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하믄 다리를 짜를라고 했을까?. 그래야 지옥 같은 탄광에서 나와 집에 갈 수 있으니께. 석탄 구루마(리어카) 바퀴가 굴러가는 데
다리를 집어 넣으려고 했어.” 일본 나가사키(長崎)현 하시마(端島) 탄광에서 강제노역을 했던 이정옥(89·광주광역시) 할아버지의
증언이다.
위안부만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엔 또 다른 피해자들이 있다. 탄광으로, 군수 물자 공장으로 강제노역을 갔던
할아버지·할머니들이다. 14만7870명이 끌려가 6922명이 사망했다. 한국 정부가 공식 파악한 숫자가 그렇다. 실제론 얼마나 더
많은지 알 수 없다.

이들은 대부분 “일하면서 학교 교육을 받게 해 주겠다”는 일본인들의 말에 좇아 갔다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고된 노동을 하며 고향 친구들이 숨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봤다. 김정주(84세) 할머니가 그랬다. 오후 밖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던 나에게 다가온 일본인이, “돈을 벌면서 중·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말했어. 설레는 마음에 양말과 옷가지를 보따리에 쌌지. 그런데 죽어라 일만 시키는 거야. 저녁밥이라곤 밥 한 숟가락에 단무지 세 쪽이 전부야. 너무 배가 고파 산에 있는 나물을 뜯어 먹으면서 굶주림을 참았어.”
굶주림을 면할 수 없는 식사. 그래도 그나마 먹을 수 있는 건 일하다 다치지 않은 이들의 특권이었다. 윤춘기(89세)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마을에서 온 이 씨가 일하다가 다쳤어. 자리에 누워 일하지 못하니깐 밥을 안 주었어. 결국 영양실조와 패혈증으로 며칠 뒤 죽었어.”
"굶지 않고 배식을 받으려면 다쳐도 일을 해야 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아무리 다쳐도 밥을 주지 않으니까." 사할린과 다카시마(高島) 탄광에 노역 갔던 손용암(88세) 할아버지의 경험은 이렇다. “16살 때였어. 갑자기 열이 나고 움직이질 못 하겠는 거야. 그런데 일본인 감독관이 나를 보고 고함을 질렀어. ‘일어나라! 조센징!’ 하며 발로 차고 때렸어. 나는 간신히 일어났지만 중심을 잡지 못 하고 옆에 있던 난로로 넘어졌지. 그때 입은 화상 흉터가 아직도 있어.” 바지를 걷어 올린 할아버지의 두 다리에는 발목부터 허벅지까지 깊게 패인 화상 자국이 있었다.
손용암 할아버지는 “지금도 떠올리면 뒷골이 서늘해지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혼자 일하는데 갱도가 무너져 갇혔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누나의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랐어. 다시는 보지 못 할 것 같은 불안감에 눈물이 계속 나오더라고. 다음엔 사고를 당해 거적에 덮여 나오던 친구들 시신이 생각나고.” 손 할아버지는 다행히 다친 데 없이 10시간 만에 구조됐다.
"나의 일과는 노역의 연속이었다.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일하다가 힘들어 잠시 동안만 앉아 쉬어도 어느 사이엔가 일본인 감독관이 나를 발견하고는 고함을 치며 때리는 시늉을 했어. 나는. 맞을까봐 두려워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화장실 가는 것도 참았어.”(박해옥 할머니·85세)
"배식은 너무 형편없었어. 조그만 주먹밥 1개와 옥수수를 넣고 끓인 된장국이 전부였어. 그것만으로는 고된 노동을 견딜 수가 없었지. 취침 시간이 되면 배고픔에 잠을 잘 수가 없어. 머리 위로 지나가는 쥐를 잡아 먹는 사람들도 보았어" (김용옥 할아버지 9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