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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허술한 역사청산 뒤로 반일감정 싹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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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허술한 역사 청산 위로 반일감정 싹터 <!-- 기자 --> <!-- 본문 Start-->
<!-- 사진 1 -->
<!-- 사진 설명 -->일부 일본 정치인과 학자들은 난징 대학살이 조작된 허구라고 주장한다. 사진은 난징대학살 당시 사람을 생매장하는 일본군. ⓒ미디어다음 ""일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최근 중국 "중국청년보"가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83.9%의 중국인이 "난징(南京) 대학살"이라고 답했다. "친밀감이 없다"가 41.5%로 그 뒤를 이었다.

중일간의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양국간의 해결되지 않은 앙금은 여전히 남아 있다.

중국은 일본 제국주의에 침략을 당한 아시아 국가 중에서 자신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고 주장한다. 1946년 중국국민정부 행정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쟁 당시 인명피해는 1040만 명, 재산 피해는 313억 달러에 달했다. 중국 정부는 90년대 초 새로운 통계를 통해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으로부터 3500만 명의 인명 피해와 약 6000억 달러의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고 밝혔다.


전쟁보상 없었던 중일 수교

이렇게 큰 고통을 당했지만 전후 처리 과정에서 중국은 그 한을 제대로 풀지 못했다. 46년부터 48년까지 열린 전범 재판에서 난징 대학살 등 일본군 관련자들은 전쟁 행위에 대한 처벌만 받았을 뿐 세균전, 화학전, 성폭력 등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처벌 받지 않았다.

주성산(朱成山) 남경일본교과서문제 연구회 회장은 "당시 전범 재판에 중국은 최대 피해국가로서 법관과 검찰관을 파견했지만 서방의 법관, 검찰관에 비해 지위가 낮았고 그 역할도 제한적이었다"고 말했다.

72년 중국이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과정 또한 순탄치 못했다. 52년 체결한 일본과 대만간의 평화조약(일대조약)을 근거로 일본은 중국의 배상 요구를 끝까지 거부했다. 결국 중국은 "일본 인민들에게 중국이 한때 겪었던 배상의 고통을 주지 않겠다"는 명분으로 배상요구를 포기해야만 했다.

과거사를 성급히 봉합한 부작용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90년대 중반부터 일본인 학자와 정치인, 관료들로부터 "난징 대학살은 허구"라는 주장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 사진 2 -->
<!-- 사진 설명 -->계속되는 정치인 망언과 관광객 매춘 등으로 중국 내 반일 감정이 극에 달했다. ⓒ한겨레21 "전쟁터라면 2, 3천명 학살 정도는 허용될 수 있다", "대량학살이 자행된 객관적 증거가 없다", "30만명 학살이 사실이라면 일본군 진주 후 인구가 20만에서 25만 명으로 증가했다는 기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 "학살, 강간 등 어두운 측면만 지나치게 강조했다" 등의 발언이 쏟아졌다. 2000년 9월에는 우익단체들이 난징 대학살을 부정하는 집회까지 열어 중국과 외교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일본의 이 같은 태도는 결국 2001년 왜곡된 역사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됐다. 일부 출판사가 난징 대학살을 다루며 살해된 중국인 수를 삭제한 것이다.

"그 해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했다. 당시 도살한 20만 명 중에는 부녀자와 아동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동경서적 97년 심사본)

"그 해 난징을 점령했다. 부녀자와 아동을 포함한 많은 중국사람을 살해했다. 이 사건이 바로 "난징 사건"이다."(같은 출판사 2002년 심사본)

중국에 대한 침략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침략"이라는 용어 자체도 삭제됐다. 오사카서적 97년 심사본에서 "전면중국침략과 전시체제"라고 표시된 항목이 2002년 심사본에서는 "일중 전쟁의 확대와 국민생활"로 수정됐다. "국민정부는 끝내 공산당과 통일 전선을 실현해서 일본의 침략에 대해 투쟁을 진행했다"는 부분은 "국민정부는 공산당과의 투쟁을 정지하고 항일통일전선을 조직했으며 일본과의 전투를 결심했다"라고 바뀌었다.

피해 보상과 관련된 문제도 불거지고 있다. 지난 8월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치치하르(齊齊哈爾)시의 한 건설현장에서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버리고 간 겨자가스가 폭발해 1명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부상한 사건이 터졌다.

중국은 피해 보상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72년 수교협정을 근거로 이를 거부했다. 결국 이 사건은 중국인들이 100만 명 항의 서명을 전달하고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일본은 역사를 거울로 삼고 미래를 향해 가야 한다"는 뼈있는 발언을 한 후에야 정치적으로 마무리됐다. 일본이 "무기 처리비" 명목으로 3억 엔(약 30억원)을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중국, 반일 감정 최고조

외신에 따르면 중국의 반일 감정은 지난 11월 들어 최고조에 달했다. 지난 9월 일본인 관광객 집단 매매춘 사건에 이어 10월 말 시안(西安)의 한 대학에서 일본인 유학생들이 음란 공연을 벌인 것이다. 이 사건은 중국 학생들이 일본 유학생들을 폭행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여기에 이시하라 신타로 일본 도쿄도지사는 11월 1일 "중국의 첫 유인우주선은 시대에 뒤진 것"이라는 발언을 해 반일 감정에 기름을 부었다. 이날 벌어진 학생, 시민들의 반일 시위에는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까지 등장했다.

오광의(吳廣義)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은 "최근 일본의 행보는 다시 한번 중국 인민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있다"며 "일본은 중국 정부가 아닌 민간에서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11월 21일자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베이징 "항일전쟁 기념관"의 마지막 전시실에는 일본 헌법 제9조가 전시되어 있다. 일본 헌법 제9조에는 "영구적인 전쟁포기" "군대 보유 금지" "국가의 교전권 불허"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일본의 전후 책임을 묻는다"의 저자 다카하시 데츠야는 이에 대해 "일본군의 침략을 두 번 다시 허용할 수 없다는 중국의 결의가 담겨 있다"고 소개했다.

중국은 과거를 잊지 않고 일본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1. 기본시각
강만길 교수가 이조 오백년을 "왕과 신하의 싸움"으로 묘사를 했다면
중국의 역사는 "중원의 경제적 풍요를 이용한 한족 농경민과 주위 유목민의 헤게모니 쟁탈"로 묘사할 수 있읍니다. 한족이 중심이 될때는 문화적 우월의식하에 천자에게 조공과 하사명목으로 교역이 이루어졋고, 유목민(또는 유목민 사고)이 중심이 될때는 대카칸으로서 중원의 물자를 이용한 질서와 평화의 유지입니다.

2. 중화사상의 변천
우리가 알고있는 오랑캐는 殷周시대의 표현으로
동이(산동지역), 서융(주나라때 호경의 서쪽), 남만(아마 장강남쪽), 북적(황하고원 지역: 섬서, 감숙지역)는 춘추전국시대를 지나며 중원과 흡수되어 버렸지요.

秦漢시대에 유교가 자리잡으며 한족중심의 中華사상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나 이시대도 흉노와의 또다른 南北國시대며 前後漢 400여년을 통털어 우위는 한무제때의 20여년이엇읍니다(서역경영). 대부분 漢이 신하나 동생의 위치였지요.
다만 한족중심의 기록을 남긴 자들의 곡필이 현재까지 남아잇읍니다(王昭君 사건도 이때 일로 많은 한족의 눈물을 자아내게 했으며 현재는 中-蒙우호의 상징).

춘추전국과 마찬가지로 삼국시대처럼 한족내의 패권경쟁이 치열할 때는 유목민의 군사력이 적극적으로 흡수됩니다. 西晉이 냉소와 八王의 난으로 중원을 五胡十六國(남북조시대)에 내어준 후 漢族은 강남에서 명맥을 유지할 뿐 주류에서 사라집니다. 漢化된 유목민(남북조,수당)에 의한 유목민과 농경민을 아우르는 진정한 동양의 통일제국이 나타나지요(이때도 발해, 신라는 天子의 귄위만 인정).

한족의 나라 宋이나 明의 시대도 명의 永樂帝때를 제외하곤 힘의중심은 북쪽의 療,金 또 蒙古에 있었으며(漢族의 天子가 신하나 동생의 위치). 療의 유목민-한족농경민 이중통치제도 創案으로 유목민에 의한 한족의 직접통치가 가능해져 중국전체가 유목민의 통치에 들어옵니다(元, 淸).

이후 "中華思想"은 "東洋全體"를 의미하며 天子는 天命에 의해 동양 제민족의 평화와 화합을 주재한다는 개념이지 오늘날의 國家槪念이 아닙니다. 통치형태는 유목민은 위임통치로 농경민은 직접통치의 형태입니다.

현대의 중국은 淸의 개념을 받아들였으나 국가라는 개념은 옛날과 다르지요. 天子는 超國家의 주재자며 동양의 질서를 상징합니다(서양 중세의 교황과 비슷).
天子에 대한 권위인정을 현대의 국가개념으로 확대하여 屬國 또는 植民地 운운한다면 어불상설이지요. 특히 한국에는 한번도 官吏하나 파견할 수도 없었는 데... 오히려 현재의 대다수 중국인이 피지배층이지요.

4. 한국의 역사이해
한국의 중국에 대한 慕華思想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선진문물과 동양전체를 대표하는 천자에 대한 권위인정은 동양전체의 사고지요. 한국도 중국에 정통천자가 없을 때는 자체의 연호를 썼으며(예: 고려 광종) 정통이 인정되면 다시 중국연호를 썼지요. 천자 쟁탈전이 벌어질 때 가담하는 편에 따라 전쟁이 벌어졌읍니다. 안정되면 인정을 했고요(고려:요 또는 송,원 또는 명 ; 조선 : 명 또는 원, 청 또는 명).

이것은 동양의 역사이며 가치관입니다.

한국은 중국과 같이 자급자족이 가능한 국가로 약탈과 지배목적으로 전쟁을 만들어 민생을 희생시킬 필요는 없었지요. 그러나 침략에는 단호했으며 한번도 직접지배를 당한 적은 없습니다(한사군은 전부지배로 보기어려우며 일본침략이 유일함). 극동에서는 일본과 더불어 유일함(일본: 미국 1회, 한국: 일본 1회).

다만 아쉬운 것은 청에 무릅을 꿇은 후 儒學의 명분으로는 인정할 수 없어 문화국이 무식한 오랑캐에 당한 强奸(?)으로 치부하고 "小中華"의 자기도취로 갔다는 것입니다(임진란이야 그래도 이겼으니 이야기가 됩니다만). 남송과 같이 한족의 정신적 自慰를 취해버렸지요(혈통적 중화사상은 남송이후 사라지고 天子아래 정치적 中華사상이 주류를 이룸). 이때이후 明에 대한 숭배가 나타나고 명의 遺志를 계승하는 地名도 현재까지 이어짐니다. 청이 얼마나 웃었을 지?

3. 일본에 대한 역사이해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역사곡필 전통을 받아들였지요.
중국이나 한국의 입장에서 일본은 섬과 산으로 분리된 가난하고 낙후하고 지네끼리 전쟁이나하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후진국이었읍니다. 만일 탐낼 문화나 물산이 있었다면 明의 永樂帝때 정화의 南征이 아니라 東征도 있었겟지요. 역사적으로도 동양의 사회에서 끼워주지않아(국교단절, 무역금지) 교역조건 개선을 위해 약탈이나 전쟁을 했지요. 다만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열심히 얻어간 한국과 중국의 옛날문화가 보존되어 있지만 도구가와 이전 동양에 기여한 문화는 없읍니다.

같은 혈통의 천황제가 2000년을 유지햇다고 자랑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어리석음과 폐쇄성의 상징이지요(이디오피아면 모를까). 전세계 어느 문명국에서도 그런 우직한 전통을 보지 못햇으며, 문명이란 합쳐지고 계승되며 발전하는 것이지 하늘에서 獨自로 떨어질 수 없지요. 그래서 神國으로 밖에 설명못하겠지만.

16세기까지 도자기하나 못만든 나라, 옷도 문자도 음식도 어정쩡한 분열된 戰國時代였지요(2000년전의 중국 戰國時代 재현:명목상 천자에 군웅할거). 난파된 한국과 중국인이라도 하나 건너가면 무조건 상전으로 모셨고 노예근성의 가난한 백성만 존재하는 나라아니었나요? 조그만 천으로 팬티하나 걸치고 칼든 모습이 倭에 대한 인상이었지요.

일본이 동양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 것은 명의 후대(아마 신종때 北虜南倭시기 :지금도 소주에는 척계광의 塑像이 있음, 이후 통일전쟁으로 조용했다 통일후 임진왜란으로 나타남)이며 임진왜란을 통해 결정적으로 문화의 유입과 함께 교류가 일어나며 동양의 역사에 나타남니다. 또 서양과의 교역도 중요한 역활을 하지요. 이후 청과 조선의 쇠퇴와는 다른 새로운 길을 걷게되며 서구의 우위와 함께 오늘날로 이어집니다.

일본의 근대는 동양을 뛰어넘어 서양으로 가는 대단한 역작이며 일본의 지방분권 문화의 善政경쟁, 희생적인 선각자가 갖는 국가주의의 모범이었지요. 동양의 미덕(영웅만들기, 조직에 대한 희생)과 서양의 합리성, 실리주의의 장점이 결합된 역사상 보기드믄 국가개조였고 和魂洋才의 모범이었읍니다. 근대의 동양의 서양에 대한 認定의 거의 100%가 일본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지요. 지금도 일본은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大國이지요.

그러나 여기까지 입니다. 일본의 문화, 사고는 일본내의 일이며 졸부를 지나 모범까지는 인정하나, 동양을 대표할 지도국가로서는 아니지요. 단지 하나의 국가로서 뛰어났지 超國家의 天子는 무리였습니다. 사람으로서는 뛰어나고 돈도 벌었으나 조상까지 우기는 격이라 생각합니다. 대동아 공영의 구호자체에는 동의하지만 말로만의 구호였지요. 이제는 보통국가로 가고있지만...

우리가 일본에 두번의 침략을 당했지만 그것은 중국과의 수십번의 전쟁과 다름니다. 중국과는 형,아우의 겨루기 즉 認定의 문제지만 일본은 우리를 직접 지배하려는 목적이었읍니다. 겉으로는 표시하지 않지만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짝사랑은 유별나지요. 또 우리는 같은 조상일지도 모름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창피하다면 놔둡시다. 어차피 시간이지나면 밝혀질 일이고 그들은 동양이 아닌 모양이지요. 영국도 로마의 지배를 받아 자기네는 문명국이었고 로마에 저항한 독일은 미개인으로 간주라는 데...

그러나 권불십년이고 3대부자 없듯이 韓中에게 불행이었던 근대 200년도 지나가고 있읍니다. 문명이 있었다면 찬란한 역사도 있지요. 찬란한 역사가 없었으면 문명도 없었지요. 아무리 우겨도 애비없는 자식은 없는 법입니다. 고기잡는 방법을 아는 어부는 고기를 빼앗겨도 다시 고기를 잡을 수 있읍니다. 그것이 문화지요.

일본을 보면 주변국에 쌓은 원한을 어떻게 풀려는 지 걱정됨니다.
역사왜곡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자기네가 살려는 목적이지요.

쪼그리고 자면 지금은 자기보호야 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해서 시간이 지나면 곱사등이가 되는 것을 왜 모를까?
한번 지켜봅시다!

4. 한국의 중국일본에 대한 이해

저의 역사인식의 많은 부분은 일본의 중국벗기기에서 많은 것을 얻었읍니다. 지금은 전세계의 역사나 책을 흔히 볼 수 있어 쉽고요. 역사학자들에게 시간의 문제지 곡필을 바로 잡는 거야 어렵지않다 생각합니다.
한국은 克日에서 역사를 시작하여 투쟁사, 독립국, 단일민족등등의 우리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우리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읍니다. 그러니 저같은 필부도 전공도 아닌 역사에 관심을 갖지요.

중국에 대한 이해는 중국에 관심을 가지며 시작하게 되었구요. 우리가 일본의 사관에 대응하려는 급한 마음에 중국의 필요한 부분을 발췌하며 대응해 왔고 또 그중국의 역사도 사실과 관계없이 붓가는 대로의 왜곡이라는 것을 이제 알기 시작하지요.
저는 제사진뒤의 지형도를 하루에도 수십번씩 봄니다.

저 거대한 중국옆에서 어떻게 한국이 끝까지 한국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가질 수 있었을까? 참 대단한 나라라는 생각을 합니다.
역사인식은 여기서부터 출발해야만 합니다. 남의 기록에서 자기를 찾으려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며 단지 참고사항이며 왜 그렇게 썼느냐를 생각해야지요.

저는 고급연구원이라 일본도 중국도 미국도 마음만 먹으면 國籍을 취할 수 있읍니다. 그사람들을 만나고 알게되며 저는 한국인으로 살아가렴니다.
건강하고 분투하는 한국인의 삶을!

5. 당부의 말과 역사학도들에 대한 부탁

옛것을 미루어 오늘을 알며 역사는 반복된다라고 합니다.
2백년전까지는 동의 할 수있읍니다.
그러나 현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판이지요.
과학과 통신의 발달은 또 좁아진 지구는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질을 배양하는 문화적 토양으로 이야기하지, 침략과 지배의 우월주의가 가치일 수는 없다생각합니다.

中華사상도 일본의 皇國사관도 자국내의 愚民을 궐기시키는 데는 효용이 있읍니다.
그러나 역내를 벗어나면 왕따만 만들지요.
더이상 중국은 세계의 전부가 될 수 없읍니다. 훌륭한 시민을 만들 수 있는 중국이라면 세계의 존중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大兄이 되겠지요.

역사학도들에 드리는 부탁은
기록과 자구해석에 말려들지마라 하고 싶슴니다.

총의 발명과 더불어 유목민의 농경민에 대한 외형상의 우위는 끝났읍니다.
요하를 1차, 장백산맥을 2차 방어선으로 하는 고구려는 唐이라는 세계제국의 백만이 아니라 천만대군도 깰 수 없었지요(당시의 보급과 비용을 계산해보시지요).
당의 세계주의에 만주지역이 정신적으로 흔들린 것이지요.

일본이 백제를 구하기 위해 백마강에 들어 왔을 때의 전술기록을 보시죠. 일패도지했지요. 그정도의 무장과 전술수준이라면 당연 임나일본부도 있을 수 없읍니다. 몰래 해안가에 들어와 약탈이나 하는 정도라면 모를까?

문명에 神의 자식은 없으며 모두가 하나하나 배우며 깨우쳐간 것아닌가요?

계량을 통한 수치계산과 당시의 사고를 이해해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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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不始末な歴史清算後で反日感情芽ぐんで

中, 不始末な歴史清算の上で反日感情芽ぐんで <!-- 記者 --> <!-- 本文 Start-->
<!-- 写真 1 -->
<!-- 写真説明 -->一部日本政治家と学者たちは南京大虐殺が操作された虚構だと主張する. 写真は南京大虐殺当時人を生き埋めする日本軍. c。メディア次 ¥"日本¥"すれば一番先に浮び上がることは? 最近中国 ¥"中国青年補¥"が実施したアンケート調査結果 83.9%の中国人が ¥"南京(南京) 大虐殺¥"と返事した. ¥"親しみがない¥"が 41.5%でその後を引き継いだ.

中日間の戦争の終わってから半世紀が経ったが両国間の解決されない沈澱物は相変らず残っている.

中国は日本帝国主義に侵略にあったアジア国家の中で自分たちの被害が一番大きかったと主張する. 1946年中国国民政府行政院が調査したことによれば戦争当時人命被害は 1040万名, 財産被害は 313億ドルに達した. 中国政府は 90年代初新しい統計を通じて 1931年から 1945年まで日本から 3500万名の人名被害と約 6000億ドルの経済的被害を被ったと明らかにした.


戦争補償なかった中日修交

こんなに大きい苦痛にあったが前後処理過程で中国はその恨みをまともに晴ら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 46年から 48年まで開かれた戦犯裁判で南京大虐殺など日本軍関連者たちは戦争行為に対する処罰だけ受けただけ細菌戦, 化学戦, 性暴行など犯罪行為に対しては処罰されなかった.

走性山(朱成山) 南京日本教科書問題研究会会長は当時戦犯裁判に中国は最大被害国家として法官と検察官を派遣したが西方の法官, 検察官に比べて地位が低かったしその役目も制限的だったと言った.

72年中国が日本と国交を正常化する過程も順調ではなかった. 52年締結した日本と台湾間の平和条約(一帯条約)を根拠で日本は中国の賠償要求を最後まで拒否した. 結局中国は ¥"日本人民たちに中国がひととき経験した賠償の苦痛を与えないだろう¥"は名分で賠償要求をあきらめ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すぎ去った事を性急に縫合した副作用は今までつながっている. 90年代中盤から日本人学者と政治家, 官僚たちから ¥"南京大虐殺は虚構¥"という主張が流れ出始めたのだ.

<!-- 写真 2 -->
<!-- 写真説明 -->続く政治家妄言と観光客売春などで中国内反日感情が極まった. c。ハンギョレ21 戦地なら 2, 3千名虐殺位は許容されることができる, ホロコーストが恣行された客観的証拠がない, 30万名虐殺が事実なら日本軍真珠後人口が 20万から 25万人で増加したという記録をどんなに説明することができるのか, 虐殺, 強姦など暗い側面だけ通り過ぎるように強調したなどの発言が零れ落ちた. 2000年 9月には右翼団体たちが南京大虐殺を否定する集会まで開いて中国と外交摩擦をもたらしたりした.

日本のこのような態度は結局 2001年歪曲された歴史教科書にそのまま反映された. 一部出版社が南京大虐殺を扱って殺害された中国人数を削除したのだ.

その年日本軍は南京を占領した. 当時屠殺した 20万人の中には婦女子と児童たちも含まれていた.(東京書籍 97年審査本)

その年南京を占領した. 婦女子と児童を含んだ多くの中国人を殺害した. この事件がすぐ ¥"南京事件¥"だ.(同じ出版社 2002年審査本)

中国に対する侵略を敍述する部分で ¥"侵略¥"という用語自体も削除された. 大阪書籍 97年審査本で ¥"全面中国侵略と戦時体制¥"と表示された項目が 2002年審査本では ¥"日中戦争の拡大と国民生活¥"で修正された. ¥"国民政府は結局共産党と統一電線を実現して日本の侵略に対して闘いを進行した¥"は部分は ¥"国民政府は共産党との闘いを停止して抗日統一電線を組織したし日本との戦闘を決心した¥"と変わった.

被害補償と係わる問題もはみでている. 去る 8月中国黒竜江城(黒竜江省) チチハル(斉斉哈爾)時の一建設現場で 2次大戦当時日本軍が捨てて行くからしガスが爆発して 1人が死亡して 40余人の負傷した事件が起こった.

中国は被害補償を要求したが日本は 72年修交協定を根拠でこれを拒否した. 結局この事件は中国人たちが 100万人抗議署名を伝達してワンザバオ中国総理が日本は歴史を鏡にして未来を向かっ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挫いている発言をした後こそ政治的に仕上げされた. 日本が ¥"武器処理費¥" 名目で 3億円(約 30億ウォン)を支給する事にしたのだ.


中国, 反日感情最高潮

外信によれば中国の反日感情は去る 11月に入って最高潮に達した. 去る 9月日本人観光客集団売買春事件に引き続き 10月末試案(西安)の一大学で日本人留学生たちが淫乱公演をしたのだ. この事件は中国学生たちが日本留学生たちを暴行をはたらく事態につながった.

ここにIshiharaShintaro日本東京都支社は 11月 1日中国の初有人宇宙船は時代に立ち後れたことだという発言をして反日感情に油を注いだ. この日起った学生, 市民たちの反日デモには日本帝国主義を打倒しようという掛け声まで登場した.

五光の(呉広義) 中国社会科学院研究員は最近日本の歩みはもう一度中国人民の感情をいたむようにしていると日本は中国政府ではない民間で日本の戦争責任を問わ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声が高いという点を注目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った.

11月 21日付け ¥"ハンギョレ¥" 報道によれば北京 ¥"抗日戦争記念館¥"の最後のショールームには日本憲法第9条が展示されている. 日本憲法第9条には ¥"永久的な戦争放棄¥" ¥"軍隊保有禁止¥" ¥"国家の交戦圏不許¥" などの内容が込められている.

¥"日本の前後責任を問う¥"の著者高橋デツヤはこれに対して日本軍の侵略を二度と許容す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中国の決意が盛られていると紹介した.

中国は過去を忘れないで日本を見詰めているのだ.

1. 基本視覚
ガングマンギル教授が朝鮮王朝五百年を王と臣下のけんかで描写をしたら
中国の歴史は中原の経済的豊饒を利用した漢族農耕民と周り遊牧民のヘゲモニー取り合いで描くことができます. 漢族が中心になる時は文化的ウワルウィシックハに天子に朝貢と下賜名目で交易が成し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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