜とめさん。彼女を最も慕い、またとめさんやお嬢さんにとっても、一番忘れられない存在だったと言う、光山文博大尉(卓庚鉉)。

光山文博は無口な青年でしたが、とめさんに心を開いてからは、いつも彼女の傍らから離れませんでした。 とめさんが台所にいれば光山も台所に。野山に花摘みにいくときも、光山はシャベルを持ってついて回りました。 とめさんが野山で見つけた草花を、光山は根から掘って大切に持ち帰り、庭に植える。その花が根付かず枯れているのを見ると、光山は再び山に入り、同じ花を見つけては持ち帰り、だまって植え直しておきました。
台所仕事もこまめに手伝う光山に姿を見て、お嬢さんの礼子さんでさえ、本当の親子のようだと羨ましく思うほどの仲でした。

知覧の特攻隊員の多くを見送った鳥浜トメさんの経営する富屋食堂に、出撃前夜最後の別れに一人で訪れてました。他の特攻隊員の歌声に耳を傾けて いた卓に、トメさんが「今夜が最後だから光山さんも歌わんね」と勧めると、「そうだね、最後だからね。それでは僕の故郷の歌を歌うから、おかあさん聞いてね」と普段は無口で恥ずかしがり屋だった光山は、被っていた戦闘帽を眼が隠れるぐらい目深に被って、あぐらをかき、柱にもたれかかってアリランを歌っています。涙を隠すために。
アリランを歌う光山は次第に涙でくしゃくしゃになって、二番は歌にならずに、いじらしく思ったとめさんは光山少尉の手を取り、トメさんの娘さん二人も手を取り合って泣いたそうです。
光山少尉こと卓庚鉉少尉はこの時トメさんに朝鮮の黄色い縞の布で作った財布を「お世話になりました。こんなもので恥ずかしいですが、受け取ってください」とお渡ししています。トメさんは「出撃記念 光山少尉」と書かれたこの形見となった財布を大切にしていて、それは今も残されています。

現在「日本陸軍隼大尉」と墓碑名に刻まれた墓で故郷の慶州で御両親といっしょに眠っているそうです。


金 尚弼(きんしょうひつ)大正9年生まれ
9月大刀洗陸軍飛行学校隈之庄分校 特別操縦見習士官一期生として私立延禧専門学校初の合格者となる。
昭和20年2月11日満州新京で編成された特攻隊に自ら志願。
昭和20年4月3日 宮崎県新田原基地より第5編隊長として沖縄西方洋上に出撃 戦死 24歳。2階級特進で大尉。
満州綏中第23教育飛行隊配属に配属されている時の事です。隊内の演芸会で「私は朝鮮出身です。少しアクセントが違いますが、日本の歌を歌います」と言うと、隊員から 「それならアリランを歌ってくれ」「そうだ、そうだ、アリランを聞かせてくれ」との声があがりました。金が「では母国の朝鮮語で歌います」と言って歌い、歌い終わると、拍手喝采の嵐が起こったといいます。
その後、満州の敦化の飛行隊に移り、昭和20年2月11日、満州・新京の第2飛行軍で2つの飛行隊が編成された時特攻隊に志願し、誠第32飛行隊に配属さ れました。恐らく家族とはこれが最後の別れになると思った金は、2月25日、平壌の三根旅館で日本軍将校になることを反対していた兄・金尚烈と会いました。

 兄から逃亡するよう懸命な説得を受けましたが、
「自分は朝鮮を代表している。逃げたりしたら、祖国が笑われる。多くの同胞が、一層の屈辱に耐えねばならなくなる」
「僕は日本人になりきって日本のために死のうとし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そこをよく解って欲しいのです。お父さんとお兄さん、この二人の意志を継ぐために、日本を勝利に導いて、その暁に我々の武勲を認めさせて独立にもってゆくことなのです。大東亜共栄圏として、ビルマ、インドネシア、朝鮮、みな独立の道があるはずです。日本が強くなればなるほど、地下の独立運動は無力となりますから、それより日本に協力して独立を勝ち取る、その方が確かだと思うのです。日本人が憎くない、というとそれは嘘になりますが、僕は少年飛行兵出身の部下を連れてゆきますし、今日一緒に来てもらった佐藤曹長からは、親身の整備をしてもらいました。戦友や部下たちとは、一心同体であり、民族のしこりや壁はありません。民族の魂は売り渡していません。朝鮮の魂で頑張ってきました。僕の考えはきっと御先祖様も許して下さると思うのです」。
彼はそのように言い切ったそうです。


林 長守(りんちょうしゅ)軍曹
少年航空兵出身
昭和19年12月7日 勤王隊 二式双襲(屠龍)にてフィリピン オルモック湾(レイテ島東海岸)出撃 朝鮮人として最初の出撃
「大東亜戦史・フィリピン篇」(富士書苑刊)によると
 そういう未熟な人の多い中では、勤王隊の林長守軍曹は抜群の操縦技術を持っていた。少年飛行兵出身として最初の特攻隊員でもあった。
 人柄もよく、隊長の山本卓美中尉は彼を日本に帰して少年飛行聘の育成にあたらせようと、何度彼に説いても、彼は頑として聞かなかった。
山本隊長の「これは命令だ」といっても、彼は「私のたった一度の反抗です。そういう命令は聞く事が出来ません」と承知しなかった。眼のくりくりしたいい青年だった。
 林軍曹は二式双襲(屠龍)10機の中の一員として乗り込みました。その時の戦果は、駆逐艦マハン(1630トン)輸送駆逐艦ワード(1600トン)の二隻を大破。両艦は使い物にならなくなり、最後は米軍によって沈められました。(米軍資料より)
 当時、毎日申報は、「半島神鷲」として、林軍曹のことを大きく報じました。


朴東薫(ぼくとうくん)伍長

大正15年生まれ 少年飛行兵第15期生
昭和20年3月29日 誠41・扶揺隊 知覧より97式戦闘機にて沖縄方面出撃 18歳
遺書には「靖國に召されし一身如何にせん、ただ君がため」とあったそうですが、同期の同胞「金山」伍長には「内鮮一体というけど、ウソだ。俺は、朝鮮人の肝っ玉を見せてやる」と言い残したという。
「The Geacs Project Vol.5」大館史編による)
 朝鮮半島の御遺族は、戦後、ソ連軍による財産没収や朝鮮動乱、そして、親日派としての経歴より多くの辛酸をなめ、迫害されて精神に異常をきたし、悶死したといわれる御父上は生前、「日本という国は決して悪い国ではない。特攻で死んだ者の家庭に対して責任を持つ国だ」とおっしゃっていたそうです。


廬龍患(河田清治)少尉
京城法学専門学校
昭和20年5月29日

二式戦闘機(屠龍キ・45)にて御前崎上空でBー29編隊長機に体当たりを敢行 撃墜
当時、全国の新聞を飾ったこの武勲の主である河田少尉が朝鮮人であることをほとんどの日本人は知らなかった。
平成14年現在河田少尉の実弟は水原市に住まわれている。
我が国は、特攻隊員の場合は二階級特進の栄誉をもって応えた。


朝鮮の志願兵


昭和18年には6,300人の志願兵募集に対して、実に30万人以上の青年が応募し、倍率は48倍にも達した。血書による嘆願も数百人にのぼり、希望が入れられずに自殺までした青年も現れて、総督府を困惑させた。朝鮮人の軍人軍属は242,341 人であり、そのうち22,182人が第二次世界大戦で死亡または不明となり帰国していない。

表3. 志願者数 年度 志願者 入所者数 競争倍率 1938年 2946人 406人 7.3倍 1939年 12,348人 613人 20.1倍 1940年 84,443人 3,060人 27.6倍 1941年 144,743人 3,208人 45.1倍 1942年 254,273人 4,077人 62.4倍 1943年 303,394人 6,000人 50.6倍

概要

下の略年表参照

1938年より陸軍特別志願兵を開始、1943年より海軍特別志願兵制度が導入された。

特別志願兵制度の施行以前は、朝鮮人が一般の兵卒として陸海軍に入隊することはできず、朝鮮人の日本軍人は洪思翊に代表される、陸軍士官学校を 卒業して士官に任官した者、李秉武のように旧大韓帝国軍から朝鮮軍人として日本陸軍に転籍した者に限られていた。

略年表

  • 1872年(M6) 徴兵制度はじまる
  • 1910年 日韓併合
  • 1938年 4月2日 朝鮮総督府・陸軍病気志願者訓練所規定
朝鮮総督府・陸軍兵志願者訓錬所生徒採用規則→ 陸軍兵特別志願 5月4日公布(5月5日施行)国家総動員法ヲ朝鮮、台湾及樺太ニ施行スルノ件
  • 1941年 朝鮮総督府傷痍軍人療養所官制
  • 1943年 戦時行政特例法及許可認可等臨時措置法ヲ朝鮮、台湾及樺太ニ施行スルノ件
7月 27日 海軍特別志願兵令,
  • 1944年 朝鮮 徴兵検査⇒訓練中に終戦を迎える
     強制で徴用された軍人は戦地に出る事なく終戦を迎えた。
    戦争末期には朝鮮半島でも、日本人と同じく徴用されましたが、韓国人は戦争に出る事なく終戦を迎えました。


黒田福美さんらに無断で祈念碑を撤去 韓国・泗川市

 女優の黒田福美さんが韓国南部に、太平洋戦争で特攻隊員として死んだ朝鮮人青年の祈念碑を建てた問題で、地元の泗川市が13日、この碑を勝手に撤去したことがわかった。黒田さんは「無断で撤去しており、行政がやる行為とは思えない」と反発している。
 黒田さんは韓国の洪鍾ピル・前明知大教授らとともに、日本人として戦死した朝鮮-人たちの祈念碑を作ろうと計画。泗川市も積極的に応援し、土地などを提供、碑は完成した。だが、10日の除幕式の直前になって市は撤去方針を示した。
 市側の担当者は無断撤去したことを認めた。
 一方、黒田さんは「時間をおいて、韓国全体で論議してもらうためにも碑を残してもらいたかった。所有権は私自身にあり、絶対に納得できない」と憤慨している。

無念の思いを語る黒田福美さん



桜の樹を植えた特攻隊員

「日韓共鳴二千年」名越二荒之助著 明成社P468~470
「私 は教頭をになる前に視学官をやっていました。各地を巡回していた時、韓国では珍しい女性の小学校長を訪ねたことがあります。その校名は本人に迷惑がかかるといけないので、まだ発表できません。なななか立派な人柄で、男性教師からも尊敬されていました。ところがその校長は未亡人で、子供がいないのです。校長の御主人は、どんな人だったと思いますか。韓国では余り吹聴できませんが、実は特攻隊員として、沖縄で戦死したんです。その御主人は航空隊員になると、死を覚悟してたんでしょう。出身小学校を訪ねて、校庭に桜の木を植えたんです。その桜は今は大きな樹に成長しています。未亡人は奇しくも御主人が桜を植えた学校の校長として赴任したんです。校長は言っていました『淋しい時は桜の木の下に立つと心が安まる』と。
 私はこの話を日本人に知って貰いたいと思って、ソウルにいる日本の新聞記者にそれとなく知らせたました。A(朝日?)新聞の記者が、早速小学校長を取材しました。
 校長は記者を桜の木の下に案内しました。すると記者は『日本の軍国主義が、御主人をダマして申し訳ないことをしました』と言ったのです。いつもは謙虚な校長でしたが『だました』という言葉には激怒しました。
『私の主人はダマされるような人ではありません。自分の意志で出撃したんです。ダマされたというのは、人間に対しての屈辱です。取材はお断りです』と。これが私の大東亜戦争観です」
 張さんはこの秘話を紹介しながら、あとは何も語りませんでした。私は余韻を持たせる解答にうなりました。
大東亜戦争を評論し出したら、どんなことでも言えましょう。特に当時の朝鮮の人々にとっては複雑で一言で尽くせ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我々は評論する前に、このように生きた人々の心を深く偲びたいものです。
 その張志学氏は、1992年、癌のために逝去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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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카미카제 특공대

대동아전쟁에 대하고, 당시는 일본에서 만난 한국에서도, 많은 분이 일본인으로서 싸워, 산화되었습니다.이 분들은 일본인으로서 일본을 지켜 뽑기 위해 목숨을 잃어진, 호국의 영웅입니다.그 중에는 특별 공격대 요원 즉 특공대원으로서 지원해, 출격, 산화된 훌륭한 조선인도 계(오)십니다.


탁경현(싶게 광원)(일본명・미츠야마문박)

타이쇼 9년 경상남도 태생
쇼와 20년 5월 11일 제 51진무대 제 7차 항공 총공격으로서 오키나와 사이카이 방면으로 육군 전투기하야부사에서 출격 전사 24세 2 계급 특진 대위
이토히로부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던 것으로부터, 문박이라고 하는 일본명을 스스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육군 항공대를 지원해, 쇼와 18년 10월에 특별 조종 견습 사관 1기생으로서 난관을 돌파 밸 것 합격한 미츠야마문박은 타치아라이 육군 비행 학교분교소(치란)에 배속이 되어, 1년간의 훈련후에 19년 10월에 소위에게 임관. 11월에 군인이 되는 것을 반대한 어머니를 잃고 있습니다.그 어머니의 죽음으로 눈에 달려온 미츠야마 소위에 대해서 그의 아버지는,「사람다리 늦었다.엄마는, 상당히 기다리고 있었는데….엄마, 너의 일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없어지기 전에는, 이제(벌써) 체념의 심경인가, 『문박은 이제(벌써) 나라에 바친 몸이니까, 충분히 봉공하도록(듯이) 말해 주세요』라고 말하다가 남겼어 」「자, 아버지도, 내가 전사해도 한탄하지 않아요」하면 아버지는「일본이 승인가 지는지, 대단한 전쟁이야.너도 충분히 싸워 줘」

미츠야마 소위는 기지로 돌아와 즉시 특공지원의 원서를 쓰고, 사단장에게 제출.
미에현 아케노에서 편성된 육군 특별 공격대 제 51진무대에게 소속.쇼와 20년 4월, 치란에 진출.

탁경현대위와 말려씨
특공의 어머니로 불려 몇 사람의 특공대원을 자신의 경영하는 부자집 식당에서 대접해, 그리고「전송한」토리하마와 째씨.그녀를 가장 그리워해, 또 세워 산야 아가씨에 있어서도, 제일 잊을 수 없는 존재였다고 말하는, 미츠야마문 히로시 대위(탁경현).

미츠야마문박은 과묵한 청년이었지만, 세워씨에게 마음을 열고 나서는, 언제나 그녀의 옆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세워씨가 부엌에 있으면 미츠야마도 부엌에.야산에 꽃따기하러 갈 때도, 미츠야마는 삽을 가지고 붙어 돌았습니다. 세워씨가 야산에서 찾아낸 풀꽃을, 미츠야마는 도무지 파 소중히 가지고 돌아가, 뜰에 심는다.그 꽃이 뿌리 내리지 않고 시들고 있는 것을 보면, 미츠야마는 다시 산에 들어가, 같은 꽃을 찾아내고는 가지고 돌아가, 가만히 있어 다시 심어 두었습니다.
부엌 일도 세세하게 돕는 미츠야마에 모습을 보고, 아가씨 레이코씨조차,진짜 부모와 자식같다면 부럽다고 생각할 정도의 사이였습니다.

치란의 특공대원의 대부분을 전송한 토리하마 트메씨의 경영하는 부 가게 식당에, 출격 전야 마지막 이별에 혼자서 방문하고 있었습니다.다른 특공대원의 가성에 귀를 기울여 있던 탁자에, 트메씨가「오늘 밤이 최후이니까 미츠야마씨도 노래하지 않아」와 권하면,「그렇다, 최후니까.그러면 나의 고향의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어머니 (들)물어」와 평상시는 과묵하고 부끄럽게 여기기가게였던 미츠야마는, 감싸고 있던 전투모를 눈이 숨는 정도목심에 감싸고, 책상다리를 써, 기둥에 기대어 가고 아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눈물을 숨기기 위해서.
아리랑을 노래하는 미츠야마는 점차 눈물로 꾸깃꾸깃하게 되고, 2번은 노래가 되지 않고 , 애처롭다고 생각했다고 째씨는 미츠야마 소위의 수를 잡아, 트메씨의 따님 두 명도 손을 마주 잡아 울었다고 합니다.
미츠야마 소위 일탁경현소위는 이 때 트메씨에게 조선의 노란 줄무늬의 옷감으로 만든 지갑을「신세를 졌습니다.이런 것으로 부끄럽습니다만, 받아 주세요」와 건네주어 하고 있습니다.트메씨는「출격 기념 미츠야마 소위」라고 쓰여진 이 기념품이 된 지갑을 소중히 하고 있고, 그것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현재「일본 육군하야부사 대위」와 묘비명에 새겨진 무덤에서 고향의 경주에서 양친과 함께 자고 있다고 합니다.


금 상필(근소히개) 타이쇼 9 년생
9월 타치아라이 육군 비행 학교외지장분교 특별 조종 견습 사관 1기생으로서 사립연희전문학교 첫 합격자가 된다.
쇼와 20년 2월 11일 만주 신쿄에서 편성된 특공대에 스스로 지원.
쇼와 20년 4월 3 히노미야 사키현 신덴바루 기지에서(보다) 제5 편대장으로서 오키나와 서방 해상에 출격 전사 24세.2 계급 특진으로 대위.
만주수중 제 23 교육 비행대 배속에 배속되어 있을 때의 일입니다.대내의 연예회에서「 나는 조선 출신입니다.조금 엑센트가 다릅니다만, 일본의 노래를 부릅니다」라고 말하면, 대원으로부터 「그렇다면 아리랑을 노래해 줘」「그렇다, 그렇다, 아리랑을 들을만해 줘」와의 소리가 높아졌습니다.돈이「에서는 모국의 조선어로 노래합니다」라고 말해 노래해, 다 노래하면 , 박수 갈채의 폭풍우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후, 만주의 돈화의 비행대로 옮겨, 쇼와 20년 2월 11일, 만주・신쿄의 제2 비행군에서 2개의 비행대가 편성되었을 때 특공대에 지원해, 성 제 32 비행대에게 배속함 했다.아마 가족과는 이것이 마지막 이별이 된다고 생각한 돈은, 2월 25일, 평양의 미네 여관에서 일본군장교가 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던 형(오빠)・김 히사시열과 만났습니다.

 형(오빠)로부터 도망하도록(듯이) 열심인 설득을 받았습니다만,
「자신은 조선을 대표하고 있다.도망치거나 하면, 조국이 웃어진다.많은 동포가, 한층 더 굴욕에 참지 않으면 안 되게 되는 」
「나는 일본인(이) 되고 일본을 위해서 죽으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거기를 잘 알았으면 좋습니다.아버지와 형(오빠), 이 두 명의 의지를 잇기 위해서, 일본을 승리에 이끌고, 그 새벽에 우리 무훈을 인정하게 하고 독립에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대동아공영권으로서 버마, 인도네시아, 조선, 모두 독립의 길이 있을 것입니다.일본이 강해지면 과연, 지하의 독립 운동은 무력이 되기 때문에, 그것보다 일본에 협력하고 독립을 차지하는, 그 쪽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일본인이 밉지 않다는, 그것은 거짓말이 됩니다만, 나는 소년 비행병 출신의 부하를 데려 가고, 오늘 함께 와 준 사토 상사에게서는, 근친의 정비를 받았습니다.전우나 부하들이란, 일심동체이며, 민족의 응어리나 벽은 없습니다.민족의 영혼은 매도하고 있지 않습니다.조선의 영혼으로 열심히 왔습니다.나의 생각은 반드시 선조님도 허락해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
그는 그처럼 단언했다고 합니다.


림 장수(응나비 종류) 군조
소년 항공병 출신
쇼와 19년 12월 7 일근왕대2식쌍습(도용)에서 피리핀오르목크만(레이테섬동해안) 출격 조선인으로서 최초의 출격
「대동아 전사・필리핀편」(후지서원간)에 의하면
 그러한 미숙한 사람이 많은 가운데에서는, 근왕대 림장수군조는 발군의 조종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소년 비행병 출신으로서 최초의 특공대원이기도 했다.
 인품도 좋고, 대장의 야마모토 타카시미중위는 그를 일본에 돌아가 소년 비행빙의 육성에 해당하게 하려고, 몇 번그에게 말해도, 그는 완강히 (듣)묻지 않았다.
야마모토 대장의「이것은 명령이다」라고 해도, 그는「 나의 딱 한번의 반항입니다.그러한 명령은 (들)물을 수가 없습니다 」와 용납하지 않았다.눈의 동글동글 하고 싶은 있어 청년이었다.
 숲군조는 2식쌍습(도용) 10기안의 일원으로서 탔습니다.그 때의 전과는, 구축함 마한(1630톤) 수송 구축함 워드(1600톤)의 2척을 대파.양함은 쓸모가 있지 않게 되어, 최후는 미군에 의해서 가라앉힐 수 있었습니다.(미군 자료보다)
 당시 , 매일 신보는, 「반도신취」로서 숲군조를 크게 알렸습니다.


박동훈(나 묻는 훈) 하사

타이쇼 15 년생 소년 비행병 제 15 기생
쇼와 20년 3월 29일성 41・부요대 치란보다 97식 전투기로 오키나와 방면 출격 18세
유서에는「정국에 드셔 해 일신 여하 가짜응, 단지 네가 싶은」와 있었다고 합니다만, 동기의 동포「카나야마」하사에게는「 안센이치체라고 하지만, 거짓말이다.나는, 조선인의 담력을 보여 주는」라고 말하다가 남겼다고 한다.
「The Geacs Project Vol.5」오다테사편에 의한다)
 한반도의 유족은, 전후, 소련군에 의한 재산 몰수나 조선 동란, 그리고, 친일파로서의 경력보다 많은 신산을 없는, 박해되어 정신에 이상을 왔고, 민사했다고 말해지는 아버님은 생전,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는 결코 나쁜 나라는 아니다.특공으로 죽은 사람의 가정에 대해서 책임을 가지는 나라다」라고 하시고 있었다고 합니다.


려용환(카와다 세이지) 소위
경성 법학 전문학교
쇼와 20년 5월 29일

2식 전투기(도용키・45)로 오마에자키 상공에서 B-29 편대장기에 전력투구를 감행 격추
당시 , 전국의 신문을 장식한 이 무훈의 주요한 카와다 소위가 조선인인 것을 대부분의 일본인은 몰랐다.
헤세이 14년 현재 카와다 소위의 친아우는 수원시에 사지고 있다.
우리 나라는, 특공대원의 경우는 2층급 특진의 영예를 가지고 응했다.


조선의 지원병


쇼와 18년에는 6,300명의 지원병 모집에 대해서, 실로 30만명 이상의 청년이 응모해,배율은 48배에도 달했다.혈서에 의한 탄원도 수백 인에 달해,희망을 넣지 못하고 자살까지 한 청년도 나타나고, 총독부를 곤혹시켰다.조선인의 군인 군속은 242,341 사람이며, 그 중 22,182명이 제이차 세계대전에서 사망 또는 불명이 되어 귀국하고 있지 않다.

표 3. 지원자수 연도 지원자 입소자수 경쟁 배율 1938년 2946명 406명 7.3배 1939년 12,348명 613명 20.1배 1940년 84,443명 3,060명 27.6배 1941년 144,743명 3,208명 45.1배 1942년 254,273명 4,077명 62.4배 1943년 303,394명 6,000명 50.6배

개요

아래의 약어 연표 참조

1938년부터 육군 특별 지원병을 개시, 1943년부터 해군 특별 지원병 제도가 도입되었다.

특별 지원병 제도의 시행 이전에는, 조선인이 일반의 병졸로서 육지 해군에 입대하지 못하고, 조선인의 일본 군인은 홍사익으로 대표되는,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해 사관에게 임관 한 사람, 리병무와 같이 구대한제국군으로부터 조선 군인으로서 일본 육군에게 전적 한 사람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약어 연표

  • 1872년(M6) 징병 제도는 글자 만
  • 1910년 한일합방
  • 1938년 4월 2일 조선 총독부・육군 병지원자 훈련소 규정
조선 총독부・육군병 지원자훈련양친도 채용 규칙 → 육군병 특별 지원 5월 4일 공포(5월 5일 시행) 국가 총동원법조선, 대만급가라후토니 시행 스르노건
  • 1941년 조선 총독부 상이군인 요양소 관제
  • 1943년 전시 행정 특례법급허가 인가등 임시 조치법조선, 대만급가라후토니 시행 스르노건
7월 27일 해군 특별 지원병령,
  • 1944년 조선 징병 검사⇒훈련중에 종전을 맞이한다
     강제로 징용 된 군인은 전지에 나오는 무사히 종전을 맞이했다.
    전쟁 말기에는 한반도에서도, 일본인과 같이 징용 되었습니다만, 한국인은 전쟁하러 나오는 무사히 종전을 맞이했습니다.


쿠로다 후쿠미씨등에 무단으로 기원비를 철거 한국・사 카와시

 여배우 쿠로다 후쿠미씨가 한국 남부에,태평양전쟁으로 특공대원으로서 죽은 조선인 청년의 기원비를 세운 문제로, 현지의 사 카와시가 13일, 이 비를 마음대로 철거한 것을 알 수 있었다.쿠로다씨는「무단으로 철거하고 있어, 행정이 하는 행위라고는 생각되지 않는」와 반발하고 있다.
 쿠로다씨는 한국의 홍종필・전 명지대 교수들과 함께, 일본인으로서 전사한 조선-사람들의 기원비를 만들려고 계획.사 카와시도 적극적으로 응원해, 토지등을 제공, 비는 완성했다.하지만, 10일의 제막식의 직전이 되어 시는 철거 방침을 나타냈다.
 시측의 담당자는 무단 철거한 것을 인정했다.
 한편, 쿠로다씨는「시간을 두고, 한국 전체로 논의해 주기 위해서도 비를 남겨 주었으면 했다.소유권은 나 자신에 있어, 절대로 납득할 수 없는」와 분개하고 있다.

무념의 생각을 말하는 쿠로다 후쿠미씨



벚꽃의 나무를 심은 특공대원

「일한 공명2천년」액막이 행사2황지조저명성사 P468~470
「 나 (은)는 교감을이 되기 전에 장학관을 하고 있었습니다.각지를 순회하고 있었을 때, 한국에서는 드문 여성의 초등학교장을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그 교명은 본인에게 폐가 걸리면 안 되기 때문에, 아직 발표할 수 없습니다.없는 (안)중 훌륭한 인품으로, 남성 교사로부터도 존경되고 있었습니다.그런데 그 교장은 미망인으로, 아이가 없습니다.교장의 주인님은, 어떤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까.한국에서는 남아 선전 할 수 없습니다만, 실은 특공대원으로서 오키나와에서 전사했습니다.그 주인님은 항공 대원이 되면,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에 짊어진다.출신 초등학교를 방문하고, 교정에 벚꽃나무를 심었습니다.그 벚꽃은 지금은 큰 수로 성장하고 있습니다.미망인은 기이하게도 주인님이 벚꽃을 심은 학교의 교장으로서 부임했습니다.교장은 말했던 『외로울 때는 벚꽃나무아래에 서면 마음이 편안해지는』와.
 나는 이 이야기를 일본인에 알아 받고 싶고 , 서울에 있는 일본의 신문기자에 은근히 통지했다.A(아침해?) 신문의 기자가, 조속히 초등학교장을 취재했습니다.
 교장은 기자를 벚꽃나무아래에 안내했습니다.그러자(면) 기자는『일본의 군국주의가, 주인님을 다마 해 미안한 일을 했던』라고 말했습니다.언제나 겸허?`네 교장이었지만『속인』라는 말에는 격노했습니다.
『 나의 남편은 다마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자신의 의지로 출격 했습니다.다마 되었다는 것은, 인간에 대해서의 굴욕입니다.취재는 거절입니다』와.이것이 나의 대동아전쟁관입니다 」
 장씨는 이 비화를 소개하면서, 나머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나는 여운을 갖게하는 해답에 신음했습니다.
대동아전쟁을 평론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라도 말할 수 있읍시다.특히 당시의 조선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복잡하고 한마디로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우리는 평론하기 전에, 이와 같이 산 사람들의 마음을 깊게 그리워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장지학씨는, 1992년, 암을 위해서 서거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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