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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反逆か, 抗争か? 証拠に言お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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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反逆か, 抗争か? 証拠に言おう!


1997年 12月第15対大韓民国大統領選挙に出たキム・デジュンは選挙公約で 4.3特別法と犠牲者補償を立てたし引き継いで 1998年 4月 1日ガングマンギル, キムジュンベ, ギムチァンググック, 前輪形等が共同代表になった済州 4.3 第60周年記念事業推進汎国民委員会というのを作った. 1999年 12月 2日民主党チュ・ミエ議員など 102人の名医で法案を提出, 12月 16日国会本会議を通過させた. キム・デジュンは 2000年 1月 11日書名式をあげた.


2000年 8月 28日 20人の委員で構成された済州 4.3事件真相糾明及び犠牲者名誉回復委員会というのが出帆した. これらはイ・ハンドン, キム・ソクス, コ・ゴンなどキム・デジュン-ノ・ムヒョン治下の置物総理たちを委員長にして, いわゆる犠牲者をはいて受けて追慕公園(4.3平和公園)と 4.3記念館(4.3平和記念館) などを建立した.


記念館などには暴動という字が抜けている一方パルチサンゲリラまで犠牲者に遁甲されている. 記念館入口には 4.3日暴動を指令した南朝鮮労動党首魁朴憲永の写真が大きく玄関門の前にかかっていて彼を取ろうとしていた当時の警務部長チョ・柄玉博士写真はとても小さくて格好悪くすみにかかっていたと言う. 良識ある人々が重ねて抗議すると朴憲永写真が玄関で消えたと言う.


2003年 4月 15日, コ・ゴンを委員長にする済州 4.3事件真相糾明及び犠牲者名誉回復委員会は 4.3事件の性格規定を後代に任せるということを前提に 4.3事件が反逆的武将暴動なのかまたは左派たちが主張するところの ‘人民(民衆)抗争’なのか糾明しないままバックワンスン主導に作成された 4.3事件真相調査報告書を土台で “済州4.3事件真相調査報告で”の採択を決めたし, この報告書は 2003年 4月 29日 580余方に発行された. 


したがってこの本は 4.3事件が過去壻(真実化解囲)で規定したように “共産主義者が主導した謀反・暴動”(communist-led rebellion)なのかそれとも左派たちの主張どおり警察と西北青年団の弾圧に対する正当な 抗争なのか糾明しなかった.


‘済州4.3研究所’が 1989年から多い本を出したが人々は専ら被害部分だけ強調してこの村あの言葉を通いながら 40余年前のことを主観的に手探りして見る内容が主であって基本的に客観性問題が内包されている. 4.3事件が謀反-反乱か, ではなければ米軍政の弾圧と西北青年団の蛮行敵弾圧に抗して起きた正当なヘングゼングか? 4.3が, この二つの性格の中でどっちにあたるかどうかを一番客観的に糾明することができる資料が二つある.


一つは当時済州パルチサン大将イドックグが保管していたパルチサン状況日誌だ. 金悳区はギムダルサムに引き続き公式名称 ‘済州人民遊撃隊司令官’になったし, 1949年 6月 7日, 警察によって射殺された. この時彼の直属部下である ¥"養生石¥"の懐から極秘メモである “ゼズドインミンユギョックデトゼングボゴで”が発見されたしこの極秘見てからは 1948年 3月 15日から 7月 24日までおおよそ 4ヶ月 10日間にのぼる闘い状況を詳しく記録した.


4.3事件が北と連携の下に成り立った反逆事件なのかそれとも北とは全然かかわらず独自的に発生した抗争なのか一番正確に把握することができる客観的な記録だと思う. この極秘の状況だろうかは当時の警察身分で 4.3事件を現地で経験したムンチァングソング先生(当時支署主任だったし後で軽減で在職している途中退任)によって 1995年 8月 15日 ‘漢拏山は分かっている’は題目に出刊された.


他の一つは 1991年北朝鮮の ‘リョックサグァハックロンムンジブ’(科学百科事典総合出版社)に第16号に積まれた “済州島人民の 4.3一揆と反米愛国闘いの強化”(129-172ページ)という題目の朴設営のヨングノンムンダ. 朴設営は同じ海人 1991年 ‘リョックサグァハック‘ 4月号 20-24ページに “5.10断線(単線)を反対した済州人民たちの 4.3一揆”という題目の記事を書いたし, これは彼が書いた上の論文の要約本と見える. 


上のイドックグが保管した “ゼズドインミンユギョックデトゼングボゴで”と北朝鮮資料の初ページたちだけ見ても 4.3事件は断線(単線)-断定を邪魔するために南労堂の指令によって起こした武将暴動だったし, これにより大韓民国で唯一に 5.10選挙を行うことができなかった不名誉を済州島に抱かれてくれた反逆事件なのを分かる. 骨髓左翼であるキム・デジュンも 1998年 11月 23日全世界に生中継された CNNとのインタビューで “4・3は南労堂が起こした暴動”と言及した.  


“済州島人民の 4.3一揆と反米愛国闘いの強化”に略述された状況日誌と “ゼズドインミンユギョックデトゼングボゴで”に現われた状況を比べて見ることは歴史研究の一楽しみになるでしょう.


先に “ゼズドインミンユギョックデトゼングボゴで”から要約して次の順番に掲示しようとする.

原文を見る

4.3 !! 반역인가, 항쟁인가? 증거로 말하자!

4.3 !! 반역인가, 항쟁인가? 증거로 말하자!


1997년 12월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선거에 나선 김대중은 선거공약으로 "4.3특별법과 희생자보상"을 내세웠고 이어서 1998년 4월 1일 강만길, 김중배, 김창국, 전윤형등이 공동대표가 된 "제주 4.3 제60주년 기념사업 추진 범국민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1999년 12월 2일 민주당 추미애 의원 등 102명의 명의로 법안을 제출, 12월 16일 국회본회의를 통과시켰다. 김대중은 2000년 1월 11일 서명식을 했다.


2000년 8월 28일 20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라는 것이 출범했다. 이들은 이한동, 김석수, 고건 등 김대중-노무현 치하의 허수아비 총리들을 위원장으로 하여, 이른바 "희생자"를 신고 받고 추모공원(4.3평화공원)과 4.3기념관(4.3평화기념관) 등을 건립했다.


기념관 등에는 "폭동"이라는 글자가 빠져있는 반면 빨치산 게릴라들까지 희생자로 둔갑되어 있다. 기념관 입구엔 4.3일 폭동을 지령한 남조선노동당 수괴 박헌영의 사진이 커다랗게 현관문 앞에 걸려있고 그를 잡으려던 당시의 경무부장 조병옥 박사 사진은 아주 작고 볼품없게 구석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양식 있는 사람들이 거듭 항의하자 박헌영 사진이 현관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2003년 4월 15일, 고건을 위원장으로 하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는 4.3사건의 성격 규정을 후대에 맡긴다는 것을 전제로 4.3사건이 반역적 무장폭동인지 또는 좌파들이 주장하는 바의 ‘인민(민중)항쟁’인지 규명하지 않은 채 박원순 주도로 작성된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를 토대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의 채택을 결정했고, 이 보고서는 2003년 4월 29일 580여 쪽으로 발행됐다. 


따라서 이 책은 4.3사건이 과거사위(진실화해위)에서 규정한 것처럼 “공산주의자가 주도한 모반·폭동”(communist-led rebellion)인지 아니면 좌파들의 주장대로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정당한 항쟁인지 규명하지 않았다.


‘제주4.3연구소’가 1989년부터 많은 책을 냈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피해부분만 강조하고 이 마을 저 말을 다니면서 40여 년 전의 일들을 주관적으로 더듬어 보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원천적으로 객관성 문제가 내포돼 있다. 4.3사건이 모반-반란인가, 아니면 미군정의 탄압과 서북청년단의 만행 적 탄압에 항거하여 일어난 정당한 행쟁인가? 4.3이, 이 두 가지 성격 중 어느 쪽에 해당하는지를 가장 객관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자료가 두 개 있다.


하나는 당시 제주 빨치산 대장 이덕구가 보관하고 있던 빨치산 상황일지다. 김덕구는 김달삼에 이어 공식명칭 ‘제주인민유격대사령관’이 되었고, 1949년 6월 7일, 경찰에 의해 사살됐다. 이때 그의 직속부하인 "양생돌"의 주머니로부터 극비 메모인 “제주도인민유격대토쟁보고서”가 발견되었으며 이 극비 보고서는 1948년 3월 15일부터 7월 24일까지 무려 4개월 10일간에 이르는 투쟁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4.3사건이 북과 연계 하에 이루어진 반역사건인지 아니면 북과는 전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발생한 항쟁인지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이 극비의 상황일지는 당시의 경찰신분으로 4.3사건을 현지에서 겪었던 문창송 선생(당시 지서주임이었고 나중에 경감으로 재직하다가 퇴임)에 의해 1995년 8월 15일 ‘한라산은 알고 있다’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다른 하나는 1991년 북한의 ‘력사과학론문집’(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에 제16호로 실린 “제주도인민의 4.3봉기와 반미애국투쟁의 강화”(129-172쪽)라는 제목의 박설영의 연구논문다. 박설영은 같은 해인 1991년 ‘력사과학‘ 4월호 20-24쪽에 “5.10단선을 반대한 제주인민들의 4.3봉기”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고, 이는 그가 쓴 위 논문의 요약본으로 보인다. 


위 이덕구가 보관했던 “제주도인민유격대토쟁보고서”와 북한자료의 첫 페이지들만 보아도 4.3사건은 단선-단정을 방해하기 위해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일으킨 무장폭동이었고, 이로 인해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5.10선거를 치르지 못한 불명예를 제주도에 안겨준 반역사건임을 알 수 있다. 골수 좌익인 김대중 역시 1998년 11월 23일 전 세계에 생중계된 CNN과의 인터뷰에서 “4·3은 남로당이 일으킨 폭동”이라고 언급했다.  


“제주도인민의 4.3봉기와 반미애국투쟁의 강화”에 약술된 상황일지와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 나타난 상황을 비교해 보는 것은 역사연구의 한 즐거움이 될 것이다.


먼저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부터 요약하여 다음 차례에 게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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