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한글 보급은 거짓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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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本消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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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가 이 땅에서 새로운 지식을 전하는 학습 언어로 군림하기 시작한 것은 대한제국이 종언을 고하던 시절 통감부가 초등학교용 일어독본과 이과 과목의 교과서를 일본어로 편찬하면서였다. “한국 유년에게 일문 교과서를 익히게 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뇌수를 뚫고 저 소위 일본 혼이라 하는 것을 주사하고자 함이다.” 1906년 6월 6일자 ‘대한매일신보’가 그 저의를 꼬집어 냈듯, 그때 이미 일제는 우리글과 말을 교육의 영역에서 배제해 이 땅의 사람들을 제국의 지배에 순응하게끔 하려 했다.
‘보통교육은 보통의 지식 기능을 주고, 특히 국민 된 성격을 함양하며, 국어(일본어)를 보급함을 목적으로 한다’. 1911년 조선교육령에 의거해 조선어를 제외한 모든 과목의 교과서는 일본어로 발행되고, 행정과 법률 관련 문서도 일본어로 작성되면서 국어의 지위를 빼앗긴 조선말은 일상에서만 쓰이는 생활어로 전락했다. 그러나 제3차 개정교육령이 공포된 1938년까지는 조선어가 필수 과목으로 남아 있었다. 그해 3월 15일 일제는 식민지 언어정책을 조선어 병용에서 일본어 상용, 즉 ‘고쿠고조요(國語常用)’로 바꿨다. 식민지 민족에게서 말과 글을 송두리째 빼앗아 ‘완전한 일본인’으로 만들려 한 황민화 정책의 중핵이 바로 일본어 사용의 강제였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외치던 그때, 일본어와 일본사가 필수 과목으로 지정된 반면 조선어는 정규 교과목에서 제외됐다.
‘대동아공영’을 내건 침략전쟁이 동아시아로 확대되면서 식민지 사람들을 징병과 징용으로 전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일본어를 알아듣고 말할 수 있어야 했다. 1942년 일제가 ‘국어전해(全解)운동’을 펼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국어의 보급은 국가의 소장(消長)을 보여 주는 문화적 무기라는 것은 저 영어와 불어가 외교어, 무역어로서 전 세계를 풍미했던 사례로부터 보아도 명확하다. 그러나 미영도 옛날의 미영이 아니며 불란서 역시 궤멸된 오늘날 동아의 맹주, 세계의 지도자가 된 일본 국민은 국기가 나아가는 곳에서는 반드시 국어를 상용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평안남도 ‘도지사훈시요지’, 1942).
이제 일본어는 지식을 전하는 언어로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쓰이는 생활어가 돼야 했다. 1940년 우리 글 신문의 폐간,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등 폭력적인 언어 탄압이 가해졌다. 그러나 조선어 말살정책에 맞서 한국어사전을 편찬하다 옥고를 치른 이윤재·최현배·이희승 같은 선열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민족의 얼과 혼이 담긴 글과 말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때 그들을 가둔 죄명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한’ 내란죄였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왜인은 한글을 탄압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했다
더러운 쓰레기 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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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のハングル普及は嘘です
日本語がこの地で新しい知識を伝える学習言語で君臨し始めたことは大韓帝国が終焉を告げた時代統監府が小学校用日本語読本と理科科目の教科書を日本語で編纂しながらだった. “韓国幼年に日文教科書を煮るようにすることは子供の脳髓をくぐってあのいわゆる日本魂と言うことを注射しようとするだ.” 1906年 6月 6日付け ‘大韓毎日新報’がその底意をつね出したように, あの時もう日製はハングル文字と言葉を教育の領域で排除してこの地の人々を帝国の支配に順応するようにしようと思った.
‘普通教育は普通の知識機能を酒庫, 特に国民になった性格を涵養して, 国語(日本語)を普及することを目的にする’. 1911年朝鮮教育領に基づいて朝鮮語を除いたすべての科目の教科書は日本語に発行されて, 行政課法律関連文書も日本語に作成されながら国語の地位を奪われた朝鮮末は日常でばかり使われる生活語と転落した. しかし第3次改訂教育領が公布された 1938年までは朝鮮語が必須科目で残っていた. その年 3月 15日日帝は植民地言語政策を朝鮮語併用で日本語常用, すなわち ‘故区高まりです(国語常用)’に変えた. 植民地民族から言葉と文を根こそぎ奪って ‘完全な日本人’で作ろうと一皇民化政策の中核がまさに日本語使用の強制だった. 内鮮一体(内鮮一体)を叫んだあの時, 日本語と日本史が必須科目に指定された一方朝鮮語は正規教科目から除かれた.
‘大東亜共栄’を掲げた侵略戦争が東アジアで拡がりながら植民地人々を徴兵と徴用で戦場に連れて行くためには日本語を聞き分けて言え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1942年日製が ‘国語前して(全解)運動’を広げた理由はここにあった. “国語の普及は国家の所長(消長)を見せてくれる文化的武器というのはあの英語と仏語が外交語, 貿易語として全世界を風味した事例から見ても明確だ. しかし美英も昔の美英ではなくてフランスも潰滅された今日東亜の盟主, 世界のリーダーになった日本国民は国旗が進む所では必ず国語を常用するよう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は言うまでもない.”(平安南道 ‘道知事訓示要だ’, 1942).
もう日本語は知識を伝える言語路だけがなく日常でも使われる生活語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1940年私たち文新聞の廃刊, 1942年 ‘朝鮮語学会事件’ など暴力的な言語弾圧が加えられた. しかし朝鮮語抹殺政策に対立して韓国語辞典を編纂して獄苦を経験したイ・ユンゼ・崔磯培・李煕昇みたいな先烈たちがあったから私たちは民族の精神と魂が盛られた文と言葉を守り出すことができた. あの時彼らを閉じこめた罪名は ‘朝鮮民族精神を維持した’ 謨反だった.
ホ同賢慶煕大学部大学長・韓国近県せりふ
倭人はハングルを弾圧して日本語使用を強要した
汚いごみ倭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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