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公州)에
왔다. 공주는 삼국시대에는 웅진(熊津)으로 불렸으며 475년부터 538년까지 백제의 찬란한 수도였다.

공주의 가슴에 무령왕릉의 혼백을 품고있다는 것은 기적이다..
무령왕릉마져 없었다면 공주는 한낱 뜬소문 이야깃거리로 가득한 관광지에 불과했을 것이다.

공주 송산리고분군은
백제 고분군으로 공주를 도읍으로 정했던 시기의 백제 왕들의 무덤들이 여럿 산재해있다.
이 무덤이건 저무덤이건 무참이
도굴되고 파헤쳐져 빈 통조림 깡통들로 버려진 유적지에 불과했다.
일제치하에서 부터 백제왕들의
무덤군인 백제고분군은 도굴되고 문화재는 오장육부가
파헤쳐 유실된 처참한 현장이었다.

일제치하 백제고분군이 아주 본격적이고 체계적으로 이 고분군의 유적들을 도굴한 사람은 이른바 일본의 백제학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1970)"이라는 몹쓸 일본인 학자이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한문학과 출신으로 1927년에서 40년까지 공주고보에서 일본어 담당 교사로 일하면서 공주지방에 산재한 백제의 고분 중 무려 1천기에 달하는 백제 고분을 제 멋대로 파헤치고 발굴문화제를 도굴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마디로 고고학을 가장한 도굴업자요, 역사학자를 가장한 침탈자였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공주고보의 조선인 학생들을 동원하여 공주와 부여에 위치한 백제 고분들을 무단으로 파헤치고 도굴한 후, 그 부장품들을 깡그리 일본으로 밀반출했다.
그는 일제 패망 뒤 본국으로 돌아가 니혼대학 교수를 역임하면서 백제학에 대한 수많은 논문을 썼다. 해방후 그의 이런 행적 때문에 가루베는 많은
유물을 일본으로 빼 돌린 인물로 지목돼 그동안 수차례 그를 직접 찾아가 유물반환을 요청했다.
한국의 줄기찬 문화재 반환요구에도 그는 단 한가지도 가져온게 없다고 발뺌으로 일관했다.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유족들이 훔친 소장품을 보내겠다고 하였으나 어처구니없게도 그의 소장품은 기와 4점뿐이 없다고 발뺌하며 그 기왓장 넉장을 국립공주박물관에 반환했다.
그 반환도 그가 생전에 명지대학에 와서 <백제의 문화유산>을 특강하러 왔다가 강연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가자마자 1970년 죽었는데 그가 죽은 후 가루베 유가족이 일본의 국립나라박물관에 위탁한 삼국시대 연화문(蓮花文) 기와 완형 2점과 조각 2점을 그의 니혼대학의 제자인 미와 가로쿠(三輪嘉六) 일본 규슈박물관장을 통해 한국에 반환 한 것이다.
백제 무령왕릉은 그가 죽자마자 일년뒤 1971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세상에 나타났다. 수많은 도굴중에도 이 무령왕릉은 단 한 번의 도굴도 없이 처녀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일본 도굴학자 가루베가 삼국유사를 펴들고 눈에 쌍불을 켜고 찾아 헤맸던 무령왕릉은 그가 끝내 찾지 못하였으나 숨어있던 무열왕릉은 그가 도굴한 송산리 6호분에서 불과 10m도 안 된 지점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도굴꾼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 남긴 글에 의하면
그는 1927년 이후 1933년 무렵까지 공주 일대 백제고분 1천기 가량을 ’발굴조사’한 인물이다.
그의 작업의 목표는 일본 황실의 조상이라 일컬어지는 무열왕릉을 찾는 것이었다. 수많은 고분을 도굴하면서 문화재를 무단으로 훔쳐 일본으로 보내면서 그는 무열왕릉을 찾지 못했다. 그는 특히 1933년 무렵에는 송산리 6호분까지 접근하여 고분을 무단 발굴했다가 조선총독부에 빌미가 되어 이후 더 이상의 조사가 불가능하게 되자, 1940년 강경여고로 전근된후에 조선총독부 고위관리나 일본의 주요 공주 관람객들을 유적지로 안내하는 ’가이드’ 생활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