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제 동성왕 ---> 일본서기에 安康天皇, 武列天皇의 사건으로 기록
[삼국사기] 백제本記 東城王
東城王은 諱가 牟大니 文周王의 아우昆支의 아들이었다.
[일본서기]雄略天皇 23년
(天皇은 )昆支王의 5人의 아들 중, 第 2 末多王(=東城王)이......
[일본서기]安康天皇
穴穗천황(=安康天皇)은 允恭天皇의 第 2子다.
[일본서기]武列天皇 4年
이 해 백제의 末多王(=東城王)이 無道하여 백성에게
포학한 짓을 하였다.
[일본서기]무열천황 8년
(武列天皇이) 여자를 발가벗겨 판자 위에 앉히고, 말을
끌고 앞으로 가서 교접을 시켰다.
[삼국사기]백제本記 東城王
처음 왕(=東城王)이 白加로써 加林城에 鎭戍하게 하였던 바 加는 가려고
하지 않고 病을 이유로 사퇴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이 때문에 加는 왕을 원망하던 중 이에 이르러 왕을 칼로
찔렀던 것이다.
[일본서기]雄略天皇 3년
안강천황은 황후의 무릎을 베고 낮잠을 잤다. 그래서 眉輪王은
그 깊이 잠든 것을 보고 (천황을) 칼로 찔러 죽였다.
[일본서기]武列天皇 4년
國人이 (東城王)을 제거하고, 島王을 세웠다.
[일본서기] 武列天皇 4년
百濟新撰에 말하였다. 武寧王이 섰다. 諱는 斯麻王이다. 이는 昆支王子의 아들
(실은 昆支의 兄 蓋鹵王의 아들)이다.
[삼국사기]武寧王(=斯麻王)
"白加가 항복하니, 왕(=斯麻王)이 그를 베어 白江에 던지었다."
[해설]斯麻王은 곧 東城王의 동생이다.
[일본서기]雄略天皇 3년
(雄略)天皇은 듣지 않고, 불을 질러 집을 태웠다. 그때 大臣과 黑彦皇子와
眉輪王이 같이 타 죽었다.
[해설]雄略天皇은 곧 安康天皇의 동생이다.
2.倭王興은 곧 百濟 東城王
[일본서기] 웅략천황 5년 秋7월
(461년) 秋7月, 軍君(=昆支)이 京에 들어왔다. 이미 5人의 子가 있었다.
[송서]列傳 夷蠻 東夷 倭國
"(世祖大明六年)濟死、世子興遣使貢獻。"
"462년에 倭王 濟가 죽었다. 世子 興이 使臣을 보내 貢物을 바쳤다. "
즉 461년에 백제 蓋鹵王의 동생 곤지가 아들 5人을 데리고 倭國의 京에 들어왔는데,
462년에 世子 興이 宋나라에 使臣을 보내 貢物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雄略天皇 5년은 일본서기 紀年으로 461년이나, 武寧王 誌石에 따르면 이 때가
462년이다. 당시 倭가 卽位年을 元年으로 하지 않고, 卽位 이듬해를 元年으로
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雄略 5년을 462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世子 興은 昆支의 아들 5人 중 한 사람이 아닐까?
昆支가 그의 아들 중 한 사람을 倭國의 王世子로 冊封했던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그 아들은 곤지의 둘째 아들 바로 牟大, 즉 後日의 백제 東城王이 될 것이다.
[송서]列傳 夷蠻 東夷 倭國
"順帝昇明二年 興死、弟武立。"
478년에 興이 죽었다. 아우 武가 (王으로) 卽位했다.
분명히 倭王興이 478년에 죽었다. 그런데 倭王武는 478년에 宋나라에 上表文을
올리면서 倭王興의 죽음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고, 단지 3年前에 죽은 아버지와
형의 죽음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록은 3년상을 거의 마쳐가고
있는 시점에 기록된 것 같다.
[송서]列傳 夷蠻 東夷 倭國
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一。
居在諒闇、不動兵甲、是以偃息未捷、至今欲練甲治兵、申父兄之志
"갑자기 아버지와 兄을 잃어 일을 이루려는 功이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로부터 臣은 3年喪 을 당하여 軍士를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싸워 이기지 못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병기를 연마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父兄의 뜻을 펴고자 합니다."
倭王興의 죽음을 일체 언급하지 않는 倭王武, 도대체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倭王興이 죽은 시점(478년)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三國史記] 年表 中
"未己 三斤王薨 東城王 牟大 卽位元年"
479년 三斤王 사망, 東城王 牟大 卽位 元年
478년에 倭王興이 죽었다. 그런데 그 年에 宋나라 天子에게 上表文을 올리는
倭王武는 倭王興의 죽음에 대해 일체 언급이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로부터
1년 후 즉 479년에 倭 列島에 있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昆支의 아들 牟大가
百濟王으로 登極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478년 11월에 三斤王이 15세의
나이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이 15세의 나이에 죽었다면 이는 病弱해서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宋書에는 바로 이 해에 倭王興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倭王興 곧 後日의 東城王이 三斤王이 死境을
헤메고 있다는 소문을 접하고 478년경 백제로 건너가서 兵權을 장악하고
그 후 479년에 왕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일본서기는 479년 4월에
東城王이 즉위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사기는 479년을 東城王의 즉위 元年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일본서기의 雄略天皇이 사망한 年을
주목해보자. 雄略天皇이 사망한 年은 일본서기에 의하면 479년이다. 그런데 이 479년이
바로 東城王이 百濟王으로 公式的으로 즉위한 시기이다. 하지만 東城王이 倭에서
백제로 건너간 시기는 정확히 말하자면 478년이 된다. 그렇다면 결국 倭王興이
죽은 시기와 東城王이 倭를 떠나 백제로 간 시기, 倭王武 곧 斯麻王이 倭王興
곧 東城王의 뒤를 이어 王位에 卽位한 시기가 겹치게 되는 것이다. )
도대체 倭王武 즉 後日의 斯麻王은 누구로부터 王位를 물려받은 것일까?
왜 倭王武 卽 後日의 斯麻王은 宋나라 天子에게 보내는 上表文에 倭王 興의
죽음에 대하여 아무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일까?
倭王興은 宋書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은 죽지 않은 것이 아닐까?
倭王興 곧 牟大가 倭王武 곧 斯麻王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백제로 건너가서
백제왕으로 登極하자, 뒤를 이어 즉위한 斯麻王이 그 사실을 摘示하여 보고
하는 것을 꺼려 倭國 使臣을 통해 倭王興이 죽었다고 宋나라 天子에게 보고한
것은 아닐까? 바로 이것은 兄弟 상속이 많은 백제의 侯國 倭國의 현실을 고려하면서,
中國天子의 백제의 侯國 倭國에 대한 간섭을 最少化하기 위한 방책 때문인
것은 아닐까?
3.일본서기에 安康天皇의 재위기간이 3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유
흔히들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安康天皇을 宋書의 倭王興에 비정한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安康天皇이 재위기간이 3년인 반면에 倭王
興의 재위기간은 무려 15년이나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재위기간을
놓고 보면 이 둘은 전혀 같은 인물이라고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앞서 나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雄略天皇이 架空의 천황에
불과하며 倭王武 곧 후일의 백제 斯麻王의 역사적 사실을 투영하여
일본서기에 雄略天皇 代의 역사를 기록하였다는 것을 논증한 바 있다.
즉 일본서기의 雄略天皇의 死亡年이 곧 倭王武가 왕위에 卽位한 年,
곧 478년의 다음 年이며, 雄略天皇의 卽位年은 479년부터 과거로 23년
소급하여 蓋鹵王의 卽位年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倭王武가
송나라 天子에게 보낸 上表文에 의하면 475년에 倭王武의 아버지와
형이 죽었는데, 475년에 죽은 왕과 왕자는 왜국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고,
백제에 존재하는데 그 사람들은 바로 백제의 蓋鹵王과 그의 아들들이라는
것을 논증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 언급하여 둘 것은 23년 과거로
소급된 雄略天皇의 在位期間을 다시 倭王武의 卽位 후 1年을 기준으로 하여
후대로 23년 在位期間이 흐른 것을 하면 그 23년이 되는 年은 武列天皇 4년
(서기502년)이 된다. 이 年이 바로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 武寧王 卽位
元年이다.
이렇게 보면 일본서기의 雄略天皇은 倭王武 곧 後日의 斯麻王을 투영하여
기록한 것이지만, 그 후의 淸寧天皇, 顯宗天皇, 仁賢天皇은 架空의 天皇이라는
것이 된다. 武列天皇도 架空의 天皇이기는 마찬가지이나 앞서 언급한 대로
백성에게 포학한 짓을 하였다는 점에서는 백제 東城王의 역사를 일정 부분
투영하였다고 생각된다. 즉 백제 東城王의 사망으로 倭王이었던 斯麻王이
백제왕으로 등극하자, 斯麻王의 후손이 아닌 다른 계열의 왕 곧 男弟王이
倭王으로 등극하게 되는 역사적 사실이 武列天皇이 후손이 없이 죽고,
계열이 다른 繼體天皇이 즉위한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으로 투영된 것이다.
그렇다면 雄略天皇의 兄으로 기록된 安康天皇 또한 백제왕이나 백제 왕자의
역사가 투영되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安康天皇은 재위기간이
3년이다. 이 재위기간은 宋書, 삼국사기를 통틀어보아도 같은 재위기간을
가진 왕이 없다. 그렇다면 이 기록은 역사적 사실이 투영된 기록이 아닌
완전한 허위의 기록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존재한 倭王으로 밝혀진 倭王武는 곧 백제 斯麻王이며
雄略天皇 또한 倭王武 곧 백제 斯麻王의 역사를 투영하여 기록한 架空의 천황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전제로 하여 安康天皇의 수수께끼 재위기간 3년을
풀어보자. 우리는 倭王武 곧 백제 斯麻王이 親父, 親兄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養父, 養兄을 가지고 있음을 宋書와 일본서기를 통해 앞서 살펴본 바 있다.
그리고 宋書를 통해 倭王武가 親父와 親兄의 3년喪을 치루고 宋나라 天子에게
上表文을 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이것이다. 安康天皇의 재위기간
3년은 바로 倭王武가 3년상을 치룬 기간이다. 다시 말해서 倭王武는 곧 後日의
斯麻王이며, 雄略天皇은 倭王武의 역사가 투영된 架空의 천황인데, 雄略天皇
이전에 安康天皇 3년은 倭王武 곧 後日의 백제 斯麻王이 자신의 親父, 親兄을
위해 3년喪을 치룬 기간인 것이다. 바로 이것은 倭王武가 親父 蓋鹵王과
親兄 곧 蓋鹵王의 왕자들의 뒤를 이어서 倭王位를 계승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倭王武 곧 後日의 백제 斯麻王이 백제에 있는 東城王보다 더 백제
왕위를 계승하는데 있어서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일본서기의 저자가
安康天皇의 재위기간을 통해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倭王武 곧 斯麻王은 또한 養父와 養兄이 있는데 이들이 昆支와 牟大,
곧 후일의 東城王이다. 그런데 東城王은 백제왕으로 등극하기 전에 倭王興으로
서 재위를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倭王武의 兄王이 바로 倭王興, 곧 後日의
東城王인 것이다. 바로 그래서 倭王武 곧 후일의 斯麻王의 역사가 雄略天皇의
기록에 투영되었다면 倭王興 곧 후일의 東城王의 역사가 安康天皇의 기록에
투영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대로 安康天皇의 재위기간은
倭王武가 親父와 親兄의 3년喪을 치룬 기간으로 한 반면 安康天皇의 재위기간
동안 일어난 사건은 東城王의 재위기간의 역사적 사실을 투영하여 기록한 것이다.
일본서기의 安康天皇에 대한 기록이 宋書의 倭王興과 전혀 달리 기록된 것은
바로 이 安康天皇에 대한 기록이 倭王武 곧 後日의 백제 斯麻王의 親父와 親兄,
그리고 養父와 養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투영하여 복합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일본서기는 倭國의 역사가 곧 백제 侯國의 역사인데,
이 기록들을 바로 기록하지 못하고 일본서기 內에 따로 百濟新撰,百濟本記,
百濟記에 있는 일부기록을 보존하고, 그 역사와 관련된 사실, 곧 백제 왕자와
백제왕들에 관련된 백제 侯國 왜국의 역사를 天皇의기록으로 왜곡하면서
은밀히 암시하고 말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