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방" 같았던 다리, 피란민 너도나도 "영도다리서 보자"
부산 영도다리 함경남도에서 피난 온 김금복 씨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다른기사보기
"다방" 같았던 다리, 피란민 너도나도 "영도다리서 보자"
"부산 사람들 참말로 친절했다 니께."
60년 전 고난의 기억을 끄집어 내던 김금복(85·사진) 할머니는 제일 먼저 "부산의 친절함"을 떠올렸다. 만삭의 피란민 아낙네에게 누울 곳을 내 준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金할머니 가족도 없었을 것이었다.
6·25 당시 함경남도 북청의 새댁이었던 金할머니는 1951년 1월 국군이 퇴각한다는 소식에 남편, 시동생과 함께 피난길에 나섰다. 등에는 두살 첫째 아이를 업고, 배 속에는 8개월 된 둘째 아이를 품은 채였다. 눈이 허벅지까지 쌓이던 날, 명태 어선에 올라탄 金할머니는 닷새 만에 경북 포항에 도착했다. 뱃멀미로 무너진 몸을 간신히 추스른 金할머니 부부는 곧장 부산으로 향했다. 도회지로 가면 남의 집의 일을 해서라도 밥벌이는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만삭의 몸으로 꼬박 한 달을 걸어 도착한 곳이 바로 부산 영도. 아직 봄이 오기 전이었지만 피난민들로 북적였다. 영도다리를 건넌 金할머니 부부는 옛 수산시험장 앞 부두 길거리에서 사흘 밤을 보냈다.
집이 없어 정박 중인 선상에서 생활
둘째아이도 배(船)에서 낳아
판잣집 구했지만 불나 잿더미로
半평생 살던 영도 떠날 때
오히려 섭섭한 기분
""아! 이런 것이 거지구나!" 싶었지. 어릴 때 고향마을에서 거지들을 "거지 새끼"라고 놀렸다가 어머니한테 야단맞았던 기억이 떠올라 눈물이 멈추질 않았어."
金할머니의 거지 꼴을 면하게 해준 것은 대평동 항구에 정박 중인 자그마한 기름배(동력선)였다. 배 주인이 선뜻 자리를 내줘 뱃머리 한편에서 등을 붙일 수 있었다. 당시 정박 중이던 어선들은 조업을 나가기 전까지 갑판을 피난민들의 보금자리로 제공했다.
金할머니 가족은 다른 6~7명의 피난민 가족과 함께 두달 동안 선상 생활을 했다. 둘째도 배(船)에서 낳았다. 이불이 없어 거적때기 위에서 몸을 풀었고, 옷이 없어 솜으로 아기를 감쌌다. 소식을 듣고 인근 쌀집 주인이 짚으로 엮은 새 가마니를 줘 바닥 이불을 대신했다.
金할머니 가족은 부두에서 짐꾼 일을 했던 남편 덕에 그나마 밥은 먹을 수 있었다. 당시 부산항 부두에는 매일 같이 미군 부대용 화물이 드나들어 일이 끊이지 않았다. 4식구가 간신히 입에 풀칠할 수 있는 벌이였지만 김 할머니는 그중 절반을 떼내 악착같이 모았다. 그 결과 두 달 만에 선상 생활에서 벗어나 대평동 피난민촌에 판잣집(일명 하꼬방) 한 칸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였다. 그해 겨울 이웃집 하꼬방에서 불이 나 김 할머니 집은 물론 피난민촌과 대평동 일대를 전부 집어 삼켰다. 기름종이와 가마니로 얼기설기 만든 하꼬방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잿더미 위에 깡통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더라고. 피난민들이 미군 부대에서 얻어다 냄비 대신으로 쓰던 것들이었다."
金할머니가 "영도다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이 즈음의 일이다. 한 번 배에서 내리면 다시 올라가기 어려워 배 위에서만 생활했던 김 할머니는 "하꼬방 뭍생활"을 시작하면서 영도다리를 건너다닐 수 있게 됐다.
어느 날 쌀을 싸게 파는 가게를 찾아 다리 건너 자갈치 시장에 갔던 金할머니는 돌아오는 길에 황당한 광경을 목격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다리가 위로 번쩍 들려 있었던 게야. "이제 집으로 못 돌아가는구나" 싶어 그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金할머니는 옆사람이 웃으면서 곧 다리가 다시 내려올 거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마음을 놓았다고 한다. 당시 영도다리는 대형 선박들의 통항을 위해 하루 7번, 15분씩 여닫혔었다.
육중한 쇠다리가 하늘로 치켜 올려지는 장면은 언제 봐도 장관이었다. 도개(跳開) 시간은 물론, 평소에도 영도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전국 각처에서 몰려든 100만명의 피난민들이 만남의 장소로 애용했기 때문이다. 부산 지리를 잘 모르는 타향 사람들도 손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영도다리였다.
"영도다리는 우리 피난민들에게 "다방"이나 똑같았다. 영도다리의 영도 쪽이냐, 시내 쪽이냐, 아니면 한가운데냐만 약속장소로 정하면 됐었으니께."
피난민들이 영도다리로 모여들자 시내쪽 다리 밑을 중심으로 점집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피란길에 헤어진 자식, 남편, 아내의 생사를 알 길이 없어 답답한 마음을 점쟁이에게라도 의지해 풀고 싶었던 것이다. 피난민들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살아 있다면 언제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 등을 물었고 점쟁이는 "꼭 만날 수 있다"는 말로 생이별의 아픔을 달래줬다.
20년 전 남편과 사별한 金할머니는 자식들을 영도에 남겨둔 채 홀로 육지로 이사했다. 金할머니는 한평생의 절반을 영도와 함께했다.
"속 시원할 줄 알았는데 영도다리를 건널 때 기분이 별로더라고. 영도서 자식 새끼들 다 키웠으니께 고향이나 다름없제."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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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으로 당시 부산의 상점과 상권을 강탈한 조선 몽골인 피난민의 만행은 지금도 그대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