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興宣大院君이 가톨릭 敎徒를 대량 학살한 丙寅迫害 사건을 복수하기 위해
1866년 프랑스 루즈 제독이 이끄는 7척의 艦隊가 江華島에 상륙했습니다.
이름하여 丙寅洋擾입니다.
1.무기의 비교
프랑스軍 : 腔線銃과 미니에彈(前裝式 小銃)
미니에가 개발한 銃彈,
腔線銃에서 발사된 미니에彈의 사정거리는 무려 1350m,
有效射距離는 315m
朝鮮軍 : 화승총(전장식 소총)
有效射距離가 50m 內外
2.전투
鼎足山城 전투

프랑스군(160) VS 조선군(540)
梁憲洙 장군이 150명의 砲手들에게 미리 화승총 발포 준비를 마치고 성벽 뒤로 몸을 숨기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輕軍과 鄕軍만 성벽 위에 내세워 병력이 적은 것처럼 위장했다. 프랑스軍이 공격을 시작하자 梁憲洙의 부대는 흩어지기 시작했고, 이에 프랑스軍은 이들을 격멸하고자 당당하게 東門과 南門 안으로 쳐들어왔다. 그들이 50미터 內의 사격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梁憲洙는 일제히 사격 명령을 내렸다. 화승총이 명중률이 떨어진다고는 하나 150명이 일제히 사격을 하면 彈幕이 형성되어 사격 범위 내에 있던 물체들은 타격을 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미 프랑스軍은 화승총의 사격 범위 내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 였기 때문에 負傷兵이 속출했다. 만약 조선군이 프랑스軍과 같은 銃을 사용했더라면 負傷兵들이 戰死者로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負傷兵에 의한 손실은 매우 크다. 負傷兵을 후송하기위해 인력이 요구되고 負傷兵의 비명이 사기를 떨어뜨리기 마련이다. 이미 戰勢가 기울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프랑스軍은 공격을 포기하고 撤收했다.
3.정족산성의 결과
프랑스軍이 60명의 負傷兵과 6명이 戰死
朝鮮軍은 5명이 負傷을 당하고 1명이 戰死
이것으로 프랑스軍이 撤收 했다고는 볼수 없습니다.
(단지 몹시 지쳐고 위력시위가 되었다는 것에 만족하고 모두 撤收)
이것 때문에 朝鮮 朝廷은 鎖國政策에 힘을 실어 斥和碑를 세우고,
다시 自慢과 無事安逸에 빠지게 되었다
丙寅洋擾 당시에 쓰인 프랑스軍의 銃이라면
Mle1853이나 Mle1854같은 前裝式 腔線銃이었을겁니다
이 銃들도 모두 미니에彈을 쓰지요.
미니에彈은 애당초 前裝式 腔線銃을 前裝式 滑腔銃만큼 쉽고 빠르게
裝塡하면서도 腔線의 효과를 충분히 얻을 수 있도록 개발된 彈입니다.
미국의 南北戰爭 당시에도 南北 모두 주력은 "미니에彈을 쓰는 前裝式 腔線銃이었지요
그리고 丙寅洋擾 당시의 朝鮮軍의 개인 무기인 조총은 화승총입니다.
불붙은 심지로 격발하는 매우 원시적인 방식이지요.
반면 19세기 중반 이후의 前裝式 腔線銃은 前裝式이기는 하지만
雷管式 격발장치를 사용합니다. 화승총과는 신뢰성이나 발사속도,
명중률, 射程距離 모두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발사속도는 두배를 훨씬 넘고, 명중률과 有效射距離 면에서도
화승총이 대부분 길어야 100m, 대체로 수십미터 단위의 有效射距離을 가졌던 반면
雷管式 腔線銃에서는 쉽게 有效射距離 300m 이상으로 훌쩍 뛰어오릅니다.
아무래도 "게임"이 안된다고 봐야지요.
1866년 조선이 列强 프랑스와 싸워서 이기는 동안 일본에서는 무엇을 했습니까???


이런 집에 살면서...

이런 소박한 삶을 營爲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