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高麗史節要의 기록
冬十月 都督 使金方慶將中軍 朴之亮金? 知兵馬事
任愷 爲副使 樞密院副使金侁 爲左軍使 韋得儒
知兵馬事 孫世貞 爲副使 上將軍金文庇 爲右軍使
羅裕 朴保 知兵馬使 潘阜 爲副使 號三翼軍
겨울 10월에 都督使 金方慶으로 하여금 中軍을 통솔하게 하고, 朴之亮 金?을
知兵馬事로, 林愷를 副使로 임명하고, 樞密院副使 金侁을 左軍使로,
韋得儒를 知兵馬事로, 孫世貞을 副使로 삼았으며, 上將軍 金文?庇를
右軍使로, 羅裕와 朴保를 知兵馬事로, 潘阜를 副使로 삼아 三翼軍으로 임명하였다.
與元都元帥忽敦 右副元帥洪茶丘 左副元帥劉復亭 以蒙漢軍二萬五千
我軍八千 梢工 引海水手六千七百 戰艦九百餘? 發合浦 越十一日
船至一?島 倭兵 陣於岸上
元國의 都元帥 忽敦, 右副元帥 洪茶丘, 左副元帥 劉復亭과 더불어,
蒙軍, 漢軍 2만 5천 人과 高麗軍 8천人 및 沙工
引海 水手 6천 7백 人과 전함 9백 척으로 合浦를 떠났다.
11일이 지나 배가 一岐島에 이르니, 倭兵이 언덕 위에 陣을 構築했다.
朴之亮 趙? 逐之 倭請降而復戰 茶丘 與之亮
?擊殺千餘級 捨舟三郞浦 分道以進 所殺過當
朴之亮과 趙?이 쫓으니 倭가 항복하기를 부탁하다가 다시 싸웠는데,
茶丘가 之亮,?과 더불어 倭兵 千人을 죽였다.
三郞浦에서 배에서 내려 길을 나누어 진격하니 죽인 敵兵이 매우 많았다
倭兵 突至衝中軍 方慶拔一?矢 ?聲大喝 倭?易而走
之亮 ?? 李唐公 金天祿 申奕等 殊死戰 倭兵
大敗 伏屍如麻 忽敦曰 雖蒙人習戰 何以加此
倭兵이 돌격하여 中軍과 충돌하였는데, 方慶이 嚆矢 一發를 쏘며
성난 소리로 크게 호통을 치니 倭가 겁에 질려서 도망갔다.
之亮,?,?,李唐公,金天祿,申奕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기 때문에,
倭兵이 크게 敗走하였고 쓰러진 시체가 山처럼 쌓여있었으며
忽敦曰 "몽고인이 잘 싸운다고 하지만 이것보다 더 잘할 수는 없다." 하였다.
諸軍 終日戰 及暮乃解 方慶 謂忽敦 茶丘曰
我兵 雖少 已入敵境 人自爲戰 卽孟明焚舟
淮陰背水者也 請復決戰 忽敦曰 小敵之堅
大敵之擒 策疲戰大敵 非完計也
여러 군사들이 종일토록 싸우다가 저녁에서 싸움이 멈췄다.
方慶이 忽敦,茶丘에게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비록 적기는 하지만
이미 적의 땅에 들어와 사람들 스스로 힘을 다하여 싸우니,
이것이 곧 孟明이 배를 불태우고
淮陰侯가 배수진을 친 격이다."라고 하여서
다시 결전하기를 부탁하였는데,
忽敦曰 "數가 적은 쪽이 힘을 헤아리지 않고 싸우면
數가 많은 쪽에게 사로잡힌다 하였는데,
피로한 군사를 몰아 많은 적과 싸우는 것은
완전한 계책이 아니다.”고 하였다.
高麗史節要의 기록에 따르면 日本軍은 몽골-고려 연합군에게
수차례 전투에서 패배하고 있습니다.
결국 日本軍 병력의 증강으로 몽골軍은 撤收를 합니다만
전투에서는 몽골-高麗軍의 일방적 優勢를 보이고 있습니다.
元寇紀略이나 八幡愚童記와 같은 일본측 史書를 봐도
일본측이 전투에서 苦戰하는 記述만 볼 수 있을 뿐
일본이 전투에서 승리한 기록을 볼 수 없습니다.
일본인은 사무라이와 武의 기풍과 문화를 자랑하면서
왜 실제 전투에는 이렇게 약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