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이전의 일본서기의 기록은 사실적 사료적 근거가 전혀 없는 황당한 기록으로 일관되어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
또한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 통치 기간동안
삼한지역의 유물이나 유적에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할 어떤 사료도 발굴되지 않았고,
오히려 삼한사회가 독자적으로 발전한 지속성을 입증하는 유물들이 지속적으로 발굴되는 등의 이유를 들어 일본의 임나지배설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에써져있는 글은 23가지로 해석할수있는데 그중하나가 임나일본부설이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자료는 아래 4가지를 들 수 있다.
1) 일본서기의 신공황후조 49년등의 기사.
2)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신묘년 기사.
3) 칠지도 명문.
4) 송서(宋書) 왜국전에 나오는 왜왕의 작호 기사.
쓰에마츠의 남선경영론은 1960년대까지 고대한일관계사의 통설적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더 이상의 생명력을 잃고 있다. 그 이유는 위 4가지 근거 자료의 신빙성 및 해석에 대한 의문점 제기가 활발히 진행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의 사료로서의 약점은 우선 편찬목적이 순수 역사서가 아니라 일본왕가를 미화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당히 조작이 가해졌다고 보이며 일본 학계에서도 5C이전의 기록에 대해서는 사료로서의 자격이 부적합함을 인정하고 있다. 이제 차근차근히 일본서기의 임나 관련 기사에 있는 모순점을 알아보자.
첫 번째 문제로 신공황후가 한반도 남부의 평정을 완료하였다고 하는 4세기 중반 당시엔 해외지역을 평정할 만큼의 강력한 군주가 일본서기를 제외한 사서에는 그 존재를 찾아볼 수 조차 없다. 심지어 일본서기와 함께 일본 최고의 역사서라고 하는 고사기에서도 말이다. 한 나라가 자기 나라외에도 다른 영토에 지부와 비슷한 식민지를 두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자랑스러운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왜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것일까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문제는 신공황후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이다. 신공황후는 누구인가? 신공황후는 일본학계에서 실질적으로 최초의 "왜" 지배자로 인정받는 응신천황의 어머니이다. 그 이전의 인물들은 대개 응신천황의 초기업적을 따와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신공황후의 실존자체가 의심 받는 이유는 어머니와 아들인 신공황후와 응신천황의 시간 공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때문에 신공황후의 재위기간도 비정상적으로 길다. 뿐만 아니라 응신천황을 최소 100살은 넘어 낳았다는 비상식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신공황후의 연대를 2주갑(120년)을 더해서 해석하는 2주갑 인상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신공 49년이 산술적 수치인 249년이 아닌 369년이 된 것이다. 이렇게 시간대를 변형시킴으로써
백제의 근초고왕과 연합하여 가야7국을 평정하였다는 기사의 인과관계를 성립시키려 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그 연도가 어긋나버리는 근초고왕 이전의 백제왕들, 즉 1대 온조왕부터 12대의 계왕까지는 허구적 인물이 되버리게 되고 실제로 일본측에서는 이 왕들을 허구의 인물로 규정지어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삼국사기의 초기기록 전체를 불신해야 되는 무리를 낳게 된다. 신공황후의 존재 시기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로 신공황후조 52년에 등장하는 "칠지도"는 그 명문에 나타난 "태화 4년"이라는 연호가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다. 현재의 주장으로는 세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3세기의 위(魏)의 연호이고, 또 하나는 4세기의 동진(東晋)의 연호이며, 마지막으로 재야사학계에서 주장하는 백제의 연호이다. 현재 일본측에서는 "태화 4년"을 동진의 연호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야 신공황후의 4세기 임나정벌을 뒷받침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4세기의 동진은 전성기를 구가하던 근초고왕의 백제가 그 연호를 빌려와서 칠지도에 새겨줄만큼 강력한 국가가 아니었다. 백제가 연호를 사용했음을 증명할 길이 없으니 접어두기로 하면 가장 신빙성 있는 주장은 3세기의 위의 연호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위에 설명한 2주갑 인상설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신공황후의 연대를 3세기로 맞출 수 있다. 연표를 분석하다 보면 여기서 신기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2주갑 인상을 하지 않은 신공황후의 사명연대가 3세기 위지 왜인전과 삼국사기 신라기에 나타나는 이름이 알려진 일본 최초의 왜 여왕 히미코의 사망연대와 일치 한다는 것이다. 신공황후가 일본서기를 제외한 타국가의 역사서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신공황후가 히미코와 동일인물일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세 번째 문제는 4세기의 일본의 유물에는 고대왕국의 기반이 되는 말(馬)과 관련된 유물이 없다는 것이다. 인구도 매우 적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고학적으로는 한반도와 거의 백년 정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5세기 이후에는 그 변화가 뚜렷하여 일본열도 내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케 할 뿐이다. 또한 일본 최초의 중앙집권정부인 야마토 정권은 6세기에 들어서야 등장하며, 내란도 정립되지 못한 나라가 해외 원정을 계획하여 성공한다는 것은 신빙성이 없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문으로 기술된 일본서기 원문 내용을 기존 연구자들이 잘못 번역한 곳들이 있고, 이에 따라서 도출되는 결과마저 엉뚱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은 물론, 심한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왜곡 번역하거나 원문에도 없는 내용을 마음대로 끼워 넣기도 하고, 원문의 뜻과는 전혀 반대로 해석하는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이렇듯 《일본서기》의 임나 관계기사들은 신빙성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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