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END 매경]日本 역사왜곡의 역사 (2010.3.27) 가공의 9명 천황 등장시켜 고대사부터 거짓말
아시아 패권위해 한국사는 중국의 일부로 폄하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라는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세상에 실존하지 않았던 천황(일왕) 9명이 등장한다. 1대 진무(神武)부터 9대 가이카(開化)까지가 그들이다. 일본 학계에서조차 이론이 분분할 정도로 이들 존재 여부는 불투명하다. 일본은 왜 가공의 왕들을 만들어냈을까. 3세기 중엽 고대 일본을 지배한 신라계 스진 왕조와 5세기 초부터 지배했던 백제계 니토쿠 왕조 존재를 은폐하고 자신들이 당시 선진 강국이었다는 이론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건국 시기를 끌어올린 것이다. 이 왜곡은 최근 한ㆍ일 역사 공동 연구위원회가 폐기하기로 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뿌리이기도 하다. 사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침략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시도한 조직적이고 유기적인 역사왜곡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따라서 일부 일본 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을 접었다고 해서 일본이 고대사 전반에 걸친 왜곡을 바로잡았다고 보는 것은 착각이다. 논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콤플렉스 때문이다.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워 아시아 경영을 꿈꾸었던 그들은 자신들 주류가 한반도에서 유래됐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역사를 대륙이 아닌 반도에 한정시키려 했고, 우리 역사의 기원을 낮추고, 고구려 백제 신라를 축소시켰다. 이를 통해 일본은 임진왜란과 한국 강제병합이라는 역사적 필연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본이 역사를 왜곡한 주요 사례를 소개한다.
◆日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했다 ? = 신공황후는 일본인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가 3세기 중엽 신라를 정벌하여 신라 국왕에게 항복을 받았으며 곧이어 고구려와 백제도 항복을 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 정벌론은 최근 폐기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이자 군국주의자들이 한반도를 침략하는 중요 논리로 이용되기도 했다.
문제는 `일본서기` 외에 다른 어떤 곳에서도 이 같은 정벌 근거는 없다는 데 있다. 오히려 다른 역사적 사료들은 신공황후가 가공 인물이거나 왜곡된 인물일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준다.
사실 일본 학자들 중에서도 신공황후가 거짓 기록임을 거론한 사람이 많다. 와세다대 역사학 교수인 쓰다 소우키치는 이미 20세기 초에 "역사 서술에 신라와 전쟁을 한 기록이 전혀 없고, 전투도 하지 않은 백제와 고구려가 항복을 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되며, 지리적인 지식도 결여되어 있다"며 신라침공설을 부인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신라왕이 항복할 때 했다는 말 중에 `일본`이라든지 `천황`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지만 실제 당시에는 그 같은 호칭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 훼손의 진실은 ?
= 광개토대왕비에는`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일본 학자들은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백제)과 ○○○가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했다. 광복이 되자 정인보 박시형 등 남북한 학자들이 나서 비문 해석이 왜곡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앞뒤 문장과 연계성이 부족하고, 주어인 고구려가 생략됐으며, 왜(倭)라는 단어를 목적어로 봐야 한다는 이론 등을 내세워 고구려가 신라 백제 왜를 모두 격파한 광개토대왕 업적을 기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학자들도 고구려군이 육로를 통해 백제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수군을 동원해 `왜` 본국인 백제를 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던 중 1972년 이진희라는 재일 사학자가 사에키 유우키라는 일본 군인이 일제 때 비문을 수정했다고 주장하면서 비문 자체가 조작됐다는 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진희 는 `來渡海破` 넉 자가 조작된 글자이므로 기존 해석은 모두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제가 광개토대왕 비문에 석회를 바른 적이 있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일본 측 해석을 논박했다. 이 논란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비문 내용이 임나일본부설을 비롯한 많은 한ㆍ일 고대사 논쟁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어 조작 여부를 놓고 첨예한 대립이 지속되고 있다.
◆日 국보 구세관음상 누가 만들었나 ?
= 일본 국보 중 백제가 만들어 준 유물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나라 호류지(法隆寺)에 있는 구세관음상이다. 녹나무로 만든 이 구세관음상은 백제 위덕왕이 만들어 보내준 것이다. 한ㆍ일 문화사 관련 다수 저술을 남긴 홍윤기 박사는 호류지에 남아 있는 고문서에서 구세관음상이 백제에서 온 것을 증명해주는 구절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측 왜곡은 좀 어이가 없다. 일본 목재학자인 오바라 지로는 1971년 "녹나무는 일본 대만 중국에는 자생하고 있으나 조선에는 없으므로 이 불상은 일본에서 조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반도에는 당연히 녹나무가 자생하므로 이 주장은 억지다. 다른 일본 목재학 고문서에는 "일본이 신라에서 삼나부 전나무 예나무 녹나무 피나무 종자를 가져다가 심었다"는 기록도 명백하게 남아 있다.
임진왜란은 침략인가 출병인가?
일본 후소샤 역사 교과서는 임진왜란을 `조선출병`이라고 표현한다. 침략이라는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위해 모호한 `출병`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양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임진왜란 성격을 `군대를 일으켰다`는 정도로 규정하는 건 다른 의도가 깔린 해석이다.
이미 알려져 있다시피 일본 역사 서술은 묘하게 임진왜란의 원인 제공을 조선이 한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즉 히데요시가 명나라 정복을 위해 길을 터 달라고 했는데 거절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 게다가 일본은 전쟁기간에 일어났던 세세한 상황에 대해선 언급이 별로 없다. 일본이 자행한 인적 물적 피해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현상에 대한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것이다. 당시 일본이 한 일은 분명 침략이었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으로 자주성 결여 ?
= 고대사와 더불어 일본이 집중적으로 왜곡하고 있는 부분이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근세사다.
일본 후소샤 교과서에는 "조선이 중국의 복속국이었기 때문에 서구열강의 무력 위협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표현되어 있다.
일본은 식민지배를 이 같은 논리로 미화하기 시작한다. 1875년 일어난 강화도 사건도 단순 측량 행동에 대한 조선 측 과잉대응이라는 시각으로 기술되어 있고, 청일전쟁도 중국이 자신들 조공국인 조선을 잃지 않으려고 일으킨 전쟁이라고 설명한다.
한국 강제병합 이후 역사 기술은 더욱 노골적이다. 일본은 아시아 안정을 위해 한국을 강제병합했고, 영ㆍ미ㆍ러 3국 중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한국 내에서도 병합을 수용하는 목소리가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자신들이 철도 항만 관개시설 등 인프라스트럭처와 각종 제도를 이식해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만들어냈다. 학계에서는 일본이 지배와 징용 편의를 위해 제도를 이식했고, 전쟁물자 등을 수탈하기 위해 인프라스트럭처를 건설했다는 식민지수탈론을 근대화론으로 둔갑시켰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지배 기간에 수없이 일어난 항일운동은 거의 기술하지 않거나 기술하더라도 사회주의자들 책동이라는 식으로 왜곡하고 있다. 또한 정신대에 관해서는 거의 거론조차 하지 않는 게 일본 역사 서술의 현실이다.
◆창씨개명은 한국인이 원해서 한 것 ?
= 일본 우익단체인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자신들이 만든 교과서에서 창씨개명에 대해 "조선인의 희망에 따라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것을 일본 정부가 허용했다"는 취지로 기술하고 있다. 아소 다로 전 총리도 자민당 간사장 시절 "조선 사람들 가운데 일본식 이름을 필요로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것은 가당치 않은 왜곡이다.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제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각 지역 경찰, 관리, 면장 등을 통해 압력을 넣었음은 물론이고 거부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우선적으로 징용을 명령하는 등 불이익을 주었으며, 집을 짓거나 사고팔 때 필요한 허가 서류에도 일본식 이름을 써야 했다. 심지어 각급 학교 입학서류에 의무적으로 일본명을 쓰게 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은 이미 많은 사료와 증언을 통해 확인됐다. 일본은 불과 70년 전에 있었던 일까지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허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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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 한·일역사공동위 활동 종료 (중앙 2010.3.24)
2기 위원회는 모두 24개의 의제를 다뤘다. ‘고대 왕권의 성장과 한·일관계-임나 문제를 포함하여’ ‘14~15세기 동아시아 해역 세계와 한·일 관계’ ‘지배체제와 이데올로기’ ‘교과서와 근대·근대성’ 등이다. 양측을 합쳐 모두 34명의 역사학자가 참여했다. 총 57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한국 측 28편, 일본 측 29편이다.
이 위원회가 역사 해석에 강제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2001년 한·일 정상 간에 처음 구성을 논의할 때 합의한 원칙은 지금도 유지된다. 보고서 내용이 당장 양국의 교과서에 반영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교과서 집필자가 위원회의 새로운 연구 성과를 참고하지 않을 순 없다.
2기 위원회는 ▶임나일본부설의 폐기 ▶왜구 조선인설 폐기 ▶교과서위원회 설치 등의 성과를 내놓았다. 1기 위원회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내용이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식민사관의 중심축이었다. 고대 한반도의 가야 지역을 당시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군사적으로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당연히 우리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번 위원회에서 일본 측은 기존의 입장보다 신축적인 모습을 보였다. 임나 문제와 관련, 일본 측 보고서는 “한반도에서 왜인의 활동 흔적은 여러 곳에서 인정되지만, 왜국의 영토가 존재했다는 이해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또 “왜국이 (한반도에서) 대대적인 군사 전개를 했다는 이해에는 재검토·정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일본의 가야 지배설’이 이제 폐기됐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고려시대의 왜구에 조선인이 다수 포함됐다는 기존의 일본 측 주장도 수정됐다. “14~15세기 왜구의 주요한 구성원은 이키·쓰시마·마쓰우라 지역 사람들이 중심”이라고 했다. ‘교과서 위원회’를 신설해 교과서 문제를 공식 논의하기 시작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고대사 분야와 교과서위원회 설치 등이 돋보인 반면 근·현대사 분야는 서로의 입장과 차이를 확인하는 데 그쳤다.
전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