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판에 지역의 유전특성, 왕족에 대한 스레가 연속으로 올라오고 있어, 문득 시시한 개인 家族史에 대한 스레를 올립니다.
저는 광산 김씨(光山 金氏) 37 대손(代孫)으로 光山 金氏의 본류는 신라의 왕족인 경주 김씨(慶州 金氏)입니다. 시조(始祖)는 慶州 金氏의 始祖인 김알지(金閼智)를 모시고, 중시조(中始祖)는 신라 신무왕(神武王)의 아들인 王子 김흥광(金興光) 祖를 모십니다.
그는 정치적 불안 속에서 왕도(王都)에서 현재의 전라남도 담양군에 은거하여, 학문 연구와 인근지역 주민들의 교화에 노력했다고 합니다.
< 전라남도 담양군에 위치한 김흥광(金興光) 사당(舍堂): 개인적으로 방문한 경험은 아직 없습니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고려시대 최초의 과거(科擧)시험에서 급제(及第)를 시작으로 정치와 학문에 진출, 일제시대 亡國의 무거운 책임감에 눌려 자결한 義士들, 친일 매국노들을 동시에 배출하기 까지 약 1,000년 동안 지배층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공자(孔子), 맹자(孟子), 주자(朱子)와 함께 학파와 역사를 초월하여 인정받는 고려와 조선의 性理學子들로 동국(東國/朝鮮) 18현(賢)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있는 문묘(文廟) : 光山 金氏의 가문에서 배출한 학자 2人이 포함되고 있다.
본인의 직계 조부께서는 현재의 강원도 횡성군 청일面 고시理 지역의 양반 地主셨습니다. 일제시대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의 토지 조사 사업에 저항(당시에는 당연히 어떤 불법적 행위. 조선인 관리와 공모해 토지조사를 회피하여, 소유권을 지키려고 하셨다.)하시다가, 재산을 모두 몰수당하고 고향에서 쫓겨나 서울에서 생활하시게 됩니다.
저의 부친께서는 한참 이후 출생하셔서 가난하고 배고픈 기억만 가지고 계십니다. 60년대 중반까지 굶주림(餓死)을 두려워하셔야 했습니다.
일제시대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1920)
어머니의 집안은 魯氏로 조선 시대까지 평범한 良人의 가문이라 할 수 있으나, 일제시대에 경상남도 김해시 생림面 일대의 大地主를 이루었습니다. 어머니의 부모님께서는 의사(醫師)이시고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부모님께서는 사회주의자로 어머니는 한국전쟁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되어 친척집에서 家事를 도우며 성장하셨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버려진 고아의 사진>
무일푼의 극빈한 신세였던 두 분은 한국전쟁이 일어나 서울을 떠나 피난(避難)하여 도착하고 있는 부산(釜山)에서 결혼하시고, 70년대 한국의 경제호황기에 가난을 벗어나 자택도 구입하고, 나와 형제들을 성장시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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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親家와 外家의 역사는 이처럼 조선의 패망,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에 이르는 역사 속에서 가장 극적으로 대비되는 한국인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親家(아버지의 가족)는 1000년의 귀족이었으나, 나의 조부에 이르러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패망한 가족, 外家(어머니의 가족)는 역사에 전혀 기록되지 않는 평범한 良人의 一家였지만, 일제시대에 大地主가 되고 있어 先祖의 一人은 분명히 대단한 친일파였을 것입니다. 두 가족 모두 한국전쟁의 격동에서는 모두 패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혼으로 결합해 산업화 시대에 함께 성실과 노력으로 가난을 벗어나고 후손을 양성하는데 성공한다. 라는 것은 한국의 역사를 비추고 있어 저는 개인적으로 복잡한 감흥이 느껴집니다.
시시한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저의 어린 시절에 아버지께서는 은행의 계좌에 대도시의 주택 2∼3개 정도는 구입할 수 있는 상당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고지식하고, 성실한 성격으로 부동산의 boom 시기에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노력하여 돈을 모은다. 라고 하셔서 부동산의 투자를 전혀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저는 지금 가난하고 늙은 아저씨 신세 w
< 모두 지나간 시시한 옛 이야기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