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09월 17일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전례와 함께 발족되었다.
1941년 12월 09일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함께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일본제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좌우합작이 이루어져 1942년 07월 김원봉계의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한국 광복군 부대로 흡수하였다.
일본측에서는 한국광복군과 일본군의 공식 전투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1945년 04월 당시 임시정부 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한국 광복군의 총 병력수는 339명이다.
한국 광복군의 지휘권은 중국의 국민당 정부에 맡겨져 있었으나 1944년 08월 임시정부 통수부로 되돌아왔다.
광복직전 국내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08월 15일 광복이 일찍 찾아옴으로인해 서울을 광복군의 힘으로 해방시키겠다던 김구의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현재 일부에서 10월 01일의 국군의날을 한국광복군이 조직된 09월 17일로 변경하고자 주장하고 있다.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成立典禮)는 충칭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거행되었으며, 광복군은 4개 지대를 편성, 제1지대장에 이준식(李俊植), 제2지대장에 김학규(金學奎), 제3지대장에 공진원(公震遠), 제5지대장에 나월환(羅月煥)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나월환이 시안[西安(서안)]에서 암살당하고, 김문호와 김학규도 공작이 부진하여 광복군 창설 1년 만에 겨우 300명 가량의 병력을 확보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41년 11월 중국정부는 <원조한국광복군판법(援助韓國光復軍辦法)>을 만들어 군사원조에 동의하였으나, 이 법이 제정된 지 20일 만인 12월 8일 진주만공격이 일어나 미국이 참전하게 되어 중국은 대일 선전포고를 하였다. 임시정부도 12월 10일 대일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1942년 4월 20일 김원봉(金元鳳)의 조선의용군이 광복군 제1지대로 편성되었다가 2개 지대로 개편되었다. 광복군은 작전계획으로 중국전선에서의 초모(招募)·훈련 등과 전투부대의 편성, 한국내에서의 지하군조직 및 파괴공작, 태평양 방면에서 파견사령부 설치와 한국인 포로의 재훈련·편성, 한국 비행대의 편성, 작전계획 등을 세웠다. 이때 중국의 화베이[華北(화북)]·러허[熱河(열하)]·후베이[湖北(호북)]·산시[山西(산서)]·산둥[山東(산동)]·안후이[安徽(안휘)]·장시[江西(강서)] 등지에서 수십 개의 한국인 군사집단이 유격대로 활약하고 있었으며, 창바이산[長白山(장백산)] 일대에도 3000명의 독립군이 중국 유격대와 합작하고 있었다. 또한 소련과 중앙아시아 및 시베리아에는 30만 명이나 되는 훈련된 병사들이 독립전쟁에 참여하기를 희망하였다. 한편 광복군은 중국에 파견되어 있던 미국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OSS)과 협약을 맺고 특무공작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때 <조선인학도육군지원병제도>의 실시로 한국청년이 강제로 일본군에 편입되어 남양군도(南洋群島)와 중국전선에 배치되었는데, 그 일부가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넘어와 시안에서 3개월간의 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들에게 각종 비밀무기를 주어 산둥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잠입시켜 국내의 요소를 파괴·점령한 뒤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이었으나, 이 작전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직전에 일본군이 항복하였다. 따라서 광복군은 광복 뒤 미군정 당국의 요구에 따라 무장을 해제하고 귀국하였다.
광복군 구성 : 본부 외 4개지대로 구성. (1940년 09월 17일 창설, 1946년 05월에 환국)
총사령관 지청천(이청천, 李靑天 : 일명 池靑天, 본명은 池大亨)
참 모 장 이범석(李範奭)
총무처장 최용덕(崔用德)
참모처장 채형세(蔡衡世)
부관처장 황학수(黃學秀)
경리처장 겸 정훈처장 안훈(安勳 : 본명 趙擎韓 조경한)
훈련처장 송호(宋虎;본명 宋虎聲 송호섭)
군무처장 유진동(劉振東)
제 1지대장 : 이준식(李俊植), 1942.04.20일 좌익계열 김원봉(金元鳳)의 조선의용군을 제 1지대로 편입하였다가 2개 지대로 개편.
제 2지대장 : 김학규(金學奎)
제 3지대장 : 공진원(公震遠)
제 5지대장 : 나월환(羅月煥), 시안[西安(서안)]에서 암살당함.
총병력
1940.09.17 ~ 1941년 : 약 300여명
1941.12.10 : 대일선전포고
1942년 :
1942년 광복군 외병력 : 중국 화베이[華北(화북)], 러허[熱河(열하)], 후베이[湖北(호북)], 산시[山西(산서)],산둥[山東(산동)], 안후이[安徽(안휘)], 장시[江西(강서)] 등지에서 수십 개의 한국인 군사집단이 유격대로 활약. 창바이산[長白山(장백산)] 일대에 3000명의 독립군이 중국유격대와 합작.
1944년 말 :
충 칭 : 총사령부 108명,
충 칭 : 1지대 89명,
노하구 : 1지대 1구대 ?명
젠 산 : 1지대 2구대 ?명
시 안 : 2지대 185명,
젠 양 : 2지대 강남분대
푸 앙 : 3지대 119명,
캘커타 : 주인공작대 13명
OSS에서 훈련을 받은 장준하선생, 노능서선생, 김준엽선생등이 속한 광복군은 1945년 5월 미국 정보기관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의 지원하에, 한반도 진입을 위한 ‘독수리 작전’에 착수했는데 이것은 광복군이 미군의 특수전훈련을 받은 다음 국내로 잠입하여 지하공작을 전개하다가, 광복군과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할 때 항일세력을 모아서, 상륙군과 합류하여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OSS와의 연합훈련은 광복군 2지대와 3지대에서 시행됐는데 2지대의 훈련은 중국의 서안 근교의 두곡(杜曲)에서 실시되었다고합니다.
OSS 소속 20여 명의 미군 교관이 훈련을 이끌었고, 이 교육과정의 1기생 50명 중에는 일본군을 탈출한 한인 병사(장준하 선생등)들도 포함됐죠.
1945년 8월 4일 1기생 훈련이 종료되자, 임시정부와 OSS는 8월 20일 안으로 특공대를 조직하여, 낙하산이나 잠수정 등을 통해 한반도에 침투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3지대의 경우는 1945년 7월 7일 입황(立煌) 오가점(吳家店) 부근의 미군 부대에 도착한 22명의 대원들이 3개월 예정으로 훈련에 착수했지만 기초교육 과정이 진행되던 중 일제의 패망을 맞이했다고합니다.
1945년 광복군의 군사작전 이전에도 미군과 한국의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 작전을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미군 문서가 수년전에 발굴됐었는데 2004년 당시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이만열선생)가 발표했죠.
미국의 전략첩보국(OSS)과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혁명자통일동맹이 1944년 합작으로 진행한 ‘옐로 프로젝트’ 라는 계획과 관련문서 4장을 2004년 8월 11일 공개했었습니다.
이 문서는 국사편찬위에서 2004년 3∼7월까지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자료였죠.
당시 자료에 따르면 ‘옐로 프로젝트’는 미 CIA의 전신인 OSS와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혁명자통일동맹이 공동으로 1944년 8월부터 진행한 후방침투 첩보 작전으로 ‘코리안 프로젝트 제1번’으로도 불렸고 이 작전을 통해 한국인 4명을 훈련시킨 뒤 당시 일본군이 점령한 중국 각 지역에서 첩보활동을 펼쳤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중국의 쿤밍, 톈진-베이징, 산둥반도, 차하이-샤우제 등으로 나뉘어 파견됐었죠.
이는 1945년 OSS가 계획한 ‘냅코 작전’(하와이 한인을 게릴라로 한반도와 일본에 침투시킴), ‘독수리 작전’(중국의 광복군을 한반도에 침투시킴) 등보다 앞선 것이었습니다.
2004년 공개된 자료에는 암호명 옐로 1∼4로 명명된 한국인 대원의 나이와 학력, 직업, 정치성향, 종교 등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는데 38∼40세인 이들은 교수, 한의사, 상인(2명)으로 모두 기독교인이었다고하죠.
이 그룹의 지도자인 옐로 1번은 1908년 평안도에서 태어나 미국 캔자스대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조선민족혁명당원 김윤서(당시 원예학 교수)로 확인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