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식민지로 만든 종주국에 의해서
뜯어 고쳐진 것이기 때문에 근대화가 잘못된 것이며,
경제적 침략과 일본 군국주의의 병참 기지가 되는데 지나지 않았으니,
해방 후까지 그와 같은 식민적인 독소가 오래 남아 있어서
우리 겨레가 다시 일어서는 것을 방해하여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중략)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무단정치로서 가혹한 폭력으로 지배했으며, 특히 일본은 자기 나라의 자본주의 성장과 팽창을 위해서 갓난아기와 같은 근대화를 위한 여명기의 한국을 괴롭혔던 것이다.
그들은 한국의 농민을 약탈하고, 먹이를 제공받는 고장으로 삼았으며 조선의 관인 지배 밑에 시달려 온 농민들은 어쩔 수 없이 가난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고야 말았다.
일본이 한국을 상품 시장과 원료를 공급받는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은 경제적 식민 정책으로 가혹한 바가 있다. (중략)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발표되고, 일본이 1910년에는 한국에 근대적 토지 사유권을 확립하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식민지 체제를 정비, 강화했다.
조선 건국의 바탕이 토지 개혁으로 이룩된 것처럼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9년간의 시일과 막대한 돈을 들여서 무력으로 다스리는 정치의 본바탕인 조선총독부를 토지 소유주로 만들어, 일본에서 건너오는 자들이 지주가 되고 광산의 권리나 상사의 권리 등을 잡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경제적인 억압 밑에 오므라들어 온 한국의 경제는, 설상가상으로 1910년을 계기로 일제의 무력으로 다스리는 관의 권리가 다시 등장해서 한국의 민족 자본이 이룩되지 못하게 하였고, 농민의 경제적 성장이 위축되게 하였던 것이다.
1918년에 토지조사사업이 완성되어 한국에는 처음으로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이 확립되었다는 것은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는 낡은 토지 소유제가 그때까지도 남아있어서 토지 조사와 일본인들이 토지를 사들이는 데 커다란 혼란이 생겨났다. 이는 아직도 한국의 전통적인 토지제에 근대적인 사유관념이 발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근대화가 농민, 즉 "백성이 자라서 이룩된 것이 아니라" 일본 자본주의의 식민지 지배 형식으로 강매된 "일종의 수입품"이었다는 사실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출발은 바로 이 토지 사유제 확립에서 비롯했으나 일본 제국주의의 강매품이었으므로,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 자본주의가 이상야릇한(잘못된) 형태로 오그라드는 과정을 밟아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중략)
그리하여 그 결과 토지는 과거에 있어서 세금을 받아먹던 양반이나 관인 계급의 사사로운 땅으로 돼 버리는 한편, 조선총독부는 최대의 지주가 되고, 농민은 전부 토지 없는 소작인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 박정희, 우리민족의 나아갈 길中, 1962년 2월 일본인이 한국 근대화에 대해 박정희를 자주 언급하는데 정작 그가 일제의 식민지 통치나 근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모르는것 같다. 한국 근대화의 주역이라고 평가 받는(종북 세력들까지도) 박정희는 애초에 일본에 의한 조선 근대화보다 일본에 의한 약탈과 방해만 있던 대한민국 발전을 이루기 전까지도 이미 일제의 식민지배 악행이 남아서 한국이 발전하는데 좀먹고 방해를 하고 있다고 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