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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地の収奪 (批判で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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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수탈 (비판론)

Ⅱ. 토지의 수탈 

1910년 8월 한반도를 식민지로 장악한 일제는 이후 8년간 ‘토지조사사업’(이하 ‘사업’으로 약칭)을 실시하여 식민지 지배를 위한 제도적 기초를 정비한다. 국사 교과서는 일제가 이 ‘사업’을 통해 대량의 토지를, 구체적으로는 전국 농토의 40%를, 사기와 폭력으로 수탈하였다고 가르쳐 왔다. 그런데 해방 후의 국사 교과서가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점에 예의(銳意)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사 교과서가 ‘사업’에 관해 최초로 쓰기 시작한 것은 살펴 본 한에서 1956년 이병도에 의해 집필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이다. 해당 서술의 취지를 내 나름으로 요약하고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李丙燾 1956: 185-186). 


① 구래의 토지제도는 국유제의 명목 하에 사유권이 성립하지 않은 상태에서 양반은 수조권(收租權)을, 농민은 경작권을 가지고 있었다. 
② 이러한 상태에서 일제는 신고의 방식으로 소유권을 조사하였다. 
③ 주로 소유권을 신고한 자는 수조권자인 양반으로서 그들은 대토지소유자가 되었다.
④ 그 결과 농민들은 경작권을 상실하고 소작농이 되었다.
⑤ 한편 궁원(宮院)과 관청의 토지는 정책적으로 국유지가 되었다. 
⑥ 소유권이 애매한 부락의 공유지도 신고가 이루어지지 않아 국유지로 되었다. 
⑦ 국유지로 된 토지는 동척(東拓)이나 일본인 농장의 토지로 집중되었다.  


‘사업’에 관한 이병도의 이 같은 서술은 1933년에 나온 박문규의 논문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朴文圭 1933). ‘사업’에 관한 학술연구로서는 최초라 할 수 있는 박문규의 논문은 이후 1970년대까지 그 학술적 중요성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그 내용을 잠시 소개하면, ‘사업’ 이전 조선의 토지제도는 국유제로서 양반은 수조권을, 농민은 경작권을 보유하였다. 일제가 소유권을 신고하게 하자 수조권자로서 세력 있는 양반이 소유권을 인정받고, 신고할 능력이 없는 농민들은 경작권을 상실하여 무권리의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바로 이 점이 ‘농촌사회의 근대적 분화의 기점’으로서 ‘사업’이 지닌 역사적 의의라는 것이 박문규 논문의 핵심이다. 박문규의 논문에서 일제가 국유지로 수탈한 토지는 전체의 1/40 정도로서 그렇게 차지해도 좋을 만한 구래의 궁원과 관청의 토지에 제한되어 있다. 박문규의 논문에서 일제는 토지의 수탈에 그리 관심을 둔 존재가 아니었다. 그의 논문에서 일제는 토지의 사유제(私有制)를 창출함으로써 구래의 조선사회를 자신의 영토로 영구히 편입시키기에 적합한 구조로 강력히 재편하고자 했던 외래권력일 뿐이었다.  
이상과 같은 박문규의 논문을 이병도는 그의 국사 교과서에서 충실히 요약하고 있다. 그 역시 일제의 토지 수탈을 강조할 의도로 교과서를 쓰지는 않았다. 물론 그런 의도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앞서 소개한 대로 부락의 공유지에 관해 이병도는 그것이 국유지로 수탈되었다고 하였는데, 박문규의 논문에서 그것은 부락의 세력 있는 지주들이 차지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이병도는 국유지로 된 토지가 동척이나 일본인 농장으로 집중되었다고 했는데, 이런 지적도 박문규의 논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후 ‘사업’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에서 밝혀진 바이지만, 일제가 부락의 공유지를 국유지로 수탈하거나 국유지를 일본인 회사에 불하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金鴻植 외 1997: 23-24, 528-530). 그럼에도 그 같은 오해가 지금까지 국사 교과서에서 되풀이 되어 온 것은 이병도가 그 단초를 제공하였던 셈이다. 그 점에 관한 한, 이병도 역시 해방 후 10여 년간 서서히 형성되어 온 일제가 토지를 수탈하였다는 신화에 이미 일부 포섭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1933년 박문규의 논문에서 일제의 토지 수탈에 관한 지적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오늘날의 국사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이 걸출했던 맑스주의 경제학자의 관찰력이 부족해서 그러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식민지기에 작성된 일제에 대한 가장 과격한 비판의 하나로서 신채호(申采浩)의 「조선혁명선언」을 들 수 있다. ‘사업’ 직후인 1923년에 쓰인 이 선언은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 천택(川澤), 철도, 광산, 어장 …… 내지 소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라고 일제의 수탈상에 대한 격렬한 비판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기묘하게도 토지=농지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신채호처럼 ‘사업’을 직접 경험하거나 목도한 당대인들에게 일제가 농지를 수탈했다는 의식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병도 역시 그 시기를 유년기로 보낸 사람이었다. 1926년 이상화(李相和) 시인이 “지금의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노래하였지만, 그것은 삼천리 강산 전체를 빼앗긴 시인의 슬픔이었지, 결코 문자 그대로 ‘들’만을 가리키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해방과 더불어 일제가 토지를 수탈했다는 이야기는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또는 글에서 심심찮게 언급되기 시작하였다(金鴻植 외 1997: 22∼26). 그 산발적인 이야기가 권위 있는 학술 논문으로 집성된 것은 1955년 이재무에 의해서였다. 남로당원 출신의 이 젊은 혁명가는 일본 도쿄대학으로 건너가 지금까지 ‘사업’에 관한 국사쓰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한 논문을 작성하였다. 거기서 그는 선배 박문규가 ‘사업’의 수탈성을 고발하지 않은 것은 일제의 탄압 때문이라고 한 다음, 일제가 ‘사업’에서 소유권 조사방식으로 채택한 신고가 실은 거대한 음모와 사기였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소유권 관념이 희박하고 까다로운 행정절차에 익숙하지 않은 많은 농민들이 신고기한을 놓쳤다. 그 광대한 토지는 총독부의 국유지로 몰수되거나 그것을 대리 신고한 악덕 지주의 차지가 되었다(李在茂 1955).” 이재무가 이 파천황(破天荒)의 새로운 주장을 펼칠 때 그에 합당한 사료나 사례를 하나라도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는 ‘사업’에 관한 일제의 공식 보고서에서 소유권이 신고된 대로 사정(査定)된 비중이 전 필지의 99.5%나 됨을 두고 대리 신고가 얼마나 성행하였으면 그 같이 높은 수치가 나왔겠는가라는 식으로, 말하자면 공식 보고서의 행간(行間)을 자의적으로 뒤집는 방식으로, 자신의 추론을 뒷받침하였을 뿐이다.
이 실증적 근거가 허소하기 짝이 없는 논문이 이후 한국 역사학자들의 국사쓰기에 미친 커다란 영향은 그 무엇으로 설명되기 힘든 복잡하고 미묘한 면이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구종주국이었던 일본의 최고학부인 도쿄대학이 그 학술적 가치를 인정하였다는 점도 그 복잡 미묘함의 한 가닥을 이루었을 터이다. 국사 교과서에 대한 이재무의 영향력이 명확히 관찰되는 것은 1962년 역사교육연구회에 의한 중등국사 교과서에서이다. 동 교과서의 ‘사업’에 관한 기술은 다음과 같다(역사교육연구회 1962: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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