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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亡びると全財産独立運動に使った ¥"大金持ち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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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家保勳処(処長バックスングツン)は満洲地方に韓人自治機構である耕学社(耕学社)を組織して新興講習所(新興講習所. 新興無関学校)を設立して独立軍幹部 3,000余人を養成するなど一生を独立運動に献身した ‘友党泥灰営繕生殉国 79週期追慕式’が 17日午後 2時にソウル中区南倉洞同上教会で右党泥灰営繕生記念事業会(会長洪イルシク) 主観で開かれると 16日明らかにした.

追悼行事は苗率ソウル北部報勳支庁長, アンホングスン光復会副会長, 金英宗鍾路区庁長, ツェチァングシック中区庁長, 遺族代表でイギュドング(子), 李鍾賛(孫子) 前国政院長, イゾングゴル(孫子) 国会議員, 光復会員など 400余人が参加した中に 1部追慕礼拜, 2部追慕式及び奨学金授与式, 3部追慕音楽会につながる.

友党奨学会(理事長ユンザングスン)では毎年友党先生の殉国与えるのに合わせて奨学金を支援して来た. 今年殉国 79週期に迎えユンズヨン愛国志士(‘90年愛族場)の孫ユンゼファン(韓国外国語大) 学生など独立有功者子孫 52人に 5,000万ウォンの奨学金を伝達する.

イフェヤング先生は述べた言葉吏曹判書を執り行なった理由僧衣 4男だ. 日製に国が亡びると楽な生活と莫大な財産を厭って独立運動に身を投げた.

1910年友党先生家族たちは当時国内で指折り数えられるほどに多かった財産を処分して 6兄弟 40人家族と一緒に中国に亡命して独立運動を始めた. 友党先生の兄弟たちは皆独立運動することに積極賛成, 財産を処分した後中国に発った.

この時急に処分した財産は当時 40万ウォン. これを現在価値に換算すれば約 600億ウォンに達する. 家一軒が 100ウォン, 米一俵が 3ウォンだった時代の国民生活水準とともに考慮すれば国内 10大財閥が持ったお金と同じだった.

友党先生家族たちはこの財産を完全に独立運動に使う. 1910年春新民会など国内活動が難しくなると満洲柳河県三元補追加場(鄒家荘)に定着した友党先生は 1912年移住同胞たちのための自治機構 ‘耕学社’を組織して, 独立軍養成のために ‘新興講習所’を設立した.

1919年 31独立運動が起きた時は上海臨時政府樹立に参加して臨時の庭園議員に選出された. 1924年 4月リュザミョングイウルギュバックゾングギなどとともに ‘在中国アナーキスト連盟’を組職, <正義公報>を発行したりした.

1928年 7月南京で開かれた韓中日フィリピン台湾ベトナムなどのアナーキストたちが集まった ‘東方アナーキスト連盟’ 結成式場では ‘韓国の独立運動と無政府注意運動’というメッセージを送って韓国独立運動を積極支援してくれるのを訴えたし, 1931年ゾングヘリギムグァンズなどが中心になって組織した南画韓人青年連盟と関係を結んで独立運動を展開した.

友党先生家の財産は独立運動をして日増しに減る. 友党先生は財産がすべて消える前 1932年独立運動勢力を合わせて, 自分は満洲駐屯日本軍司令官を暗殺するために満洲に行った途中日製警察に逮捕して顧問を受けて玉の中で殉国した.

友党先生の家族たちも極甚な苦痛を経験した. 兄弟の中で一番財産が多かった李石英先生は満洲で飢え死にした. 6兄弟の中で光復の時まで生き残った五番目李始栄先生は大韓民国招待副統領に就任する.

政府では友党先生の手柄を称えて 1962年建国勳章独立場を追書こんにちはだった.


 

民主党イゾングゴル議員すごい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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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망하자 전재산 독립운동에 쓴 "갑부"집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만주지방에 한인 자치기구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 3,000여 명을 양성하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우당 이회영선생 순국 79주기 추모식’이 17일 오후 2시에 서울 중구 남창동 상동교회에서 우당 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회장 홍일식) 주관으로 열린다고 16일 밝혔다.

추모행사는 모종률 서울북부보훈지청장, 안홍순 광복회 부회장, 김영종 종로구청장, 최창식 중구청장, 유족대표로 이규동(子), 이종찬(孫子) 前국정원장, 이종걸(孫子) 국회의원, 광복회원 등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부 추모예배, 2부 추모식 및 장학금 수여식, 3부 추모음악회로 이어진다.

우당장학회(이사장 윤장순)에서는 매년 우당 선생의 순국 주기에 맞추어 장학금을 지원해 왔다. 올해 순국 79주기를 맞아 윤주연 애국지사(‘90년 애족장)의 손자 윤재환(한국외국어대) 학생 등 독립유공자 후손 52명에게 5,000만 원의 장학금을 전달한다.

이회영 선생은 한말 이조판서를 지내던 이유승의 4남이다. 일제에 나라가 망하자 편안한 생활과 막대한 재산을 마다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0년 우당 선생 가족들은 당시 국내에서 손꼽힐 정도로 많던 재산을 처분해 6형제 40명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우당 선생의 형제들은 모두 독립운동 하는 것에 적극 찬성, 재산을 처분한 뒤 중국으로 떠났다.

이때 급하게 처분했던 재산은 당시 40만 원. 이를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약 600억 원에 달한다. 집 한 채가 100원, 쌀 한 가마니가 3원이던 시절의 국민생활수준과 함께 고려하면 국내 10대 재벌이 가진 돈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당 선생 가족들은 이 재산을 온전히 독립운동에 쓴다. 1910년 봄 신민회 등 국내활동이 어려워지자 만주 유하현 삼원보 추가장(鄒家莊)에 정착한 우당 선생은 1912년 이주 동포들을 위한 자치기구 ‘경학사’를 조직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해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됐다. 1924년 4월 류자명이을규백정기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 연맹’을 조직, <정의공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1928년 7월 남경에서 열린 한중일필리핀대만베트남 등의 아나키스트들이 모인 ‘동방 무정부주의자 연맹’ 결성식장에서는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운동’이라는 메시지를 보내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였으며, 1931년 정해리김광주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남화한인청년연맹과 관계를 맺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우당 선생 집안의 재산은 독립운동을 하며 날이 갈수록 줄어든다. 우당 선생은 재산이 다 사라지기 전 1932년 독립운동 세력을 모으고, 자신은 만주 주둔 일본군사령관을 암살하기 위해 만주로 가던 중 일제경찰에 체포돼 고문을 받다 옥중에서 순국했다.

우당 선생의 가족들 또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형제 중 가장 재산이 많았던 이석영 선생은 만주에서 굶어죽었다. 6형제 중 광복 때까지 살아남은 다섯째 이시영 선생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취임한다.

정부에서는 우당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민주당 이종걸 의원 대단한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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