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8월 3개국 연합국은 일본의 점령지역 버마의 미치나 (myitikyna)의 탈환 작전으로
1944년 5월 부터 미치나 (myitikyna)를 공격하여 3개월만에 완전히 점령하게 되었다
미치나 (myitikyna)를 점령한 미군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포로를 심문하는 것이었다
미군은 1944년 8월 10일 조선인 위안부 20명과 일본인 위안소 관리인 2명을 포로로 잡아 심문하여 보고서를 작성한다
보고서는 1944년 10월 1일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49호 한국인 위안부 >라는 제목으로 작성되었다
당시 포로 심문관 중에 현재 유일한 생존자가 있는데
그는 Akune kenjiro이다
그를 한국에서 취재했다고 한다

자막
(손으로 가리킨 사람 :알렉스 요리치(yorich) 49호 보고서 작성자 그리고 앞줄에서 맨 왼쪽이 아쿠네 겐지로 (Akune kenjiro)
그러니까 48호 보고서 작성자이다 한 팀입니다 탐원들이 모여서 찍은 것입니다

자막
연합군 심문관과 위안부 의사 (意思)소통 불가능

Akune는 맨 오른쪽 남자를 주목하고 있었다
위안부들과 미군이 함께 찍은 단체사진은 위에 사진과 이 사진의 인물 (위안부와 미군)이 동일 인물이다

자막
아쿠네 겐지로(Akune kenjiro) 전 연합군 포로 심문관
우리가 직접 다 했어요 우리는 통역을 사용하지 않았어요
우선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지 못했어요

자막.
마마상 파파상이 옆에서 긴밀하게 통제를 했어요
마마상 파파상 허락없이 위안부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그들은 꽉 붙잡고 통제해서 심문관은
위안부들에게 얘기도 못했어요
...................
심문하는데 있어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 문제이다
아쿠네(Akune)를 비롯해 미군들은 한국어를 하지 못했다 위안부들도 영어나 일본어에 능숙하지 못했다
그런데 한국어와 일본어가 가능한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마마상 파파상 이라고 불리던 위안소 관리인 부부이다
이 위안소 관리인 부부는 위안부들을 통제하며 위안부들의 심문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고 한다
미군과 조선인 위안부들은 서로 意思소통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보고서 12개 항목에 쓰여진 기록은 상당 부분 위안소 관리인의 입을 통해 쓰여졌을 것이다
위안부들과 소통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군이 위안부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또 미군이 서로 意思 소통이 어려운 위안부들을 교육을 받지 못했고 무식하고 이기적이다 라고 평가 할 수 없는 것이다
보고서에 나타난 위안부들에 처지에 대해 신빙성이 우려된다
즉 위안부는 일본군대에 붙여진 매춘부 혹은 직업적인 종군 민간인에 다름 아니다
버마에 있는 동안 그들은 사치에 살았다
위안부들은 평균적으로 한달에 1.500엔의 수입을 올렸다 등
일본인들은 이런 내용을 근거로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이며 큰 돈을 벌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일본군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되고 있었던 위안소 생활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
혐한들은 보고서에서 그나마 조금 있는 일본에 대한 불리한 내용은 삭제해 버리고
일본에 유리하도록 날조하여 위안부들을 비난하는 자료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