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まだ戦犯酋長の奴隷猿たちに啓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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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皇 ヒロヒトは卑怯な 戦犯だ

離韓数記者 hslee@chosun.com 記者の他の記事表示

入力 : 2010.10.08 21:45
 

ヒロヒト 評伝
ホボトビックス作|呉賢淑翻訳 | 麻である|944ページ|3万5000ウォン

 

実際では戦争に積極的… 彼が ¥"力無い君主¥"に変わったのはマッカーサー司令官の政策のため
天皇 ヒロヒト(裕仁・1901‾1989)は 2次世界大戦が日本の敗北で終わった後にも 1946年東京戦犯裁判に起訴されなかった. 日本陸軍と海軍が主導した侵略戦争で彼は受動的に引かれて行った力無い君主だっただけというのが理由だった. これが現在日本人たちが持っている一般的な認識でもある.

しかしアメリカハーバード大博士で 30余年間日本史を専攻して日本ヒトスバシデ教授も勤めたホボトビックス(72) アメリカビングヘムトンデ教授はこのような ¥"常識¥"は完全に虚構だと指摘する. 彼は満州の変から中・日戦争で, そして太平洋戦争につながる日本の侵略戦争拡大過程で ヒロヒトは戦争に同意して死後在宅するとか主要局面で積極的で主導的な役目をしたと主張する.


▲ 若い時代の天皇 ヒロヒト.
満州の変は初めには ヒロヒトの在宅なしに起きた. 1931年 9月 18日関東軍は日本が運営する南まんしゅう鉄道路線をわざわざ爆破する自作劇を通じて満洲侵略を本格化した. 事件直後関東軍司令官混調シゲで(本庄繁)は独断的に攻撃命令を下してください戦略拠点たちを掌握した. 引き続き関東軍は朝鮮駐屯軍が鴨緑江を越えて満洲で増援部隊を送るようにしてくれと言って東京参謀本部に要請した. この問題に対して 3日後東京で内閣会議が開かれている時朝鮮駐屯軍司令官Hayashiセンジュで(林銑十郎) も独断で部隊に国境を越えることを言い付けた. 参謀総長ガーナなの一組(金谷範三)は即時 ヒロヒトに現地司令官が裁量権を発揮してこのような事が起こったと報告した. ¥"大元帥¥"である天皇の統帥権を侵害した事に対して ヒロヒトは今度は仕方ないがこれから気を付けなさいと言った.

 

 しかし以後続いた勝利の消息に鼓舞された ヒロヒトはもし必要だったら私は事件が拡がるのに同意することもできると言った. 翌年には ¥"勅語(勅語)¥"を通じて黄君(皇軍)の威力に付きなさい内外に宣揚したと関東軍を誉めて, 以後数年の間満州の変に功績がある軍人及び管理 3000人に勲章を与えて昇進させた.

中・日戦争は ヒロヒトが積極的に主導した戦争だった. 戦争のきっかけになった老身校(蘆溝橋)事件は満州の変の時のように現地部隊長の独断で勃発した. しかし ヒロヒトはこれを死後在宅して中国軍を戒めて主要地域を安定させるのに臨みなさいという勅命を下げた. 国際法に禁止された化学武機使用を指示したことも ヒロヒトだった. 彼は 1937年 7月 28日化学武機使用を初めて許可したし, 宮廷に設置した ¥"大本営¥"を通じて毒ガス使用を 375回以上許可した.

 

ハワイ晋州だけ空襲は ヒロヒトの作品だと言っても度が外れない. ヒロヒトは 1941年 10月強硬な対米(対美) 戦争論者である東條英機(東條英機)を受賞に任命した. 開戦(開戦)を反対した専任受賞河野に(近衛)は後日こんなに述懐した. 私が総理大臣で陛下に開戦の不利さを申し上げるとそれに賛成してから, 翌日御前に出るとちょっと戦争の方で傾いた. その次にはもっと戦争では方で傾いた. 唯一のしんばり棒である陛下がこんなにNaoshiだから到底どうしてやって見る道理がなかった.

 

ヒロヒトが以前(終戦) 後 ¥"君臨するが統治しない¥" イギリス式立憲君主のように自分を包装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ことは東京に真珠(進駐)一連合国総司令部(GHQ) マッカーサー司令官の占領政策ときっかりあったからだ. マッカーサーはすべての日本人は天皇を信頼しているので心理戦で彼らの信頼を逆利用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判断した. マッカーサーはワシントンに天皇は日本人統合の象徴だ. 彼を起訴すればおびただしい混乱が起きるでしょう. 天皇をぶっ壊せば充分に 100万軍隊が必要だろって, その軍隊を無期限維持しなければならないはずだと報告した.

 

著者は当時文書と主要人物たちの日記及び回顧録など膨大な資料を渉鮮して断固たる評価を下す. ヒロヒトは日本帝国の膨脹を主導したし 2000万名近いアジア人, 310万名が越える日本人, そして 6万名が越える連合国人々の命を奪いとられた戦争で国家を駆って行った. 彼は幾多の命を奪いとられた侵略戦争を起こした罪を一番(回)も認めなかった. 彼は近代の君主の中一番率直ではない人物の数に入った.

 

が本は日本の良心的知識人で日帝の侵略戦争を強く批判しながらも天皇は戦争状況をまともに報告を受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受動的に引かれて行ったと思う限度がズトシ(半藤一利)の ¥"昭和社¥"(ルヒーボックス)と比べて見ることもよさそうだ. 事実(fact)に対する評価がこんなに明らかにするように変わることは日製が敗戦当時戦争関連主要文書を皆廃棄したことも一理由であるでしょう. ヒロヒトは 11歳の時から日記を書いたと伝わる. しかし ¥"ヒロヒト 日記¥"は日本宮内庁に非公開に所長されているし一番(回)も公開された事がない.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0/08/2010100802141.html

過去の歴史を教訓にして発展する韓国

 

まだ過去を清算することができない倭寇

 

こんな車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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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전범 추장의 노예원숭이들에게 계몽

"일왕 히로히토는 비겁한 戰犯이다"

이한수 기자 hslee@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입력 : 2010.10.08 21:45
 

히로히토 평전
허버트 빅스 지음|오현숙 옮김 | 삼인|944쪽|3만5000원

 

"실제로는 전쟁에 적극적… 그가 "힘없는 군주"로 바뀐 건 맥아더 사령관의 정책 때문"
일왕 히로히토(裕仁·1901~1989)는 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배로 끝난 후에도 1946년 도쿄 전범재판에 기소되지 않았다. 일본 육군과 해군이 주도한 침략전쟁에서 그는 수동적으로 끌려간 힘없는 군주였을 뿐이라는 게 이유였다. 이것이 현재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인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 하버드대 박사로 30여년간 일본사를 전공하고 일본 히토쓰바시대 교수도 지낸 허버트 빅스(72) 미국 빙햄튼대 교수는 이 같은 "상식"은 완전히 허구라고 지적한다. 그는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그리고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침략전쟁 확대 과정에서 히로히토는 전쟁에 동의하고 사후 재가하거나 주요 국면에서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 젊은 시절의 일왕 히로히토.
만주사변은 처음엔 히로히토의 재가 없이 일어났다.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은 일본이 운영하는 남만주철도 노선을 일부러 폭파하는 자작극을 통해 만주 침략을 본격화했다. 사건 직후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本庄繁)는 독단적으로 공격 명령을 내려 주요 전략 거점들을 장악했다. 이어 관동군은 조선 주둔군이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증원부대를 보내게 해달라고 도쿄 참모본부에 요청했다. 이 문제에 대해 3일 후 도쿄에서 내각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조선 주둔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 역시 독단으로 부대에 국경을 넘을 것을 명령했다. 참모총장 가나야 한조(金谷範三)는 즉시 히로히토에게 현지 사령관이 재량권을 발휘해 이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보고했다. "대원수"인 일왕의 통수권을 침해한 일에 대해 히로히토는 "이번에는 어쩔 수 없으나 앞으로 주의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 계속된 승전보에 고무된 히로히토는 "혹시 필요하다면 나는 사건이 확대되는 데 동의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듬해에는 "칙어(勅語)"를 통해 "황군(皇軍)의 위력을 나라 안팎에 선양했다"고 관동군을 칭찬하고, 이후 수년 동안 만주사변에 공적이 있는 군인 및 관리 3000명에게 훈장을 주고 승진시켰다.

중·일전쟁은 히로히토가 적극적으로 주도한 전쟁이었다. 전쟁의 계기가 된 노구교(蘆溝橋)사건은 만주사변 때처럼 현지 부대장의 독단으로 발발했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이를 사후 재가하고 "중국군을 응징하고 주요 지역을 안정시키는 데 임하라"는 칙명을 내렸다. 국제법에 금지된 화학무기 사용을 지시한 것도 히로히토였다. 그는 1937년 7월 28일 화학무기 사용을 처음 허가했고, 궁중에 설치한 "대본영"을 통해 독가스 사용을 375차례 이상 허가했다.

 

하와이 진주만 공습은 히로히토의 작품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히로히토는 1941년 10월 강경한 대미(對美) 전쟁론자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수상에 임명했다. 개전(開戰)을 반대했던 전임 수상 고노에(近衛)는 훗날 이렇게 술회했다. "내가 총리대신으로 폐하께 개전의 불리함을 말씀드리자 그것에 찬성하셨다가, 다음날 어전에 나가자 약간 전쟁 쪽으로 기울어지셨다. 그다음에는 더욱 전쟁론 쪽으로 기울어지셨다. 유일한 버팀목이신 폐하가 이렇게 나오시니 도저히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히로히토가 종전(終戰) 후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 영국식 입헌군주처럼 자신을 포장할 수 있게 된 것은 도쿄에 진주(進駐)한 연합국총사령부(GHQ) 맥아더 사령관의 점령정책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모든 일본인은 천황을 신뢰하고 있으므로 심리전에서 그들의 신뢰를 역이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맥아더는 워싱턴에 "천황은 일본인 통합의 상징이다. 그를 기소하면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천황을 망가뜨리면 족히 100만 군대가 필요할 것이고, 그 군대를 무기한 유지해야 할 것이다"고 보고했다.

 

저자는 당시 문서와 주요 인물들의 일기 및 회고록 등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고 단호한 평가를 내린다. "히로히토는 일본 제국의 팽창을 주도했으며 2000만명 가까운 아시아인, 310만명이 넘는 일본인, 그리고 6만명이 넘는 연합국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으로 국가를 몰고 갔다. 그는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침략전쟁을 일으킨 죄를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근대의 군주 가운데 가장 솔직하지 못한 인물 축에 들었다."

 

이 책은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을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일왕은 전쟁 상황을 제대로 보고받지 못했고 수동적으로 끌려갔다고 보는 한도 가즈토시(半藤一利)의 "쇼와사"(루비박스)와 비교해서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사실(fact)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극명하게 갈리는 것은 일제가 패전 당시 전쟁 관련 주요 문서를 모두 폐기한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히로히토는 11세 때부터 일기를 썼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히로히토 일기"는 일본 궁내청에 비공개로 소장되어 있으며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0/08/2010100802141.html

과거의 역사를 교훈삼아 발전하는 한국

 

아직도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는 왜구

 

이런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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