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南韓暴徒大討伐作戰
일본군의 南韓暴徒大討伐作戰은 1909년 9월 부터 1909년 10월 ,약 2개월간 일본군이 의병들을
진압하기 위해 실시한 의병 소탕 작전이었다

프랑스의 武官 “레오 바이람(leo Byam)이 쓴 책에 실린 사진이다
‘EN 1906: RÉPRESSIONS JAPONAISES — LA PENDAISON
Au premier plan, ombrelles de mousmés et chapeaux japonais. — Dans plusieurs régions, et notamment dans les provinces du sud-ouest, des soulèvements éclatent contre l’autorité japonaise trop sévère et les envahisseurs rapaces et brutaux… mais le châtiment ne tarde guère
( 번역 :일본의 탄압
교수형 전경에는 여성들의 우산 일본식 모자 ,몇몇 지역 특히 남서부 지역에서는
지나치게 가혹한 일본당국과 포악하고 잔혹한 참략자들에 맞서 반란이 일어났으니 처벌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이 사진 언제 촬영된 사진일까? 시기를 알 수 있는 근거는 사진에 보이는 흰옷(白衣 ) 흰삿갓(白笠)의 군중들이다
흰옷이나 白笠은 조선시대 당시에 國喪이 있을 때 모든 국민이 착용했던 복식이다
국상(國喪)이 되면 모든 국민은 1년동안 白衣와 白帶 白笠을 착용해야 한다
그런데 대한제국 國喪기간은 러일전쟁과 시기가 겹친다
國喪은 태상왕 상왕 왕 왕세자 왕세손과 그들의 妃가 사망했을 때를 國喪이라고 하고 그 장례식을 국장( 國葬)이라고 하는데
대한제국 당시에 國葬은 2회 있었다
1904년 1월 2일 (음력11월15일) 明憲太后의 國喪이 있었고 1904년 11월 5일(음력 9월 28일) 純明妃 閔氏의 國喪이 있었다
1904년 1월 2일 부터 2년동안 國喪기간이었다
1906년 .1907년이면 이미 國喪기간이 끝나 있다 그러므로 이 사진은 이 시기에 촬영된 사진은 아니고 1904년에서 1905년 사이에
촬영된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진이 일본군에 의해 처형된 한국인 義兵사진이라고 알려져 왔는데 한국 일부에서 義兵사진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근거는 대한제국 법부에서 “약탈과 살인이 비일비재 하니까 특별히 단속하고 처벌하라” 라고 특명이 내려졌고 {1904년 3월 12일 훈령 13도 6항)
이후 1904년 3월 15일 漢城재판소 관할 죄수 12명이 漢城감옥 교수대에서 처형되어 다음날 시신이 군중들에게 공개되었다 등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례를 예를들어 저 사진의 사람들은 義兵이 아니고 강도들이며 일본군에 의해 처형된 것이 아니고 한국인 관리에 의해
처형된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러일전쟁 시기 대한제국의 義兵은 대채로 평민들로 구성되어 군복이나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평민들이 조직한 의병의 군복은 민간인의 복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성 재판소 관할 죄수 12명이 한성 감옥소 교수대에서 처형되었다는 기록으로
저 사진은 일본군에 의한 의병 처형 사진이 아니고 대한제국 관리에 의한 죄수의 처형이라는 정확한 근거도 없다
사진을 보면 사람들이 서로 겹쳐서 죄수들의 시신이 12명인지 불확실하고 얼굴도 알 수 없고 시신이 공개된 장소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저 집단적으로 공개된 시신들이 도둑인지 義兵인지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의 武官 ( leo Byam)이 쓴 사진에 대한 설명 즉 (교수형 전경에는 여성들의 우산 일본식 모자 ,몇몇 지역 특히 남서부 지역에서는
지나치게 가혹한 일본당국과 포악하고 잔혹한 참략자들에 맞서 반란이 일어났으니 처벌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설명은 일본군의 남한폭도대토벌작전 (南韓暴徒大討伐作戰)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南韓暴徒大討伐作戰에서 南韓은 삼남(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지역을 말하는 것이고
서남부 지역은 전라도 지방을 말한다 전라도 지방은 한국 제일 곡창지대이기 때문에 일본의 약탈 행위가 심했던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라도 지방은 항일의식이 강했고 의병들의 항일 투쟁이 가장 격렬했던 곳이다
따라서 일본은 특히 이 서남부 지방의 의병들을 집중적으로 진압하고자 하였다
사진은 프랑스 武官 (leo Byam)이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있었던 南韓暴徒大討伐作戰에 관한 글을 쓰면서 1904년 공개처형 사진을 인용한 것이라고 짐작된다

일본군의 南韓暴徒大討伐作戰으로 체포된 호남지방 의병장 (義兵將)이다 모두 16명이며 이 중에 14명은 사형당했다고 한다
이 사진 南韓暴徒大討伐作戰 기념 사진첩에 수록되어있다
의병들의 이름은 뒤에 오른쪽 부터 나성화(羅聖化) 박사화(朴士化), 강사문(姜士文) 김유성(金有聲) 안주홍(安主洪, 본명 安圭洪)
전해산(全海山) 심남일(沈南一) 양진여(梁鎭汝) 김원국(金元局) 황두일(黃杜一)
앞에 오른쪽 부터 이영준(李永俊) 강무경(姜武京) 모천연(牟千年) 이강산(李江山) 이강산(李江山) 송병운(宋丙雲) 순으로 기재돼 있다
일본군의 南韓暴徒大討伐作戰은 1909년 9월 부터 1909년 10월 ,약 2개월간 일본군이 서남부 즉 전라도 지방의 의병들을
진압하기 위해 실시한 의병 소탕 작전이었다
南韓暴徒大討伐作戰에서 南韓은 삼남(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지역을 말하는 것이고
서남부 지역은 전라도 지방을 말한다 전라도 지방은 한국 제일 곡창지대이기 때문에 일본의 약탈 행위가 심했던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라도 지방은 항일의식이 강했고 의병들의 항일 투쟁이 가장 격렬했던 곳이다
따라서 일본은 특히 이 서남부 지방의 의병들을 집중적으로 진압하고자 하였다
■ 丁未義兵
丁未義兵은 1907년 부터 1910년 사이에 일어난 抗日,義兵부대다
대한제국은 주변국의 전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1904년 1월 23일에 엄정 중립을 선언했지만
2월8일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대한제국을 일본의 세력권에 넣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서울과 慶運宮 德壽宮을 점령한 후 2월 23일 대한제국 정부를 협박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체결하였다
한일의정서 제4조에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제국 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수용할 수 있을 것 라고 하였다
일본은 이 한일의정서 제4조를 근거로 한국에 철도 부설에 따른 방대한 토지를 요구했다
철도 부지에 들어가는 토지는 대부분 가옥 논밭 묘지 등 민간인들의 사유지였는데 토지 보상비 지급 문제를 둘러싸고 분규가 발생했다
한국 정부가 제시한 보상 금액은 평당 17錢이었으나 실제로 보상 금액은 市價의 2분의 1 , 5분의 1에 불과한 평당 7.6錢이었으므로
일본은 거의 무상으로 철도 부지를 약탈한 것이었다
거주지와 토지를 잃은 민간인들은 스스로 義兵이 되어 일본군에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일본은 1904년 3월 후비보병 24연대 약 4.272명을 서울 부산 원산에 집중 배치하였다
러일전쟁 후 1905년 10월 보병 제13사단 보병 제15사단 병력 약18.398명을 한국에 주둔시켜 서울을 점령한 후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였다
을사조약 ,대한제국 군대 해산 .고종 강제퇴위 등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과정에서 의병 활동은 더욱 격렬해졌다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된 군인들이 기존 의병에 합류하게 되어 의병의 전투력은 더욱 향상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에 비하면 의병은 무기가 열악하고 탄약도 크게 부족하여 근대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수많은 희생을 안았다
이것은 일본군에 의한 의병의 학살로 이어졌다
1905년 11월 17일 한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었다
1907년 6월 高宗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보내고
을사조약은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것이며 무효라는 것을 세계에 폭로하며 을사조약을 파기하려고 노력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실패한다
일본은 이<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켜 버린다
일본은 1907년 3월 제 13사단을 한국에 주둔시키고 15사단을 철수시켰다
■ 대한제국 군대 해산

1907년 8월 10일 프랑스 잡지 (르 푸티 주르날 )에 실린 삽화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일어난 남대문 전투
日帝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는 1908년 8월 1일 부터 서울 진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9월 3일까지 전국 지방의 군대까지 해산되었다
강제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들은 乙巳義兵 (을사조약 당시에 일어난 의병)에 합류하게 되고 의병 활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대한제국 육군

전국적으로 확산된 義兵은 그 이전 보다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어 위협을 느낀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 義兵을 잔혹하게 진압하게 된다
일본군은 의병의 거점과 관련된 마을을 불태우고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특히 1909년 일본군의 南韓暴徒大討伐作戰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되었고 1만 6.700명의 의병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陣中日誌>에 나타나 있다
陣中日誌는 1907년 7월 23일에서 1909년 6월 19일까지 한국인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한국에 파견된 일본군 보병 제14연대의
활동을 기록한 문서다

한국에 파견된 일본군 보병 제14연대
일본은 1907년 7월 23일 보병 제14연대를 포함하여 1개 여단 병력을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일본군 보병 14연대는 1907년 7월 25일 일본 모지항을 출발하여 다음 날 7월 26일 오전 6시 40분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일본군 보병 14연대는 정규군으로 서울의 용산 영등포와 대구 광주 등 한강 이남 지역에 배치되었다
1개 여단은 2개 연대로 편제되었는데 小倉에 사령부를 둔 보병 제12사단에서 1개여단(보병 제12여단)을 편성하여 한국에 파견하고
한국 주차군 사령관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
제12여단은 여단 사령부와 제14연대 제47연대로 편성하였다
제12여단은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 작전에 투입되었다
■의병과 민간인 학살
진중일지에 따르면 1907년 7월에서 1908년 5월까지 한국인 의병의 희생자는 13.445명이고 일본군 사상자는 115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토벌지>에 따르면 1907년에서 1910년 까지 일본군과 의병의 전투는 2.819회 있었다
이때 참전한 의병은 4만명이고 이 중에 17.688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토벌지>는 1913년 3월 30일 日帝의 한국 주차군 사령부에서 발간한 日帝의 의병 탄압의 기록이다
그런데 이것은 일본측 기록이고 한국측 기록 <한국독립 운동 之血史 >에 따르면
군대 해산 무렵 1907년 8월에서 1908년 12월 사이에 희생된 항일 의병은 10만명이 넘고 양민 피살자는 그 통계를 구할 수 조차 없다
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