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에서는 조선시대 초기까지 엄격하게 일부일처제가 지켜졌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까지 여권이 굉장히 강한 나라 중 하나여서 첩을 두고자 했다가 부인한테 맞아죽었다는 남편들의 이야기도 꽤 전해지는 편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고려 충렬왕 때 몽골제국과의 40년간에 걸친 긴 전쟁으로 남성 숫자가 크게 줄고 미혼여성이 공녀로 계속 몽골로 끌려가면서 일부다처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일부다처제 시도였는데요.
이걸 주장한 사람은 한림학사였던 유은공 박유라는 선비였습니다. 그는 음양오행상 고려는 여성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계급별로 차등을 둬서 일부다처제를 시행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통해 몽골로 끌려가는 공녀를 줄이고 인구도 늘릴 수 있다는 제안이었죠.
사실 이 제안은 몽골과의 전쟁이 끝난 이후부터 공론화됐던 내용이었습니다. 임금과 대신들도 모두 시행하고 싶은 제도였지만 부인들의 반발이 무서워 함부로 시행하지 못했던 것이었죠. 당시 여성들은 가정불화를 양산하는 제도라며 엄청나게 반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강하게 밀어붙이던 박유는 결국 여성들에게 몰매를 맞게 되는데요. 충렬왕과 함께 연등회 행사에 참여했다가 귀부인들이 "첩을 두자는 자가 저 요망한 늙은이다!"라고 소리지르며 달려와 매를 치고 돌팔매질을 하는 바람에 반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후 대신들의 부인들도 남편과의 동침을 거부하며 동맹시위에 나서자 일부다처제 시행 논의는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게 됐고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계속 일부일처다첩제가 유지되게 됐죠.
물론 고려말기의 사회적 혼란으로 몰래 중혼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현지처를 두는 경우도 많았지만 이 역시 조선 태종 때 다시 법이 엄격히 적용되면서 모두 정리됐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