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1918년 자국에서 일어난 쌀 폭동을 겪은 후, 자국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을 식량기지로 만들려는 의도로 ‘산미증산계획’을 세웠다.
단위: 천석千石
지금의 군산시 부두항 쌀이 산더미처럼 쌓인 내항의 모습이다. 하루 150량의 화차가 가동되었으면 화차 전체가 바로 배에 실렸다.

부잔교란?:부잔교 [浮棧橋, floating pier]
부두에서 폰툰(pontoon:물에 뜨도록 만든 상자형의 부체)을 물에 띄우고 그 위에 철근콘크리트 ·강판 ·목재로 바닥을 깔아 여객의 승하선 ·화물의 적양(積揚)에 편하도록 만든 구조물이다. 폰툰을 해저에 체인 ·와이어 로프로 고정시키고 그 위에 설치한 간이부두로서, 조석 간만의 차이가 큰 곳에서 많이 이용된다.
뜬다리 (부잔교)
밀물 때 다리가 수면에 떠오르고 썰물 때 수면만큼 내려가는 수위에 따라 다리의 높이가
자동으로 조절되는 선박의 접안 시설물이다.
하루 1백50량 貨車를 이용하여 호남평야의 쌀들을 이 다리로 일본에 반출하였다.
일본이 한국의 농업을 발전 시키며 1910년 생산량을 100이라고 한다면 중간에 그 시기적 상황에 따라 변동이 있지만 1차 산미증산 사업이 시행 된 1920년에는 이미 143로 1.4배 증산되어 있으며 그 사업의 결과로는 1926년에는 147로 약간의 증가 2차 산미증산 계획의 결과로 1934년에는 161로 증가하며 전쟁의 말기에 다다른 1944년에는 154로 감소 추세가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의 통치 기간 전반에 걸쳐 조선의 미곡 생산량은 최대 2배 평균적으로 1.5배 증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와 함께 조선의 미곡 수출량은 증가하여 그 앞서 미곡 생산량이 어떻게 변화를 하던 말던 거의 기하급수적인 증가 추세 속에 대략 1910년 이후 7배~ 10배의 수출 증가량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한마디로 조선에서의 미곡 생산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미진한 증가를 보이지만
조선에서 일본으로의 미곡 유출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멜서스가 말한 인구증가에 따른 인류 종말론이
단지 식민 정책으로 실현되는 이 현상을 두고
보통 생산량 증가가 곧 일본으로의 미곡 반출을 위한 정책의 증거로
착취의 전형이라 평가하지만 일단은 무시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에 의한 조선 농업 개발의 성과를 검토해 보겠습니다.
농업 생산력 증가의 요인으로 크게 3가지인 1. 경지 면적의 증가, 2. 관개시설 등 기반 시설의 확 중 3. 품종개량을 통한 다수확 품종의 보급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