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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また見る韓国歴史]<7>付与族とブルガリ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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ブルガリアの首都ソフィア市内で眺めた南側ビトシャ山の風景. ソフィアが落ち着いたビトシャ山がバルカン山と呼ばれたことに推定される. 写真提供シン・ヨンハ教授


《付与(夫余)は韓国民族直系先祖の中で一つだ. シン・チェホはひととき韓国民族を ‘付与族’と呼ぶことさえした. 付与は古朝鮮のフグックとして遅く取ってもB.C. 5世紀から紀元後 5世紀まで約 1000余年間スングファ(松花) 川, お前は(嫩) 川流域を中心に満洲一帯で大きく活動した. 中国記録に登場する ‘付与’は ‘山海経(山海経)’の吹くよ(不与), ‘一周で(逸周書)’の部で(符婁), ‘詐欺(史記)’の付与(夫余), ‘論語与えなさい(論語注疏)’の富裕(鳧臾) などで表記する. 当時古代漢字発音で見る時これらの共通発音は短い音では ‘火’, 長い音では ‘ブル’だ. ‘ブル’はもっと長い発音で ‘富裕’でも発音される. 付与は紀元後 4世紀前半期までは東北アジアの最善誠実な人だった. 例えば, ‘三国志’偽書東夷伝付与組は ‘その国人々は体格が大きくて性質が屈強で勇ましくて …外国に出る時はビダンオッ, 刺繍した服, 毛織服をよく着て, …また金と銀で足りない飾った’と記録した.》



付与の統治組職は中央の国王の下最高貴族場として馬加(馬加), 右が(牛加), 低価(猪加), 謳歌(狗加) など色々 ‘街(加)’があって全国をそれぞれ東西南北の射出も(四出道)で分けて統治した. 豚犬牛ではなく登場する韓国民族の ‘カリウチ’は付与で由来した民俗だ. ‘街’野の中王族, 王妃を掲げるが, 一番力強い ‘街’は別に唐辛子が(古雛加)だと称した. ‘街’ 制度と故追加は高句麗でも身分制に継勝された.

○ 付与の故追加とブルガリア唐辛子不可帝国

シン・チェホは付与族の特徴は定着地に必ず ‘火’者を付けて国号を作るのに, かつて万里長城近所に移動して入って来た限り ‘付与族軍団’を追跡したがその行方を忘れてしまったと記録した.

どんなきっかけかは不明するが, 付与族の一応が 4世紀末葉西側に移動してチォワンギルを経って中央アジアのカスピ日と黒海の間 ‘カブカス’ 地方に到着した. 搖れからカスピ日まで続けるバックアンサン(白頭山)〜付与号〜バルカン山〜足カーシ号〜バルカン山の名称ベルトが付与族のチォワンギル移動を示唆してくれる. この地方はビザンチン帝国の属地であってそれに先立ち移動して来た東方民族であるアバル(Avar・柔然)族の影響の下あった. 付与族は 5〜7世紀初まで回った川良案とブックカブカスに散らばって定着した. 西洋史ではこの時から付与族が不可(Bulghar)族に記録されて出る. ‘付与(火)衣架(加)’ 族という意味に解釈される.

回った川下流, 黒海沿岸のアバル勢力が弱化されると, 635年不可族足掌クブラト(Kubrat)は不可不足連合を結成してアバル支配から独立して ‘台(大)ブルガリア(Magna Bulgaria)’を建国した. しかし建国 7年ぶりの 642年クブラト間は死亡した.

クブラトの五つ息子は激甚な権力闘いあげく別れたが長男はお父さんの席に ‘クビ不可’お吸物を樹立してからその南部を掌握したハザル(Khazar)族の支配の下入って行った. 四番目息子はパンノ−ニア平原(今のハンガリー)を尋ねてアバルゾックに服属こんにちはだった. 五番目息子はダニューブ川を渡ってビザンチン帝国に保護を求めてから結局服属こんにちはだった.

しかし二番目息子と三番目息子は最後まで外勢に服属しないで独立国家の道を歩いた. 二番目息子コトラグ(Kotrag)は北に移動して彼らが名付けたボルガ(不可・Volga) 川とカマ(雇馬・Kama) 講義合流地点に ‘唐辛子ドルが(Kotchou-Bulghar)’お吸物を建設した. コトラグの ‘唐辛子ドルが’お吸物名称は彼らが ‘唐辛子が(加)’であることを表示して, 彼らが ‘付与族’という事実の明確な証拠の一つになる. 唐辛子不可国は 7世紀から 14世紀までこの地域に定着して盛んだった. 唐辛子不可国には 922年バグダッドの使節団が到着してアラブ世界との通常が始まったが, この使節団が ‘唐辛子ドルが’お吸物をボルガ講義名称をいじめ ‘ボルガドルが(Volga Bulghar)’だと呼びながらアラブ世界にその名前と知られ始めた. ‘唐辛子ドルが’族は現在 ‘タルタル自治共和国’を樹立して集まって住むのにその言語の文法構造は韓国語と同一構造で, 形振りも混血が不十分になって東洋人(韓国人)の姿だ.

○ ブルガリアソフィアと百済サビー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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ビザンチン軍隊を攻撃する 9世紀ブルガリー我軍を形象化したビザンチン時代の記録画.


一方, 三番目息子アスパルフ(Asparukh)が導いた不可族は西側黒海沿岸を横切って 679年ダニューブ川を渡ってバルカン半島に到着した.

ビザンチン帝国のコンスタンティヌス 4歳は 680年軍隊を急派して不可族の退去を命じた. この時ビザンチンローマ君の連絡将校が不可族の軍営の中で生活しながら観察を記録して不可族の生活様式をよく分かるようになった. 不可族とビザンチン帝国ローマだね間の交渉が決裂されて 681年対決前を広げる. 不可族アスパルフ間は決戦を控えて空を向けて氏神 ‘檀君(Tangun または Tangur)’に承前を祈る提川(祭天)儀式を行ったとローマだね連絡将校は記録した.

不可族は 681年の対決前で勝利して, 定着してその年に ‘ブルガリア’ 王国を建国した. 国号 ‘ブルガリア’は ‘不可(火)族の地(Bul+garia)’という意味だ. これが古代 ‘ブルガリア第1帝国’(681〜1018年)だ. 不可族は貴族になって ‘見ると’(Boyar・‘付与’の発音である ‘富裕’の母音調和による変音)と呼ばれたし, スラブ族を農民にして治めた. ブルガリア第1帝国貴族の ‘見ると’ 呼称も彼らが ‘付与’族なのを知らせてくれる.

ブルガリア第1帝国は 9世紀初にパンノ−ニア平原まで領土を確張して対局になって, 西の方にフランク帝国と国境を接するようになった. ニケポロス 1歳のビザンチン帝国はこれを許容しないで 809年ブルガリアを攻撃してからブルガリア皇帝クルム(Krum) 間に逆襲されて惨敗した. クルム間はビザンチンローマ君のこの頃 ‘サルデ−カ’を占領したし, 811年には山脈峠で待ち伏せてからローマ君を大破してビザンチン皇帝ニケポロス 1歳が戦死した.

大勝したブルガリアのクルム間は今のバルカン半島大部分でローマ君を放逐して首都をサルデ−カで移して名前を ‘消費’(または ‘私費’, 今のソフィア)で決めたし, ‘消費’の動産に登って氏神 ‘檀君’に承前の提川祭祀をあげて, 生きた名前を ‘バルカン山’(バックアンサン, バックサン, 白山・古代韓民族が提川意識を行った山)で決めた. 筆者は 1989年ブルガリアを旅行踏査する機会があったが, ソウル北岳山のようにバルカン山は首都ソフィアに付いている高くない山だったしクルム間の提川遺跡も一部残っていた. バルカン山でバルカン山脈, バルカン半島の名称が出た. これもブルガリア第1帝国の支配層が付与族なのを証明するのだ.

付与族はどこに行くが国を建てる時はソウルを ‘消費’と呼ぶ慣習があった. 例えば付与族の一派の立てた百済が ‘河南違例性’を失って南に遷都して今の付与に首都を決めた時百済盛旺は 538年国号を南プヨ(南夫余)に変えて首都名前を ‘私費(泗=)’で決めた. ‘消費’と ‘私費’は互換される. ブルガリアのクルム間が首都を ‘消費’と称したことも不可族が付与族という重要な証拠の一つだ.

○ モンゴルまだらをおさめたブルガリア人の秘密

ブルガリア皇帝クルム間は 814年ビザンチン帝国の首都コンスタンティノープルを攻略しようとしたが病死した. 敗戦で非常に脆弱になったビザンチン帝国は危機で救出された. 後を引き継いだブルガリアの間はビザンチン帝国との平和を追い求めて長い平和の時代が来て, ブルガリアのボリス(Boris) 間は 864年にはギリシア正教を収容してキリスト教国家になった.

ブルガリア第1帝国は 11世紀たち語弱化されて今度は返ってビザンチン帝国の攻撃を受けてそのソックズに落ちた. その間少数不可族と多数スラブ族の間の混血で外形はスラブ族姿をたくさん持つようになった.

ブルガリアは 12世紀後半また独立して ‘ブルガリア第2帝国’(1186〜1330年)を樹立した. しかしこの第2帝国の支配層はもうスラブ化して第1帝国支配層とは違う姿を持つようになった.

しかしブルガリア第1帝国は東方から来た付与族が立てた国家だ. 付与族はブルガリア住民に独立と歴史に残っていて, バルカン山, バルカン山脈, バルカン半島, 消費など多数の地名で残っていてブルガリアではない文法構造で残っていて, 文化と生活様式の伝統(正月ダルジブノルが, グッコリなど)で残っていて, また赤ん坊尻のまだら(モンゴルまだら)でも残っている. 現在白人世界で赤ん坊のまだらの出る民族はただブルガリア人だけだ. その原因はブルガリア人の援助上が付与族だったからだと思う.

ブルガリアとヨーロッパ歴史学者たちは現在円(原)不可族(Proto Bulgar)がどこから来たのかわからないと諦めて, 5世紀黒海地方マグやブルガリアをその祈願にして歴史を使う. 筆者はまさにその以前の ‘願仏家族’が東方の ‘付与族’であることを初めて明らかにして強調するのだ.

シン・ヨンハ梨花アカデミー碩座教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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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한국역사]<7>부여족과 불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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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 시내에서 바라본 남쪽 비토샤 산의 풍경. 소피아가 자리 잡은 비토샤 산이 발칸 산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제공 신용하 교수


《부여(夫餘)는 한국 민족 직계 조상 중 하나다. 신채호는 한때 한국 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부르기조차 하였다. 부여는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늦게 잡아도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약 1000여 년간 쑹화(松花) 강, 넌(嫩) 강 유역을 중심으로 만주일대에서 크게 활동했다. 중국 기록에 등장하는 ‘부여’는 ‘산해경(山海經)’의 불여(不與), ‘일주서(逸周書)’의 부루(符婁), ‘사기(史記)’의 부여(夫餘), ‘논어주소(論語注疏)’의 부유(鳧臾) 등으로 표기된다. 당시 고대 한자 발음으로 볼 때 이들의 공통발음은 짧은 소리로는 ‘불’, 긴 소리로는 ‘부르’다. ‘부르’는 더 긴 발음으로 ‘부유’로도 발음된다. 부여는 기원후 4세기 전반기까지는 동북아시아의 최선진국이었다. 예컨대,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는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이 굳세고 용감하며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수놓은 옷, 모직 옷을 즐겨 입고, …또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고 기록했다.》



부여의 통치조직은 중앙의 국왕 아래 최고 귀족장으로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 여러 ‘가(加)’가 있어서 전국을 각각 동서남북의 사출도(四出道)로 나누어 통치했다. 돼지 개 소 말이 등장하는 한국민족의 ‘윷놀이’는 부여에서 유래한 민속이다. ‘가’들 가운데 왕족, 왕비를 내거나, 가장 강력한 ‘가’는 별도로 고추가(古雛加)라 칭했다. ‘가’ 제도와 고추가는 고구려에서도 신분제로 계승됐다.

○ 부여의 고추가와 불가리아 고추불가제국

신채호는 부여족의 특징은 정착지에 반드시 ‘불’자를 붙여 국호를 짓는데, 일찍이 만리장성 부근으로 이동해 들어온 한 ‘부여족 군단’을 추적했지만 그 행방을 잃어버렸다고 기록했다.

어떤 계기인지는 불명하나, 부여족의 일단이 4세기 말엽 서방으로 이동해 초원길을 거쳐 중앙아시아의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 ‘캅카스’ 지방에 도착했다. 요동부터 카스피 해까지 이어지는 밝안산(백두산)∼부여호∼발칸산∼발카시호∼발칸산의 명칭 벨트가 부여족의 초원길 이동을 시사해 준다. 이 지방은 비잔틴 제국의 속지였다가 그에 앞서 이동해 온 동방민족인 아발(Avar·柔然)족의 영향 아래 있었다. 부여족은 5∼7세기 초까지 돈 강 양안과 북캅카스에 흩어져 정착했다. 서양사에서는 이때부터 부여족이 불가(Bulghar)족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부여(불)의 가(加)’ 족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돈 강 하류, 흑해 연안의 아발 세력이 약화되자, 635년 불가족 족장 쿠브라트(Kubrat)는 불가 부족연합을 결성해 아발 지배로부터 독립해 ‘대(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했다. 그러나 건국 7년 만인 642년 쿠브라트 칸은 사망했다.

쿠브라트의 다섯 아들은 격심한 권력투쟁 끝에 헤어졌는데 큰아들은 아버지의 자리에 ‘쿠비 불가’국을 수립했다가 그 남부를 장악했던 하자르(Khazar)족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넷째 아들은 판노니아 평원(지금의 헝가리)을 찾아가 아발족에 복속하였다. 다섯째 아들은 다뉴브 강을 건너 비잔틴 제국에 보호를 구했다가 결국 복속하였다.

그러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끝까지 외세에 복속하지 않고 독립국가의 길을 걸었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Kotrag)는 북으로 이동하여 그들이 이름 붙인 볼가(불가·Volga) 강과 카마(고마·Kama) 강의 합류지점에 ‘고추불가(Kotchou-Bulghar)’국을 건설하였다. 코트라그의 ‘고추불가’국 명칭은 그들이 ‘고추가(加)’임을 표시하여, 그들이 ‘부여족’이라는 사실의 명확한 증거의 하나가 된다. 고추불가국은 7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 지역에 정착하여 번영하였다. 고추불가국에는 922년 바그다드의 사절단이 도착하여 아랍 세계와의 통상이 시작됐는데, 이 사절단이 ‘고추불가’국을 볼가 강의 명칭을 따 ‘볼가불가(Volga Bulghar)’라 부르면서 아랍 세계에 그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추불가’족은 현재 ‘타타르 자치공화국’을 수립해 모여 사는데 그 언어의 문법 구조는 한국어와 동일 구조이고, 외양도 혼혈이 덜 돼 동양인(한국인)의 모습이다.

○ 불가리아 소피아와 백제 사비성

비잔틴 군대를 공격하는 9세기 불가리아군을 형상화한 비잔틴시대의 기록화.


한편, 셋째 아들 아스파르흐(Asparukh)가 이끈 불가족은 서방 흑해 연안을 횡단해서 679년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에 도착했다.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4세는 680년 군대를 급파하여 불가족의 퇴거를 명하였다. 이때 비잔틴 로마군의 연락장교가 불가족의 군영 안에서 생활하면서 관찰을 기록하여 불가족의 생활양식을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불가족과 비잔틴 제국 로마군 사이의 협상이 결렬돼 681년 대결전을 펼친다. 불가족 아스파르흐 칸은 결전을 앞두고 하늘을 향해 조상신 ‘단군(Tangun 또는 Tangur)’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祭天)의식을 행했다고 로마군 연락장교는 기록했다.

불가족은 681년의 대결전에서 승리하고, 정착하여 그해에 ‘불가리아’ 왕국을 건국했다. 국호 ‘불가리아’는 ‘불가(불)족의 땅(Bul+garia)’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고대 ‘불가리아 제1제국’(681∼1018년)이다. 불가족은 귀족이 돼 ‘보야’(Boyar·‘부여’의 발음인 ‘부유’의 모음조화에 따른 변음)라고 불렸으며, 슬라브족을 농민으로 삼아 다스렸다. 불가리아 제1제국 귀족의 ‘보야’ 호칭도 그들이 ‘부여’족임을 알려 준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9세기 초에 판노니아 평원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대국이 되어서, 서쪽으로 프랑크 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됐다. 니케포로스 1세의 비잔틴 제국은 이를 허용하지 않고 809년 불가리아를 공격했다가 불가리아 황제 크룸(Krum) 칸에게 역습당해 참패했다. 크룸 칸은 비잔틴 로마군의 요새 ‘사르디카’를 점령했으며, 811년에는 산맥 고개에서 매복했다가 로마군을 대파해 비잔틴 황제 니케포로스 1세가 전사했다.

대승한 불가리아의 크룸 칸은 지금의 발칸 반도 대부분에서 로마군을 추방하고 수도를 사르디카로 옮겨 이름을 ‘소비’(또는 ‘사비’, 지금의 소피아)로 정했으며, ‘소비’의 동산에 올라 조상신 ‘단군’에게 승전의 제천 제사를 올리고, 산 이름을 ‘발칸 산’(밝안산, 밝산, 白山·고대 한민족이 제천의식을 행한 산)으로 정하였다. 필자는 1989년 불가리아를 여행 답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서울 북악산처럼 발칸 산은 수도 소피아에 붙어 있는 높지 않은 산이었으며 크룸 칸의 제천 유적도 일부 남아 있었다. 발칸 산에서 발칸 산맥, 발칸 반도의 명칭이 나왔다. 이것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지배층이 부여족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부여족은 어디를 가나 나라를 세울 때는 서울을 ‘소비’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예컨대 부여족의 일파가 세운 백제가 ‘하남위례성’을 잃고 남쪽으로 천도해 지금의 부여에 수도를 정했을 때 백제 성왕은 538년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꾸고 수도 이름을 ‘사비(泗=)’로 정했다. ‘소비’와 ‘사비’는 호환된다. 불가리아의 크룸 칸이 수도를 ‘소비’라고 호칭한 것도 불가족이 부여족이라는 중요한 증거의 하나이다.

○ 몽고반점을 간직한 불가리아인의 비밀

불가리아 황제 크룸 칸은 814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려다가 병사했다. 패전으로 매우 취약해진 비잔틴 제국은 위기에서 구출됐다. 뒤를 이은 불가리아의 칸은 비잔틴 제국과의 평화를 추구해 긴 평화의 시대가 오고, 불가리아의 보리스(Boris) 칸은 864년에는 그리스정교를 수용하여 기독교국가가 됐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11세기들어 약화되어 이번에는 도리어 비잔틴 제국의 공격을 받고 그 속주로 떨어졌다. 그 사이 소수 불가족과 다수 슬라브족 사이의 혼혈로 외형은 슬라브족 모습을 많이 갖게 됐다.

불가리아는 12세기 후반 다시 독립하여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년)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제2제국의 지배층은 이미 슬라브화하여 제1제국 지배층과는 다른 모습을 갖게 됐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1제국은 동방에서 온 부여족이 세운 국가이다. 부여족은 불가리아 주민에게 독립과 역사로 남아 있고, 발칸 산, 발칸 산맥, 발칸 반도, 소비 등 다수의 지명으로 남아 있으며 불가리아 말 문법 구조로 남아 있고, 문화와 생활양식의 전통(정월 달집놀이, 굿거리 등)으로 남아 있으며, 또 갓난아기 엉덩이의 반점(몽고반점)으로도 남아 있다. 현재 백인 세계에서 갓난아기의 반점이 나오는 민족은 오직 불가리아인뿐이다. 그 원인은 불가리아인의 원조상이 부여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가리아와 유럽 역사학자들은 현재 원(原)불가족(Proto Bulgar)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고 단념하고, 5세기 흑해지방 마그나 불가리아를 그 기원으로 삼아 역사를 쓴다. 필자는 바로 그 이전의 ‘원불가족’이 동방의 ‘부여족’임을 처음으로 밝히고 강조하는 것이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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