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영토라는 증거로
3세기때의 위나라 사신이
대마도(대마국)에 대한 묘사 설명을 보고한
위지왜인전을 내 비춰 버렸던 왜인...
위지 왜인전에서 어디에 일본 영토라고
명시 되어 있는가?..wwww
제 학습에 들어 간다.
임나는 대마도에 있었던 우리나라의 명칭이며, 동과 서에 마을들이 있어 치소(治所)가 있고 조공하기도 하며 배반하기도 하였는데, 그 후 대마도섬이 드디어 임나에 지배되었으므로 그때부터 모두 임나를 대마라고 일 컬었다
(東西各有墟落 或貢或叛 後 對馬二島 遂爲任那所制故 自是任那 乃對馬全稱也: 『한단고기』고구려편)(이병선 저『임나국과 대마도』, 문정찬 저 『일본상고사』등)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어름에 있었는데 북쪽은 바다로 막히고 국미성에 치소가 있었다.(任那者 本在對馬島西北界 北阻海有治曰 國尾城:『한단고기』고구려편)(『일본서기』, 이병선 저『임나대마도』, 문정찬 저『일본상고사』).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 실성왕7년조
왜가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가락국과 신라는 같이 근심하였다. 대마도를 정벌하려 하는데 미사품(未斯品)의 간언으로 중단했다.『삼국사기』의 본조(本條)에도 임나국은
가락의 영토(任那國之所係 赤各羅古城所係)라 했다.
이 때 대마왜는 임나연정의 고구려 지배하에 있었다
"아메노 히보코" 설화는 당시의 한국세력이 대마도를 거쳐 일본열도에서 땅을 개척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일본왕정에서 번영하게 된 경위 등을 진실하게 쓰고 있다.(일본의 『고사기(古事記)』).
. 일본의『고사기』에는 "진도(津島)로 나와 있고『일본서기』의 신대(神代)에는 "한향지도(韓鄕之島)"로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대마도 이름의 뜻과 관련된 것으로서 "쓰시마(津島)"는 한반도로 가는 배가 머무는 항구와 같은 섬이고,
"가라시마(韓鄕之島)"는 바로 한국인의 섬으로서 한국사람이 고대로부터 사는 섬 또는 한반도로부터 사람과 문화가 건너올 때 거쳐온 섬, 교역이 이루어졌던 섬으로도 표현된다.
배가 닿는 섬이란 뜻으로 쓰시마(津島)로 표기,
『고사기(古事記)』에도 쓰시마로 되어 있다.
일본어의 시마(島)는 한국어의 "섬"에서 유래.
3세기 이전부터 대마도가 바로 구야한국(가야)에 속했다는 것이『삼국사기』실성왕 7년편과『가락국기』6대 좌지왕 2년의 기록 및 『대동세보』에 수록되어 있다.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 제3, 실성왕 7년조 "春二月 王聞 倭人於對馬島置營貯以兵革資粮以謀襲我 我欲先其未撥揀精兵聲破 兵儲舒邯未斯品曰, 臣聞兵器戰危事…."
편년『가락국기』실성왕 7년편 "神王二年 戊申新羅實聖王 七年 西紀四0八年 倭始置營于 馬島 神王戊申 倭始營於對馬島 洛羅二邦爲憂…."
『대동연보』좌지왕편 "新羅實聖王七年 東晉安帝熙四年 日本皇反正三年 倭始營于 對馬島…."
이러한 역사적 고증을 통해 볼 때 5세기 이전에도 대마도는
오랫동안 바로 가야의 영토이었음이 밝혀졌다. 즉 일본의 영토가 아님을 일본인 스스로 증명하는 대목이다
일본사학자 나가도메 히사이의 저서『대마도 역사관광』에 나타난 대마도의 소도(卒土)는 마한의 소도(蘇塗)와 같은 것이며, 다카무스 비노미코도와 데라시스 오오미카미(天照大御神) 등의 각종 신화가 조선분국의 존재를 증명한다. 다시 말해 대마도신의 고향은 바로 한국이다(나가도메 히사이 저, 『대마도 역사관광』).
영락 10년(410)에 세가라 (대마도 三韓分國: 左護·仁位·鷄知)는 모두 고구려에 귀속되고 이로부터 바다와 육지의 모든 왜가 임나(任那)에 통합되어 열 나라로 나누어 다스리니 이름하여 임나연정(任那聯政)이라 하였다.
(『태백일사』고구려편)(이병선 저『임나대마도』, 문정찬 저『일본상고사』,『일본서기』5 王代,〈광개토대왕비문〉).
대마도의 등정방(藤定房)이 1723녀에 편찬한『대주편년략(對州編年略)』3권으로 구성된 산가요략기(山家要略記에는 "대마도는 고려국의 행정치소인 목(牧)이었다. 옛날에 신라사람들이 이곳에 살았고, 중애천황(신공황후 섭정)이 대마도 악포(鰐浦)에서 신라를 정벌함으로써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지적한 신라는 대마도에 있는 좌호가라(佐護加羅) 중심의 신라이며, 중애천황 8년(199년)9월조에는 천황이 신라정토의 신탁을 믿지 않고 억지로 웅습(熊襲)을 토(討)하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을 남겼다
임나대마도』,『일본서기』,『한단고기』고구려편
고려시대에는 만호(萬戶)라는 관리를 파견하여 대마도를 관리하였고, 진봉선 무역(進奉船貿易: 왜와 대마도가 진상해오면 회사품으로 답하여 많은 생필품을 보냄)을 하였다. 그리고 우왕3년(1375)에는 박위를 보내어 대마도의 섬주민을 보호하고 왜구를 격퇴했다.
가마쿠라 막부시대 중기(13세기 말0에 만들어진『진대(塵垈)』11권의 사서(辭書)로서 저자 불명의 권2에 의하면 "무릇 대마도는 옛날에는 신라국과 같은 곳이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 모두가 바로 신라의 것이다"로 되어 있다.
이것은 옛날부터 대마도에 신라사람들이 대를 이어 살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대마도가 신라와 같은 곳임을(左護加羅: 신라)증명하며, 인종적·문화적으로 동질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 이외에도 전·후술하는 모든 내용들이 대마도는 한반도와 지척간에 있는 부속도서로서 우리의 정치 및 문화권에 상존해있었다는 것은 일본학자들이 증명하는 바이다.
대마도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문화유적과 생활습속들에 대해서『대마도·일기도 종합학술조사 보고서』(서울신문사, 1985) 및 일본인이 쓴『신대마도지』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일본 사학자인 중촌영효(中村榮孝)는 그의 논문에서 조선과 대마도의 속지관계(개연성)을 인정하면서, 일본측으로서는 대륙을 잇는 생명선과 같은 섬기기에 그것을 아전인수격으로 우긴 것에 지나지 않으며, 지정학적 여건을 볼 때 조선의 영토이었다고 실토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임진왜란 작성한〈팔도총도(八道總圖)〉라는 지도에 대마도가 조선영토로 표기되어 있다.
거리상으로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50㎞, 대마도에서 일본 규슈의 하카타(博多)까지 최단거리는 142㎞나 된다. 국제법으로 따져도 명확한 한국의 연안섬이다.
대마도가 한국의 고유 영토임을 증명 할 수 있는 내용은
엄청나게 방대 하지만
역사 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는
왜인들의 두뇌 한계를 생각하여 이정도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