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만은...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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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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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l
47,130
먼저 게시판을 운영하시는 분 같은데 리플로 이런글을 올리게 되서 죄송스럽습니다.
하지만,,,꼭 한번은 읽어 볼만한 내용인거 같아 올립니다.
그리고 이글에 답글이나 의견은 절대 달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글을 올려서 싸워보자는 의미가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까 다시한번 부탁드려요.
답글도 의견도 달지마시고 그냥 읽어 보시구
이런 사실이 있었다라는 것만 알아 주셨음합니다.
최소 저를 비롯해 이글을 읽으실 분들은 모두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이런 경험도 없었거니와
이때 이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뭐라 하진 말아주셨음 하구요.
단지 과거를 반성해보구 미래는 그런일은 절대 없기를 바랄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운영하시는분께
만일 이 글이 위에 말씀하신 그런 부적당한 글이라 판단하시면
과감히 지워주시고 그렇지 않으시면 모두가 읽어볼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 이런 글이 잘못된거라 판단되신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다시는 안올리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최소한 한번은 스스로가 반성하였음 하는 바램 뿐입니다.
독도(일본말;타케시마)가 일본땅이라고 하는 일본인
그런다고 욕하는 한국사람
일단 독도는 한국땅이 맞습니다.
하지만 일본인이 일본땅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정녕 일본인들의 대부분은 독도를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 몇몇의 주도권자들만이 주장하는 소리지요.
하지만 한국은 일본 전체를 묵어서 욕합니다.
이런것들을 전혀 모르는 일본사람은 이유없이 욕을 먹습니다.
반대로 생각해서 일본에 있는 하나의 섬을 한국에서 한국땅이라고 달라고 주장하면...
역시 일본사람은 한국 전체를 욕합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똑 같습니다.
왜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같은 사람이니까요.
아래의 글 또한 그렇습니다.
전쟁을 주동하고 거기에 동참한 사람
그리고 저런 짓을 한 사람이 나쁜거지.
일본인 전체가 그것도 현제 그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욕할순 없다는 거지요.
가장 큰 문제는 일본은 역사를 숨긴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의 대부분은 성인이 되기까지
그런 사실들을 모르는 사람또한 허다 하다는 거지요.
생전 배워본적도 없고 듣도 보지도 못한걸
뭐라 욕할순 없다는 겁니다.
전 그렇게 일본인을 욕하진 않습니다.
단 한가지 경우만 욕합니다.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 또한 의외로 많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걸 알면서 그런일은 없다라고 주장하는 일본인만은 욕합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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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의 글은 실제 일본인 사진작가가 북한을 방문하고 쓴 내용을
그대로 한글로 번역해놓은 내용입니다.
아마도 번역기로 대충 번역한거 같긴 하지만...
내용은 충분히 이해하실수 있으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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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행한 식민지 지배로부터 커다란 피해를 받은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 살고 있는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에 그 실태조차 거의 알려진 바 없
다. 나는 올해 5월에서 6월에 걸쳐 평양에 19일간 체류하면서 많은 피해자들을 취재했다. 그중에서도 일본
군에 의해 성노예가 된 전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의 증언과 그들의 몸에 깊이 새겨진 상흔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나는 전후세대이지만 일본이 아시아 여러나라에서 행한 침략의 실태를 일본사회에 알리는 것이 일본인 사
진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때문에 십수년간에 걸쳐 아시아 여러나라를 방
문해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와 아시아 태평양전쟁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 600여명을 찾아가 취재했다. 그
런데 취재하지 못하고 공백으로 남아 있던 곳이 북한이었다. 취재교섭을 시작한 것은 1990년. 그것이 올
해 4월 겨우 허가가 났다. 일본인 저널리스트의 단독취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수년 만의 일이라 한다.
니가타에서 승선한 배는 5월17일 원산항에 입항했고, 나는 약 80kg의 촬영기재를 둘러메고 부두에 내렸
다. 19일간 평양에 머물면서 내가 바라던 바를 거의 다 취재할 수 있었다. 전 일본군 위안부, 히로시마와 나
가사키에서 피폭된 사람, 강제연행돼 중노동에 종사한 사람, 징병으로 군인이나 군속이 된 사람, 불교도로
서 탄압받은 사람까지 모두 21명을 만났다.
(중략.....)
임신하자 낙태시킨다고 자궁 들어내 북한에서 전 일본군 위안부들을 취재하는 것은 일본인으로서, 더욱이
남성으로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마음의 상처뿐만 아니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끔
찍한 육체적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민족차별과 여성차별 위에 일본군이 만들어낸 종군위안부 제
도의 본질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이기도 하다.
등의 칼자국을 보여준 분은 버마에 ?碩틈?정송명(鄭松明, 1924년생)씨. “조선인 여성 400명 중 절반이 싱
가포르에서 하선하고 나머지는 랑군으로 갔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한달이나 걸려 타이까지 걸어왔습니다.
위안부 45명과 남성 15명의 조선인이 2척의 배를 타고 귀국했습니다.” 그의 등에는 지금도 선명한 상처가
두곳 남아 있다. “너무 피로해 더이상 상대 못하겠다고 하자 마에다 중위가 일본도를 뽑아 내리쳤습니다. 심
한 상처인데도 약 한번 발라주지 않아 2년간이나 상처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유선옥씨의 배에는 배꼽 위쪽
에서 아래쪽까지 크고 오래된 상처가 있었다. 군의관이 자궁째 태아를 들어낸 수술의 흔적이란다.
유씨는 1923년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태어났다. 기장밥을 끼니로 할 정도의 빈농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미야모토가 공장의 일자리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는 따라나섰다. 다른 여성 2명과 함께 끌려간 곳
은 중국 동북지방의 목단강. 따라온 걸 후회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다케코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는 처음에
하루 5∼6명 정도, 많을 때는 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기절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면 다시 군인들이
덮쳐왔다. 불행히도 임신하게 되자 낙태 겸 재임신 방지를 위해 태아가 있는 자궁을 들어냈다. 상처가 낫자
마자 다시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반항하면 죽여버립니다. 미쓰코라고 불리던 소녀는 목을 쳐 죽였습니
다. 여기에 있었던 15명 정도의 여성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5∼6명 정도였습니다. 조국이 해방된 뒤에
도 거지 같은 유랑생활을 하다가 1948년 10월에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1981년에 사망한 남편에게도 제
체험을 끝까지 고백하지 않았습니다”하고 속삭이듯 낮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지금도 몸서리치는 증오심
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한 일본에 대해 복수하는 일에만 골몰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때의
군인을 찾아낸다면 찔러죽이고 싶어요”하고 말하고 그때부터는 내 질문에 거의 대답하지 않았다.
일본인과는 만나고 싶지도 않다는 기분을 뚜렷이 읽을 수 있었다. 이경생(李京生, 1917년생)씨의 배에도
유씨와 비슷한 상처가 있었다. 지주집에서 일하고 있던 이씨는 끈으로 묶인 채 경상남도 창원의 군수공장으
로 끌려갔다. ‘천황폐하를 위해 몸을 바치면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장교가 말했다. 하루 밤에 10∼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그리고 임신. ‘아직 쓸 만한데’하는 생각에 자궁째 태아를 들어냈다.“일본 때문에 아
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을 땐 옛 생각이 떠올라 눈물이 납니다. 여성을 성욕처리의 도구로밖
에 보지 않고 낙태와 불임시술로 자궁까지 들어내는 행위는 여성의 존엄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결
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산 사람 삶아 강제로 먹이기도…
정옥순(鄭玉順)씨의 기억은 매우 또렷했다. 그는 함경남도 풍산군 파발리(豊山郡 把撥里)에서 1920년 12
월28일 태어났다. 1933년 6월3일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제복을 입은 남자 3명에게 연행됐고, 끌려간 파
발리 주재소에서 강간당했다. 저항하다가 눈을 세게 얻어맞아 이때부터 왼쪽눈이 차츰 안 보이게 됐다. 그
뒤 10일이 지나 7∼8명의 군인에 의해 트럭에 실려 혜산(惠山)에 있던 일본군 수비대에 연행됐다. 그곳에
는 각지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정씨는 하루에 약 40명이나 되는 군인을 상대한 일도 있어 자궁출혈이 심했다. 그해 8월27일, 칼을 찬 군
인이 ‘군인 100명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누군가’하고 물었다. 그때 손을 들지 않은 15명의 여성은 다른 여
성에 대한 본보기로 죽였다. 발가벗긴 여성을 군인이 머리와 발을 잡아 못박은 판자 위에 굴렸다. 분수처럼
피가 솟고 살덩이가 못판에 너덜거렸다. 그때의 기분을 “하늘과 땅이 온통 뒤집어진 것 같았다”고 정씨는
표현했다. 그 다음 군인들은 못판 위에서 죽은 한 여성의 목을 쳐 떨어뜨렸다. 정씨와 다른 여성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본 중대장은 “위안부들이 고기를 먹고 싶어 운다”고 했다. 군인들은 죽은 여성의 머리를 가마에
넣어 삶았다. 그리고 나무칼을 휘두르며 그들에게 억지로 마시도록 했다.
정씨는 그때 피살된 여성들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꼽으며 한사람씩 짚어나갔다. 중도에서 헛갈리면 다시 처
음부터 세어나갔는데 아무리 해도 한사람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자 몹시 서운해 했다. 그 수비대의 대대장
은 ‘니시하라’, 중대장은 ‘야마모토’, 소대장은 ‘가네야마’였으며, 위안소 감독은 조선인 ‘박’이었다고 했다.
매독감염 숨겼다고 달군 철봉을 자궁에…
1933년 12월1일에는 한 여성이 장교가 철봉을 자궁에 꽂아 죽어버렸다. 다음해 2월4일에는 매독에 걸린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장교에게 병을 옮겼다는 이유로 한 여성이 피살되었다. 일본군이 벌겋게 달군 철막대
를 자궁에 넣었고 여자는 즉사했다. 뽑아낸 막대에는 검게 탄 살점이 달려 있었다. 너무나 지독한 일본군의
잔학행위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듣게 된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 질문도 못하고 한숨만 내뿜었다.
놀라운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혜산의 부대는 정씨를 포함한 여자들을 이끌고 중국으로 이동해 대만에서 가
까운 곳에 얼마 동안 있다가 1935년 9월에 광둥(廣東)에 도착, 이듬해 6월15일 정씨를 포함해 12명의 여
성이 도망쳤는데 이틀 후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맨처음 도망치자고 제안한 자를 가르쳐주면 주모자 이외
는 모두 살려주마”고 했으나 아무도 고해바치지 않았다. 정씨는 철봉으로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았다. 이때
의 상처는 지금도 남아 있다. 다음에는 물고문을 당했다. 고무 호스를 입에 넣고 물을 틀어댔다. 부풀어오
른 배 위에 판자를 올려놓고 군인들이 올라서서 널뛰기하듯 뛰었고,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 일이
몇번인가 되풀이되면서 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더욱 잔인한 행위를 했다. 정씨와 여자들의 발목을 끈으
로 묶고 거꾸로 매달아놓고 바늘이 수두룩하게 박힌 검은 몽둥이를 들고 와 먹물을 바른 뒤 정씨와 다른 여
성들의 입 속에 몽둥이를 쑤셔넣었다. 정씨는 앞니가 부러지고 격렬한 통증으로 기절했다. 문신은 온몸에
걸쳐 새겨졌다. 군인들은 처음부터 죽일 셈으로 여성들에게 문신을 했다. 마차에 실려온 여성들을 들에 팽
개치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중국인 남자가 일본인이 사라진 뒤, 숨이 남아 있던 여자 두명을 옮겨 약
두달간 간호해줬다.
정씨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하며 의자
에 앉아 있는 내 팔을 꽉 쥐며 울부짖듯 소리질렀다. 눈앞에 있는 일본인이 자신을 극한까지 학대한 일본 병
사와 겹쳐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문신한 자국을 보여줬다. 정씨가 손가락으로 뒤집어보인 입술 안쪽
엔 선명한 짙은 보라색 반점이 있었다. 좀 흐릿했지만 혓바닥에도 푸르스름한 반점이 몇군데 있었다. 수많
은 바늘로 혀를 찔렀기 때문에 그뒤로는 말하기도 곤란해졌으며 지금도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고 했다. 등
아래쪽은 척추를 따라 둥근 반점이 염주처럼 줄줄이 그려져 있었다. 가슴과 복부 문신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판별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 낙서 같은 무늬가 뚜렷이 남아 있
었다. 일본 군인들은 정녕 그 잔인한 행위를 즐기면서 했음이 분명했다.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지배하고 있던 조선에서 일본은 젊은 여성들을 납치해 버러지처럼 짓뭉갰다. 정씨의
몸에 깊숙이 새겨진 문신은 그 어떤 많은 얘기를 듣는 것보다도 일본이 저지른 식민지지배의 실태와 천황
의 군대의 악랄한 본질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글·사진/ 이토 다카시(伊藤孝司) 1952년생. 포토저널리스트로 과거에 일본이 행한 식민지지배와 침략전쟁
으로 피해를 입은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 그리고 현재 일본이 저지르는 지구환경파괴 현황을 아시아 각지에
서 널리 취재하고 있다. 아시아의 피해자에 관한 저서를 일본에서 8권, 한국에서 3권(눈빛출판사에서 <종
군위안부> <사할린 아리랑> 등), 환경에 관한 저서를 일본에서 2권 출판했다. 일본, 미국, 유럽에서 수십
차례의 사진전을 열었으며 96년에는 서울과 부산에서도 사진전 ‘깨어진 침묵- 아시아의 종군위안부들’을
열었다. 일본 우익들의 테러 위험에 대한 본인의 우려에 따라 얼굴 사진을 싣지 않는다.
번역문보기
この文だけは...ぜひ読んで見てください.
先に掲示板を運営する方ようなのにリップルでこういう文を載せるようになって申し訳ありません.
しかし,,,必ず一度は読んで見るに値する内容のようであげます.
そしてこの文に返事や意見は絶対つけないでくださったらと思います.
この文を載せて争って見ようという意味が絶対ではないです.
だからもう一度お願い致します.
返事も意見もつけずにそのまま読んで見て
こんな事実があったということだけ分かったらと思います.
最小私を含めてこの文を読む方々は皆韓国人でも日本人でもこんな経験もオブオッゴニと
この時此の世に生まれなかったです.
そうだからここに対して何だと言うは巻いてくださったらと思うんです.
ただ過去を反省して見て未来はそのようなことは絶対ないように願うだけです.
そして最後にウンヤングハシヌンブンに
もしこの文が上におっしゃったそんな不適当な文と判断すれば
敢然と消してくださってそうではなければ皆が読んで見るように
承諾してください.
そしてもしこんな文が間違ったので判断されたらおっしゃってください
二度とあげないです.
私は個人的に最小限一度は自らが反省したらと思う希望だけです.
独島(日本語;竹島)が日本の領土だと言う日本人
そうと悪口を言う韓国人
一応独島は韓国の地が当たります.
しかし日本人が日本の領土だと言います.
しかし全く日本人たちの大部分は独島を知り合いもいないです.
その何人の主導権者たちだけが主張する音です.
しかし韓国は日本全体を泊って悪口を言います.
このようなものたちが全然分からない日本人は理由のなく悪口を言われます.
反対だと思って日本にある一つの島を韓国で韓国の地だとくれと主張すれば...
やっぱり日本人は韓国全体を罵ります.
反対だと思えばまったく同じです.
どうして日本人でも韓国人でも同じ人ですから.
下の文もそうです.
戦争を主動してそこに同参した人
そしてあんなことをした人がナプンゴだ.
日本人全体がそれも舷梯それとはどんな関係がない人々を罵る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んです.
最大の問題は日本は歴史を隠すというはずです.
そうだから日本人の大部分はおとなになるまで
そんな事実たちが分からない人もあまたあるというんです.
いつまでも学んで見たこともなくてドッも見ることもできないのを
何だと悪口を言う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ことです.
私はそのように日本人を罵らないです.
ただ一つ場合だけ悪口を言います.
そんな事実を知り合いも意外に多いということです.
しかしそのようなものを分かりながらそのようなことはないと主張する日本人だけは悪口を言います.
それで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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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下の文は実際日本人写真作家が北朝鮮を訪問して書いた内容を
そのままハングルで翻訳しておいた内容です.
たぶん翻訳機で大まかに翻訳したようではあるが...
内容は充分に理解することができると見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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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が行った植民地支配から大きな被害を受けた韓国人たちは日本政府と企業を相手でお詫びと賠償を
要求している. しかし北朝鮮に住んでいる被害者たちに対しては国際社会にその実態さえほとんど知られたところオブ
だ. 私は今年 5月から 6月にわたって平壌に 19日間滞留しながら多くの被害者たちを取材した. その中でも日本
軍によって性奴隷になった私は日本軍慰安婦女性たちの証言と彼らの身に深く刻まれた商魂に大きな衝撃を
受けた.
私は前後世代だが日本がアジア色々な国で行った侵略の実態を日本社会に知らせるのが日本人死
濃い作家と同時にジャーナリストとしての義務だと思っている. そのため十数年間にわたってアジア色々な国を部屋
門して日本による植民地支配とアジア太平洋戦争で被害を被った人 600人余りを尋ねて取材した. 彼
ランデ取材することができずに空白で残っていた所が北朝鮮だった. 取材交渉を始めたことは 1990年. それが今年
日 4月やっと許可が出た. 日本人ジャーナリストの単独取材を受け入れることは数年ぶりの仕事と言う.
新潟で上船した滲む 5月17日原産港に入港したし, 私は約 80kgの撮影記載を担いで波止場に降りる
だ. 19日間平壌に泊まりながら私が望んだことをほとんど取材することができた. 私は日本軍慰安婦, 広島と私
がサキで被爆された人, 強制連行されて重労動に携わった人, 徴兵で軍人や軍属になった人, 仏教徒で
三弾圧受けた人まで皆 21人に会った.
(中略.....)
姙娠すると堕胎させると子宮持ち出して北朝鮮で私は日本軍慰安婦たちを取材することは日本人として, さらに
男性としては非常に当惑な事だった. 彼らは心の傷だけではなくきちんと眺めることができない位のひき
チックした肉体的傷をおさめていた. それは民族差別と女性差別上に日本軍が作り出した従軍慰安婦制
道義本質を見せてくれる明確な証拠でもある.
などの刻み目を見せてくれた方はミャンマーえ ?碩ひま?停訟人(鄭松明, 1924年生まれ)さん. “朝鮮人女性 400人の中で半分がシーイング
がポルで下船して残りはラングーンに行きました. 戦争が終わるとひと月もかかってタイまで歩いて来ました.
慰安婦 45人と男性 15人の朝鮮人が 2尺の船に乗って帰国しました.” 彼のなどには今も鮮かな傷が
2ヶ所残っている. “とても疲れてこれ以上相手すると言う事ができないでMaeda中尉が日本刀を抜いてぶん殴りました. 心
一傷なのに薬一度塗ってくれなくて 2年間や傷が癒えなかったです.” 有線屋さんのお腹には臍上側
で下側まで大きくて古い傷があった. 軍医が子宮目胎児を持ち出した手術の跡だそうだ.
ユさんは 1923年咸境道ギョングフンググンで生まれた. 記章ご飯を食事にするほどの貧農だったが, ある日急に
現われたMiyamotoが工場の働き口話をしてくれたし, 彼はついて行った. 他の女性 2人と一緒に引かれて行った所
銀中国東北地方のモックダンガング. 付いて来たのを後悔した時はもう遅れた. ダケコという名前が付けられた彼は初めに
一日 5〜6名程度, 多い時は 15人の軍人を相対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気を失ったやっと我に返ればまた軍人たちが
襲って来た. 不幸にも姙娠するようになると堕胎かたがた再姙娠防止のために胎児がいる子宮を持ち出した. 傷が治ろう
麻子また軍人たちを相対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反抗すれば殺してしまいます. ミスコと呼ばれた少女は首を打ってズックヨッスブニ
だ. ここにあった 15人位の女性の中で生き残った人は 5〜6人位でした. 祖国が解放された後に
度乞食みたいなまたたびをしている途中 1948年 10月に故郷に帰って来ました. 1981年に死亡した夫にも制
体験を最後まで告白しなかったです”とささやくように低い音で話した. “今もぞっとする憎悪心
を感じています. 子供を生むことができないようにした日本に対して仇を討つ事にだけ沒頭しながら暮して来ました. あの時の
軍人を捜し出したらチルロズックになりたいです”と言ってあの時からは私の質問にほとんど答えなかった.
日本人とは会いたくないという気持ちをめっきり読めた. 異径生(李京生, 1917年生まれ)さんのお腹にも
ユさんに似ている傷があった. 地主集で働いていた李さんは紐で縛られたまま慶尚南道昌原のグンスゴングザングウ
路引かれて行った. ‘天皇陛下のために身をささげれば良い待遇を受ける’と将校が言った. 一日夜に 10〜15名医
軍人を相対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そして姙娠. ‘まだ使うに値するのに’する考えに子宮目胎児を持ち出した.“日本のため児
これを生むことができなくなりました. 一人でいる時は昔の考えが浮んで涙が出ます. 女性を性慾処理のドグロバック
に見ないで堕胎と不妊手術で子宮まで持ち出す行為は女性の尊厳を全面的に否定することできめ
鼻許すことができません.” 生きた人煮って強制で食べさせたり…
ゾングオックスン(鄭玉順)さんの記憶は非常にあざやかだった. 彼は咸鏡南道豊山君擺撥里(豊山郡 把撥里)で 1920年 12
月28日生まれた. 1933年 6月3日井で水を汲んでいる途中制服を着た男 3人に連行されたし, 引かれて行ったなが葱
バリ駐在所でレイプされた. 抵抗している途中目を数えるようになぐられてこの時から左目が徐々に見えなくなった. 彼
後 10日が経って 7〜8人の軍人によってトラックに積まれて恵山(恵山)にあった日本軍守備隊に連行された. その所に
増えた各地からひかれて来た女性たちがたくさんいた.
チョン氏は一日に約 40名もなる軍人を相対したこともあって子宮出血がひどかった. その年 8月27日, 刀をさした軍
インが ‘軍人 100人を相対することができる者が誰か’と問った. あの時手をあげない 15人の女性は他の女
しも大韓見習うことに殺した. 裸にした女性を軍人が頭と足を取って釘を打った板の上に転がした. 分数のように
血が湧いてサルドングイがモッパンに垂れ下がって搖れた. あの時の気持ちを “空と地がいちめん引っ繰り返ったようだった”とチョン氏は
表現した. その次の軍人たちは売る事ができなかった上で死んだある女性の首を打って落とした. チョン氏と違う女性たちが泣いて
あることを見た中隊長は “慰安婦たちが肉を食べたくて泣く”と言った. 軍人たちは死んだ女性の頭をお御輿に
入れて煮った. そして木刀を振り回して彼らに無理やりに飲むようにした.
チョン氏はあの時被殺された女性たちの名前を指で指折ってひとりずつついて行った. 中途で紛れればまた妻
うーんから数えて行ったがどうしてもひとりの名前が浮び上がらないで大変名残惜しがった. その守備隊の大隊長
銀 ‘Nishihara’, 中隊長は ‘Yamamoto’, 小将は ‘がネヤマ’であったし, 慰安所監督は朝鮮人 ‘朴’だったと言った.
梅毒感染隠したと月だね鉄棒を子宮に…
1933年 12月1日にはある女性が将校が鉄棒を子宮にさして死んでしまった. 翌年 2月4日には梅毒にかかった
事実を届けなくて将校に病気を移したという理由にある女性が被殺された. 日本軍が薄赤く月だねチォルマックデ
を子宮に入れたし女は即死した. 抜き出した棒には黒く弾肉つきが走っていた. あまりにも酷い日本軍の
残虐行為に関する話をずっと聞くようになった私は完全に魂が出た. 質問もできなくてため息だけ噴き出した.
驚くべきな話は続いた. 恵山の部隊はチョン氏を含んだ女達を導いて中国に移動して台湾から街
カウン所にいくら間ある途中 1935年 9月に広東(広東)に到着, 翌年 6月15日チョン氏を含んで 12人の女
性が逃げたが二日後皆つかまってしまった. “最初逃げようと提案した者を教えてくれれば首謀以外
増えた皆いかしてあげる”と言ったが誰も告げ口しなかった. チョン氏は鉄棒で頭を激しくなぐられた. この時
義傷は今も残っている. 次には水拷問にあった. ゴムホースを口に入れて水をつけた. ブプルオオ
ルンお腹の上に板を乗せて軍人たちが立ち上がって板跳びするように走ったし, 口で水がふかれて出た. そんな事が
何度か繰り返されながら気を失ってしまった. そしてもっと残忍な行為をした. チョン氏と女達の足首をクンウ
路縛って逆にぶら下げておいて針がこんもりとめりこんだ黒い棒を持って来て墨汁を塗った後チョン氏と違う女
性たちの口の中に棒を入れこんだ. チョン氏は前歯が折れて激しい痛症で気を失った. 入れ墨は全身に
かけて刻まれた. 軍人たちははじめから殺すつもりで女性たちに入れ墨をした. 馬車にのせられた女性たちを野に彭
犬する姿を遠くから見ていた中国人男が日本人が消えた後, 息が残っていた女二名を移して薬
2ヶ月間看病してくれた.
チョン氏は奇跡的に生き残ったのだ. “あの時仕事を思えば今も胸が張り裂けるようです”して椅子
に座っている私の腕をぎゅっと握りながら泣き叫ぶように大声を出した. 目の前にいる日本人が自分を極限まで虐待した日本病気
死と重なって見たことかも知れない. 彼は入れ墨した自国を見せてくれた. チョン氏が指で裏返して見せた唇内側
円鮮かな濃い紫色まだらがあった. ちょっと薄暗かったが舌にも青っぽいまだらが何箇所あった. スマン
銀針で舌を突いたからその後では言ったり困られたし今も完全に治らなかったと言った. など
下側は脊椎に付いて丸いまだらが数珠のように幾列にも描かれていた. 胸と腹部入れ墨を見て我知らず
大声を出してしまった. 何を描いたか判別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が子供達楽しみで同じ柄がめっきり残ってイッ
オッダ. 日本軍人たちは全くその残忍な行為を楽しみながらしたことが明らかだった.
内鮮一体を立てながら支配していた朝鮮で日本は若い女性たちを拉致してボロジのようにつぶした. チョン氏の
身に深く刻まれた入れ墨はどんな多くの話を聞くよりも日本がやらかした植民地支配の実態と天皇
義軍隊の悪辣な本質を明確に見せてくれていた.
文・写真/ Itoタカシ(伊藤孝司) 1952年生まれ. フォトジャーナリストで過去に日本が行った植民地支配と侵略戦争
で被害を被ったアジア各国の人々, そして現在日本がやらかす地球環境破壊現況がアジア各地に
三広く取材している. アジアの被害者に関する著書を日本で 8冊, 韓国で 3冊(目つき出版社で <鐘
軍隊慰安婦> <サハリンアリラン> など), 環境に関する著書を日本で 2冊出版した. 日本, アメリカ, ヨーロッパで数十
順番の写真展を開いたし 96年にはソウルと釜山でも写真展 ‘壊れた沈黙- アジアの従軍慰安婦たち’を
開いた. 日本右翼たちのテロ危険に対する本人の憂慮によって顔写真を載せ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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