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곡옥(曲玉)
중국 요령성박물관에 따르면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구부러진 귀고리 모양의 옥(옥결)이 처음에 요서지방에서 약 8000년 전 발생하여 7000년경에 한국, 일본, 러시아, 중국 동부지역으로 퍼지고, 지속적으로 중국 내륙에 퍼지다가 최종적으로 2000년 경 중국 서남지역까지 퍼지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요서지방(흥륭와문화지역)에서 최초로 발견된 옥귀고리(옥결)가 요서지방에서 450Km이상 떨어진 요동의 수암 지역에서 생산되는 옥으로 만들어졌고, 한국에서 최근 요서지방(흥륭와문명)과 시기적으로 비슷하거나 앞선 옥귀고리(옥결)가 발견된 점은 그 기원이 ‘요서’라고 단정 짓기 어려운 면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우실하).


한국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에서 발굴된 8000년 이상 전에 만들어진 옥결, 우실하 :<요하문명론>
요서(흥륭와문명) 지역에서 만들어진 옥결 우실하 :<요하문명론>, 소나무, 2007
중국 최초로 구부러진 귀고리 형상의 옥결이 발굴된 요서지방에서는 5,6천 년 전부터 중국, 한국문명의 기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홍산문화가 시작되는데, 이 때 동물의 머리를 한 구부러진 옥(곡옥)들이 제작된다.
이 동물머리를 한 용(龍) 모습의 옥들은 처음에는 머리 부분이 돼지 같아서 중국학자들이 돼지용(저룡)이라 부르다가, 이후 곰의 머리로 확인 된 후 곰용(웅룡)이라 부르고 있다.
이 곰 머리 모양 곡옥은 이후 상나라(BC 1600~BC 1046)에서 형태를 약간 달리하여 발굴이 되고 있는데, 상나라가 망한 이후에는 한반도와 요령에서 보다 간소한 형태의 천하석(아마조나이트)으로 만든 굽은 옥이 발굴된다.



옥으로된 곰용(옥웅룡), 신석기시대 후기 홍산문화(요령성박물관)
상나라시기 수도 은허에서 발굴된 옥룡(은허박물관)
한국 청동기시대 천하석으로 만든 곡옥(국립중앙박물관)
이 천하석으로 만든 아름다운 곡옥은 BC 7세기경에 제작된 것부터 발굴이 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비파형동검의 요동, 한반도 진출(BC 6세기)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김창호). 즉 동이, 북방문화의 복합체인 요서 문화가 요동과 한반도로 진출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곡옥은 또다시 형태를 약간 달리하여 AD 250년 이후 한반도 남부의 국가인 백제와 신라, 가야에서도 다수 발견된다. 특이한 점은 곡옥의 출현 시기가 BC 7세기경부터 BC 300년까지만 출토되고, BC 300년부터 AD 250까지 사라졌다가 AD 250년 이후 다시 나타난다는 것이다(김창호).


백제 곡옥(국립공주박물관)
6세기 신라 곡옥(국립경주박물관)
BC 300년 경 곡옥이 사라지는 이유는 전국시대 연(燕)나라가 고조선을 2천리나 빼앗고 요서로 침입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당시 연의 침입으로 만주와 한반도에는 급격한 사회적 변동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곡옥 같은 ‘사치품’을 만들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라졌던 곡옥이 다시 AD 250년 이후 나타난다. 그럼 이때에는 또 어떤 사회적 변동이 요동과 한반도에 있었을까?
AD 250년 경 요동과 한반도 상황은 위(魏)나라 사마의 군대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요동에 있던 공손연을 토벌하던 시기이다(238).
만주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공손연은 전쟁에 지게 되고 가족, 귀족 70여 명이 참수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위나라는 다시 관구검을 보내 고구려 공격하여 크게 물리친다(244)). 이 시기 만주 지역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며 만주 서부 지역(요하 유역)의 많은 유민이 남쪽의 한반도와 동쪽의 부여 지방으로 피난하게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유념할 부분은 공손탁(150-204) 시기 이후로 100 여 년간 요동에서 큰 세력을 이룬 공손씨 일가의 성씨가 중국의 시조인 황제(黃帝)와 같다는 점이다. 상나라의 시조였던 황제는 이름이 헌원으로, 상나라와 관련이 깊은 요동의 선비족들이 자신들의 시조로 간주하기도 했던 고대 동이족 출신 임금이다. 중국인은 이 황제를 하나라의 시조인 염제와 더불어 자신들의 시조로 간주하고 있기도 하다.
황제(BC 2697?-BC 2599?)는 성이 ‘공손씨(公孫氏)’인데 ‘공손씨’ 대신 ‘유웅씨(有熊氏, 신령한 돕는 곰)’라 불리기도 했던 것으로 볼 때 곰 토템의 사람으로 추정된다.
황제의 성씨인 ‘공손(公孫)’의 한자적 의미를 직역하면 ‘귀족의 자손’으로 곰과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한국어를 통해 ‘공손’이 곰과 관련이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곰’에 해당하는 한자가 없기 때문에 공(公)자를 대신하여 ‘곰’을 표시한 예가 있다.
요동 공손가와 오랫동안 밀접한 동맹관계에 있던 나라가 한반도 중부에 있었다. 2세기부터 공손가와 사돈을 맺었던 백제이다. 백제는 5세기 고구려에 망해 수도를 웅진(熊津)으로 옮긴다. 이후 웅진은 신라시대에 웅천주(熊川州), 웅주(熊州)로 칭하다가, 고려 태조 때 공주(公州)로 바꾸게 된다(940).
한 지명에 熊(웅)과 公(공)을 사용한 이유는 이 두 글자에 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바로 웅(熊)은 곰의 의미를, 공(公)은 ‘곰’의 음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곰을 공으로 음역했던 예를 감안하면 공손(公孫)은 ‘곰의 자손’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공주(웅진, 熊津)는 백제시대 곰(Gom)을 의미하는 한국어 고마(固麻, Goma)라고 불리면서 한자로는 웅진(熊津)으로 썼는데, 웅진(熊津)의 한국식 뜻을 풀면 ‘곰 나루’로서, ‘곰의 나라(Gom nara)’ 곧 ‘큰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곰 토템을 가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한반도 북부, 요동, 시베리아 지역 사람들로서, 한반도 남부에 곰 토템 전파는 요동지역의 공손씨 세력과 그의 연합국인 부여, 그리고 이들 지역에서 남하하여 건설된 백제와 관련이 있으며, 이들의 남하는 또한 곰과 관련이 있는 곡옥의 전파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는 고대에 이 옥으로 된 구슬을 금이나 은보다 소중하게 여겼으며, 한반도 남부 왕조인 백제(百濟 BC 18~AD660)와 신라(新羅BC 57∼AD935), 가야(伽倻 ?~562) 왕릉의 부장품으로 곡옥을 사용한 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