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織圖의 유래
●. .豳風七月圖
耕織圖는 농사와 잠직 (蠶織)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밭 갈이를 한다는 의미의 耕 ,직물을 짠다는 의미의 織 이 두 글자를 합하여
耕織圖라고 한다
시경(詩經)의 豳風 編은 중국 周나라의 발상지 豳나라의 노래를 모아 만든 것이다
耕織圖는 원래 시경(詩經)과 , 시경을 기반으로 만든 빈풍칠월도 (豳風七月圖)와 무일도(無逸圖)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豳風圖는 시경(詩經)의 豳風 編의 전편 ,즉 칠월(七月) 치효(鴟鴞) 동산(東山) 파부(破斧) 벌가(伐柯) 구역 (九罭 ) 낭발( 狼跋) 등
일곱 편을 모두 그린 것이고
이 중에 특히 백성들의 생업 농업이나 잠업과 관련된 풍속을 월령 (月令)형식으로 읊은 七月 編의 내용을 그린 그림이 많아
豳風七月圖 라고 하였다
● 無逸圖
무일도(無逸圖)는 書經의 주서(周書) 無逸 編의 내용을 되새기기 위해 감계적 목적으로 그린 그림이다
無逸이라는 것은 백성을 책임지는 국가 통치자는 자신의 즐거움이나 편안함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며
無逸 편은 周나라의 주공(周公)이 섭정을 그만 두고 조카를 成王으로 등극시켰는데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成王애개
국가 통치자로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자세와 백성들의 생업에 대한 어려움을 알게 하기 위해 쓴 글이다
중국에서 豳風七月圖에 대한 기록은 당나라 시대의 미술 사학가 張彦遠이 엮은 歷代名畵記에 처음 나타난다
이 책에서 晉明帝의 작품 목록 중에 빈시칠월도(豳詩七月圖)에 확인되지만 그림은 전하지 않는다
<豳風七月圖> 와 <無逸圖>는 백성들의 생업의 기본이 되는 농사와 잠직 등 힘든 노동을 보여 주며 국가 통치자로서 올바른 정치를 해야 한다는
민본주의 사상에 바탕을 둔 감계적 성격의 그림이다
● 누숙경직도
누숙경직도 (樓璹耕織圖)는 南宋의 樓璹 (1090년~1162년)이 浙江省 於濳縣의 현령으로 재임할 당시 豳風七月圖를 근간으로
耕作圖 21장면 蠶織圖 24장면을 제작하여 고종 황제에게 바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樓璹이 그린 것을 樓璹耕織圖라고 한다
한 폭에 한 장면을 그려서 상단에는 詩를 쓰고 하단에는 詩에 맞는 장면을 그림으로 묘사하였다
樓璹耕織圖는 후에 淸代의 패문재경직도 ( 佩文齋耕織圖)로 이어졌다
● 패문재경직도
樓璹耕織圖를 淸代에 다시 그린 것이 패문재경직도 (佩文齋耕織圖)이다
농사 짓기와 누에치기 하는 모습을 그렸고 그림 상단에 御題 詩를 써 붙이기도 하였다
淸代의 화가 초병정 (焦秉貞)이 서양화의 투시 원근법 등 새로운 기법을 사용해
패문재경직도 (佩文齋耕織圖)를 그려 御題를 붙이고 목판화로 제작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18세기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 누에치기 .조선시대 화가 金弘道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耕織圖
1, 누숙경직도 (樓璹耕織圖)
조선시대 樓璹耕織圖는 한 폭에 한 장면을 그려 위에는 詩를 쓰고 아래에는 그 詩에 맞는 장면을 그림으로 묘사하였다
조선시대의 작품 樓璹耕織圖는 화가 金弘道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는 경작도 12점 잠직도 18점으로 30매이다
조선시대 경직도(耕織圖)는 크게 <樓璹耕織圖>와 <佩文齋耕織圖>로 분류한다
조선시대 耕織圖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 成俔 (1439년~1504년)이 쓴 허백당집 (虛白堂集)에 수록되어 있는 奉敎耕織圖後序이다
이 글에는 1489년 (燕山君 4년)에 正朝使로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방문했던 權景優가 明나라로 부터 樓璹耕織圖를 가져와
燕山君에게 바쳤다 라고 한다 그러므로 樓璹 耕織圖는 1498년에 조선에 유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 無逸圖
무일도(無逸圖)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 훈요십조(訓要十條 ) 제10조에 나오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가를 가진 者는 항상 무사한 때를 경계할 것이며 널리 經史를 섭렵하여 과거의 예를 거울로 삼아 현실을 경계하라
周公은 같은 대상도 無逸 (安逸 , 방심하지 말아라)1편을 지어 成王에게 바쳤으니 이것을 써서 붙이고 출입할 때마다 보고 살피라 .
훈요십조( 訓要十條 )는 942년 고려 태조가 자손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10가지의 유훈이다
3, 豳風七月圖
한국에서 豳風七月圖에 대한 최초 기록은 <태종실록 1402년 4월>에 등장한다 예조전서 (禮曹典書) 金瞻이 太宗에게 豳風圖를 바쳤고
이에 태종은 金瞻에게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6년 (1424년)에는 예문관 대제학 卞季良에게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담은 그림을 월령 형식으로 제작하라고 지시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고
세종15년(1433년)에는 조선의 풍속을 바탕으로 하는 豳風七月圖를 제작하라고 집현전에 지시를 내렸다는
기록은 있으나 당시 그림은 전해지지 않은데
李昉運 (1761년~ 1815년 이후)이 그린 豳風七月圖는 전해지고 있다

李昉運 (1761년~ 1815년 이후)의 豳風七月圖
4. 패문재경직도 佩文齋書畵譜
이후 淸나라의 화가 焦秉貞이 <樓璹耕織圖>를 기반으로 새로 제작한 耕織圖가 1696년에 패문재서화보(佩文齋書畵譜)에 등재되면서
<佩文齋耕織圖 >양식이 등장하게 되었다
1697년에 淸나라에 奏請使 즉 사절단으로 로 갔던 최석정(崔錫鼎)이 북경에서 조선으로 돌아올 때 淸代의 화가 焦秉貞의 佩文齋耕織圖를
가져 왔다고 한다 肅宗의 명령으로 화가 秦再奚가 耕作圖와 蠶織圖를 나누어 그렸다

佩文齋書畵譜 (肅宗御題蠶織圖)
이 그림은 1697년 조선시대 肅宗의 명령으로 그린 그림이다 도화서 화가 秦再奚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위에 쓴 御題 詩는
봄 날은 더디게 가지만 날씨는 따뜻해져 아낙은 광주리를 끼고 뽕을 따느라 바쁘다네
등불 아래서 부지런히 일을 하니 한가로움이 적고 창 앞에서 베틀 북을 놀리며 옷감을 짜느라고 바쁘다네
북쪽 땅에서 한 겨울에 몸을 가릴 수 있는 것은 西陵氏가 영원토록 남긴 恩澤 덕분이라네
추위에 떠는 사람 없도록 천하에 명하셨으니 궁정에서 내리는 은덕 또한 두텁구나 라고 써있다

肅宗御題蠶織圖의 일부
5 민화
17세기 佩文齋耕織圖의 수용으로
19세기에는 민간에서도 경직도가 제작되었는데 그 이전 시대에서는 없었던 백성들의 다양하고 현실적인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민화로도 그려졌고 김홍도 (金弘道) 등 조선 후기 풍속화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耕織圖는 조선 후기에 와서 농가의 세시풍속과 결합하여 농가사시 ( 農家四時圖) (농가 월령도) 등 조선化 되어 병풍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19세기 작품 ,논 갈이하는 모습
모내기에 앞서 논 갈이를 하기 위해 논에 물을 대고 있다
논 갈이는 음력 2월 부터 시작된다 2월 첫 소날(丑日)에 첫 논갈이를 하는데 이 날이 되면 소뿔 사이에 나무로 만든 칼을 묶고
붉은 종이로 만든 꽃을 달아주고 논으로 데리고 간다
이렇게 하면 1년동안 질병이 소(牛)를 침범하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논 갈이 방법에는 논에 물을 가두어 하는 논 갈이와 ., 물 없이 하는 마른 논 갈이가 있다
논 갈이 횟수는 보통 3회에서 5회 정도 하는데 3번째 논 갈이를 할 때는 논에 물을 가두어 논 갈이를 한 논이나 ,물 없이 논 갈이를 했던
논에서도 모두 물을 가두어 논 갈이를 한다
논 갈이 라고 하는 것은 땅을 파고 뒤엎는 것인데 이때 사용하는 농기구는 쟁기다 , 쟁기와 함께 소(牛)를 이용하여 논 갈이를 하는
牛耕농업은 기록으로 502년 신라 지증왕 때에 시작되었다
소(牛)가 아무리 힘이 좋아도 소(牛) 힘만으로 논 갈이를 하기 어렵기 때문에 농기구 쟁기를 결합하여 사용한다
한국은 북쪽 지방이 산이 더 많고 지형이 험하기 때문에 쟁기 하나에 소(牛)2마리를 결합하여 논을 갈고 중부 이남 지방에서는
쟁기 하나에 소(牛)1마리를 결합하여 논 갈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 땅의 토질이나 지형 또는 농민의 정신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모내기하는 모습
일꾼들의 식사를 준비하여 다리를 건너 오는 아주머니와 남자와 아이가 있고 아래에는 북(鼓)을 치는 사람이 있다
모내기 하는 사람들의 수고와 피곤함을 씻어 주고 노동의 능률울 올리기 위해 북(鼓)을 치며 흥을 돋구고 있다

이한철(李漢喆 1808년생 ) 조선후기 화가 작품
벼베기를 하면서 농악 놀이를 즐기는 풍경이다 .왼쪽 부터 연주하고 있는 악기는 .징 . 꽹과리 .장구 .태평소 .소고이다
농번기가 시작되면 마을의 농민 중에 악기 연주에 소질이 있는 사람을 뽑아 농악대를 조직한다 농악 놀이를 하는 이유는
힘든 노동의 능률을 올리며 노동의 수고를 씻어 주기 위한 것이다
또 농악 놀이를 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단결과 화합을 도모하고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도 있다
현재는 저 농악 놀이에 사용된 악기와 연주를 무대에 올려 공연을 하는데 이것을 四物놀이 라고 한다

19세기 밭갈이 耕織圖 병풍 중 일부 , 민간에서 제작된 耕織圖
농업의 발달로 농기구도 개량하게 되었다
호미로 밭을 갈고 있는 모습이다 호미로 밭 이랑을 높게 만들어 고랑에 씨앗을 뿌리는데 이렇게 하면
추운 겨울이나 가뭄이 잦은 봄에
자라는 곡식이 추위와 가뭄에 잘 견디게 되어 추운 북쪽 지방에서도 작물을 재배할 수 있다
또 벼 수확이 끝난 논에 보리를 심을 수 있어 1년에 2모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농산물도 증가한다

조선후기 화가 劉運弘의 작품 ,길쌈
마루에는 여인이 옷감을 짜고 있고
마당에는 짠 옷감에 무엇인가 바르고 있습니다
씨아는 목화 솜에서 씨를 제거하는 기구입니다 암카락과 숫카락이 맞물려 돌아가는데
서로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며 솜은 앞으로 빠져 나오고 씨는 뒤로 떨어집니다
고려후기 몽고의 침략으로 국토가 황폐해지고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하여 고급 직물 특히 견직물의 생산이 침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구축한 조선왕조는 백성들에게 면업 잠업 (綿業 蠶業)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면업 장려 정책으로 한반도 전역에 목화를 재배하게 되었다
太祖1년 (1401년)에 백성들 上下모두 무명(목화 솜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世宗(재위 1418년~1450년) 때에는 下三南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재배되었던 목화가 北三道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까지
북상하여 한반도 전역에서 목화가 재배되었다
이에 따라 1423년(세종5년)에는 2,640필의 면포(綿布)를 일본에 수출하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의 면포는 사치품이었다고 한다
목화가 한반도 전역에 재배되어 백성들의 의복 생활은 그 이전 시대보다 더 다양해지고 풍부해졌다
고려말 문익점(文益漸)이 元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목화씨를 가져와 재배하게 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사실 木綿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
삼국시대 백제의 면직물이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되었다

백제의 면직물
중국 문헌 魏志 東夷傳에 의하면
馬韓은 그 민족이 토착하여 농사를 지었고 잠상(蠶桑)을 알고 면포를 지었다
弁韓은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좋고 잠상을 알았으며 絹布를 지었다 등 기록이 있다
1504년(燕山君10년)에 통직(通織)을 설치하여 옷감 생산에 실명제를 도입하여 고급 견직물을 생산하는데 노력하였다
그 결과 고급 견직물과 면직물의 생산 기술이 모두 발전하였다
1517년(中宗12년 13년)에는 농민을 계몽하고 양잠을 장려하는 蠶業정책을 시행하였다
이 시기는 옷감 생산이 관장제(官匠制) 수공업에서 민간 수공업으로 확산되는 시기이다
그런데 17세기 이후에는 임진왜란을 겪어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급 견직물의 생산이 위축되고
상대적으로 값이 싼 면직물의 생산이 더 확산되었다

조선시대 17세기 장기정씨 묘 출토 모란 넝쿨 무늬 옷감
조선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옷감 중에 옷감 전체에 화려한 연꽃이나 모란 무늬가 시문되어 있는 견직물은 대부분 16세기 이전 유물이고
17세기 이후 출토된 옷감은 화려한 무늬의 견직물보다 소박한 무늬의 면직물이 많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국가 경제의 어려움으로 고급 견직물의 생산이 감소했다

19세기 작품 누에 기르기 모습 ,김홍도 작품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1399년 조선 개국 후 최초 先蠶祭를 지내며 양잠을 장려했다
先蠶禮는 고려시대 부터 있어 왔고 왕실의 의례 중에 하나로
양잠의 神 서릉씨(西陵氏)를 모시고 누에치기의 풍요와 한해 동안 안정을 기원하는 행사다
1415년( 太宗15년)에는 충북 진천군에 양잠소(養蠶所)양잠소를 설치하여 명주실을 생산하였다
또 견직물 생산을 위해 잠업(蠶業)을 장려하는 의식 親蠶禮는 조선 후기 까지 거행되었다
親蠶禮는 왕비가 內外名婦의 여성들을 거느리고 蠶室에 행차하여 직접 누에를 치고 뽕잎을 따며 양잠의 중요성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의식이다
잠업(蠶業)의 역사는 삼한시대 기록이 있다 중국 後漢書권85 東夷列傳제75에 의하면
馬韓 사람들은 布로 만든 袍를 입는다 馬韓 사람들은 농사짓고 누에를 치고 면포를 만들 수 있다 등 기록이 있다

19세기 耕織圖 직물을 짜는 모습
민간에서 제작한 병풍 그림 중에 하나다

19세기 민간에서 제작한 耕織圖 8폭 병풍 중에 일부 ,비단에 채색 .
베짜고 염색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