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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宮廷で食べたユッ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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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株零下の食べ物 100年](4) 韓国の代表食べ物 ‘ユッケビビンパ’

株零下 | 韓国学中央研究員教授

入力 : 2011-03-29 21:18:19修正 : 2011-03-29 21:18:20

 

・白い米飯の上すうすうナムルと肉調和… 簡便でもっと親しい ‘韓国の味’

 1931年陽暦お正月にソウル安国洞に住むアンチァングギルは(=女) 92歳になった

13歳に昌徳宮に入って 寝房ナイン(=宮廷板前) 仕事をし始めた彼女はずっと宮で娘に生きた. 当時としては珍しい長寿なので東亜日報記者がアンチァングギルを捜した. 彼女の食性がどうだからこんなに長生きするかどうかを問うと, 甥嫁女はアンチァングギルが食性が良くて何でもよく食べるが, ユッケを含めた肉が特別に好きだと言った. その後アンチァングギルが何歳までもっと生きたのかまだ確認ができなかったが, 彼女の長寿にユッケが結構大きい功を立てた可能性が多い.

皆分かるように ユッケは薬味の中身の赤身や の間・千枚・羊なんかを刻んでいた味付けをして生で食べる 食べ物を示す. 恕宥で(1764‾1845)は <役員経済だ・情調だ>で “肉を刻んだことを刺身だと呼ぶ. 回は (回)とも言って 割(割)と言う. (中略) オセング(魚生)と陸生(肉生)を皆回だと呼ぶ”と言った. たとえゾゼサム(1808‾1866)は <ソングナムザブジ>で肉庫期で作った回を ‘膾’, 魚で作った刺身を ‘回’と書いたが概して人々は肉庫機会や御刺身を皆回だと呼んだ. ただその材料によって別に牛肉回(牛肉膾)・同値回(凍雉膾)・副会(鰒膾) なんかで区分しただけだ.

実は地球村で肉庫期や魚を飛ぶことで好んで食べる人々は多くない. 人間が ‘食べ物を料理する動物’である理由は食べ物を煮って食べるからだ. それなら朝鮮時代人々はどうして刺身を食べることにためらわなかっただろうか? さまざまな主張があり得るが, 朝鮮時代主類知識人だった性理学者たちが固く信じていた上古注意とも関連がある. 古代中国の古典である <儀礼・ゴングギョングデブリェ>には恭敬が貸し付けに食事をもてなす時特別食で愚者(牛定木)・養子(羊定木)・侍者(豕定木)・牛脂(牛脂)のような回をあげたと書かれている. たとえ明以後漢族たちは決して刺身を食べることができる食べ物だと思わなかったが, 朝鮮では食べなければならない食べ物に理解された.

このようなユッケとビビンパの出会いがすぐユッケビビンパの誕生を持って来た. ところで朝鮮後期の文献で今日ユッケビビンパと似ている食べ物を私はまだ見つ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ただ 1929年 12月1日付け雑誌 ‘ビョルゴンゴン’ 第24号に積まれた文でユッケビビンパを見つけただけだ. “おいしくて値段安い真珠ビビンパはソウルビビンパと同じく大きい故カラー店をそのままおくこととモヤシ発が三寸もなることをノングクルジなのおくこととは到底喩えることができません. 白い米飯の上に色を調和させて飛ぶような真っ青な野菜横にはワラビナムルまた横には薄黄色いぶんどう萌やしこのような方法でいろいろナムルをかけておいた後に肉を細く切って沸かしたお汁を注いで交ぜ合わせるのに適当である位その上にはガラス破片みたいな硫黄青布三四鎖をおいた後横にユッケをきれいに切っておいて口当たりがこぎれいなコチュジャンを少し上げます.”

これに延ばして少なくとも 1920年代ソウルビビンパにもユッケが上がったという点が分かる. 同時にソウルビビンパに上がった肉は刻んだユッケではなく大きい故カラー固まりだったことも上の記事は知らせてくれる. 実際に前で言及した愚者(牛定木)は山賊のように大きく切って作った可能性が多い. 定木(定木)という漢字が大きくサン肉切れを示すからだ. <役員経済だ・情調だ>でも牛肉回はまるで木の葉のように平たくサンのとそれを糸のように千切にしたのがあると言った. だからソウルビビンパにはこの頃大邱で販売されるムングティギ(ムングトングイの 地方うん)と呼ばれるユッケに似ている牛肉固まりが上がったようだ. これに比べて真珠ビビンパには細く千切ったユッケをご飯の上にあげた. 全国のどこよりもかつて 20世紀初盤に屠殺場が形成されたソウルと真珠だから可能だった事だ.

それならユッケが上がらないビビンパの姿はどうだったろうか? 1890年代に使われたハングル筆写本料理で <是議全書>ではビビンパを ‘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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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궁정에서 먹던 육회

[주영하의 음식 100년](4) 한국의 대표 음식 ‘육회비빔밥’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입력 : 2011-03-29 21:18:19ㅣ수정 : 2011-03-29 21:18:20

 

ㆍ하얀 쌀밥 위 색색 나물과 고기 조화… 간편해서 더 친근한 ‘한국의 맛’

 1931년 양력 설날에 서울 안국동에 사는 안창길은(=여자) 92세가 되었다

13세에 창덕궁에 들어가서 침방나인(=궁정 요리사) 일을 하기 시작했던 그녀는 줄곧 궁에서 처녀로 살았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장수라서 동아일보 기자가 안창길을 찾았다. 그녀의 식성이 어떠하기에 이렇게 장수하는지를 묻자, 조카며느리는 안창길이 식성이 좋아 무엇이든지 잘 먹지만, 육회를 비롯한 고기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했다. 그 이후 안창길이 몇 세까지 더 살았는지 아직 확인을 못했지만, 그녀의 장수에 육회가 제법 큰 공을 세웠을 가능성이 많다.

모두 알듯이 육회는 소의 살코기나 간·천엽·양 따위를 잘게 썰어 갖은 양념을 하여 날로 먹는 음식을 가리킨다. 서유구(1764~1845)는 <임원경제지·정조지>에서 “고기를 잘게 썬 것을 회라고 부른다. 회는 (회)라고도 하고 割(할)이라고 한다. (중략) 어생(魚生)과 육생(肉生)을 모두 회라고 부른다”고 했다. 비록 조재삼(1808~1866)은 <송남잡지>에서 육고기로 만든 회를 ‘膾’, 생선으로 만든 회를 ‘회’라고 적었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육고기회나 생선회를 모두 회라고 불렀다. 다만 그 재료에 따라서 별도로 우육회(牛肉膾)·동치회(凍雉膾)·복회(鰒膾) 따위로 구분하였을 뿐이다.

사실 지구촌에서 육고기나 생선을 날것으로 즐겨먹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인간이 ‘음식을 조리하는 동물’인 이유는 음식을 익혀서 먹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왜 회를 먹는 데 주저하지 않았을까? 여러가지 주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조선시대 주류 지식인이었던 성리학자들이 굳게 믿고 있었던 상고주의와도 관련이 있다. 고대 중국의 고전인 <의례·공경대부례>에는 공경이 대부에게 식사를 대접할 때 특별식으로 우자(牛자)·양자(羊자)·시자(豕자)·우지(牛脂)와 같은 회를 올렸다고 적혀 있다. 비록 명나라 이후 한족들은 결코 회를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여기지 않았지만, 조선에서는 먹어야 하는 음식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육회와 비빔밥의 만남이 바로 육회비빔밥의 탄생을 가져왔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문헌에서 오늘날 육회비빔밥과 비슷한 음식을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1929년 12월1일자 잡지 ‘별건곤’ 제24호에 실린 글에서 육회비빔밥을 발견했을 뿐이다. “맛나고 값 헐한 진주비빔밥은 서울비빔밥과 같이 큰 고깃점을 그냥 놓는 것과 콩나물발이 세 치나 되는 것을 넝쿨지게 놓는 것과는 도저히 비길 수 없습니다. 하얀 쌀밥 위에 색을 조화시켜서 날아가는 듯한 새파란 야채 옆에는 고사리나물 또 옆에는 노르스름한 숙주나물 이러한 방법으로 가지각색 나물을 둘러놓은 다음에 고기를 잘게 잘라 끓인 장국을 부어 비비기에 적당할 만큼 그 위에는 유리조각 같은 황 청포 서너 사슬을 놓은 다음 옆에 육회를 곱게 썰어 놓고 입맛이 깔끔한 고추장을 조금 얹습니다.”

이로 미루어 적어도 1920년대 서울비빔밥에도 육회가 올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서울비빔밥에 오른 고기는 잘게 썬 육회가 아니라 큰 고깃덩어리였음도 위 기사는 알려준다. 실제로 앞에서 언급한 우자(牛자)는 산적처럼 크게 썰어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많다. 자(자)라는 한자가 크게 썬 고기조각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임원경제지·정조지>에서도 우육회는 마치 나뭇잎처럼 넙적하게 썬 것과 그것을 실처럼 채 썬 것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 서울비빔밥에는 요사이 대구에서 판매되는 뭉티기(뭉텅이의 지방어)라고 불리는 육회와 닮은 쇠고기 덩어리가 올라갔던 모양이다. 이에 비해 진주비빔밥에는 가늘게 채를 썬 육회를 밥 위에 올렸다. 전국의 어디보다도 일찍이 20세기 초반에 도살장이 형성되었던 서울과 진주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다면 육회가 올라가지 않은 비빔밥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1890년대에 쓰인 한글 필사본 조리서 <시의전서>에서는 비빔밥을 ‘부븸밥’이라고 적고 그 만드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밥을 정히 짓고 고기는 재워 볶고 간납은 부쳐 썬다. 각색 나물을 볶아 놓고 좋은 다시마로 튀각을 튀겨서 부숴 놓는다. 밥에 모든 재료를 다 섞고 깨소금과 기름을 많이 넣어 비벼서 그릇에 담는다. 위에는 잡탕거리처럼 계란을 부쳐서 골패 짝만큼씩 썰어 얹는다. 완자는 고기를 곱게 다져 잘 재워 구슬만큼씩 빚은 다음 밀가루를 약간 묻혀 계란을 씌워 부쳐 얹는다. 장국은 잡탕국으로 해서 쓴다.”

1978년 진주 우시장의 모습. 옛날부터 대규모 우시장이 섰던 진주에서는 신선한 고기를 구하기가 쉬워 육회를 올린 비빔밥이 만들어지게 됐다.

(이 글은 후대 탄생의 비빔밥이 육회와 만났다는 이야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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