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와의 첫 만남에서 을미사변( 명성왕후 암살) 거론 못한 고종
첫 번째는 이토가 세 번째 내각을 끝내고, 2개월여의 장기 중국여행을 가는 길에 2주간 한국에 체류했을 때였다.
1898년 8월 말에서 9월 초에 걸쳐서다. 이때 그는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부인한테 띄운 편지에 “황제 및 정부 인민으로부터 생각 밖으로 친절한 대우여서 꿈 같은 심지(心地)였다”고 썼다.(伊藤博文傳)
‘생각 밖으로 친절한 대우’가 무슨 말인가. 민후암살(閔后暗殺)은 불과 2년 전, 이토의 총리 재직 때였고, 암살을 지휘 결행했던 한국주재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의 임명권자는 이토였던 것이다.
미우라가 군사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조처해준 것도 이또 총리였다. (金文子, <朝鮮王妃殺害와 日本人>, 高文硏) 일본은 암살에 가담했던 폭도 48명을 면직된 미우라(三浦)와 함께, 히로시마(廣島) 지방법원에 데려다가 재판했으나, 증거 불충분이라고 면소(免訴)처분, 모두 방면해 버렸다.
총리 재임 중에 일어났고, 석연치 않게 뒤처리된 이 암살 사건을, 한국에 오면서, 그리고 지아비 고종황제를 만나면서 이토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에 고종은 이 문제를 입이 올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생각 밖으로 친절한 대우’는 이래서 나온 말일 것이다.
이토가 두 번째로 고종과 만나는 분위기를 본다.
일·러전쟁의 선전포고는 1904년 2월 10일이었다.
개전하자마자 일본은 한양부터 점령하고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한국땅을 수용하여 군사기지로 하고 한국사람을 군수인부로 동원하는 등 한국을 일본의 전쟁체제에 끌어넣기 위한 것이었다. 엄청난 침략행위였다.
의정서에는 한국 황실과의 친의(親誼)를 가꿀 것, 그리고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보장하는 조문이 있다. 이 바탕 위에서 이토는 한국에 ‘황제 위문특사’로 3월 중순에 파견되었던 것이다.
개전과 함께 고종의 총신(寵臣) 이용익 등 러시아와 가까웠던 요인들이 대거 몰려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고, 일본군의 군사작전에 따른 민중의 불만이 높아지자, 일본정부는 최고의 문민카드 이토를 서울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이때에 이토는 10개조에 걸쳐, 고종황제 앞에서, ‘동양평화’유지, 서양문명 수용과 개혁의 원칙, ‘침략적인 서양인’ 러시아 배제 등을 강의하듯 늘어놓았다.
이 속에는 “한국황제가 우리 일본과 존망을 함께하고, 동양평화의 유지 방책에 협동한다면 … 오래 한국의 산하를 폭진(暴秦-러시아)의 장중에 떨어지지 않게, 마치 일본 자체의 존망과 같이하여…서로 안위존망(安危存亡)을 함께하고… ”라는 문구도 보인다.
“한황(韓皇)은 이를 가납(嘉納)하사, 공(公·이토)의 원래(遠來)의 노고를 많다 하시고, 손수 대훈(大勳) 금척대수장(金尺大綬章)을 수여하시고, 그날 밤 대관정(大觀亭)에서 향찬을 내리셨다”고, 이토의 공식전기인 <이등박문전>(伊藤博文傳)(春畝公追頌會편, 原書房)에 보인다.
이 정도면 고종도 이또와 친근이 쌓였다고 믿었을 것 아닌가.
그러고서 불과 1년 반쯤 지나, 전쟁도 끝나고 이번에도 ‘위문특사’로 왔기에 전날의 언사와 우호무드를 믿고, 한마디 했더니, ‘누구 때문에 숨이라도 붙어 있는지 아느냐’로 나온 것이다.
‘이나오리 강도’의 전형을 이때의 이토에게서 본다.
‘서로 안위존망(安危存亡)을 함께하고’라 한 게 언제인데. ‘이나오리 강도’의 기습 앞에 누구든 억장이 무너지고, 기가 산란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상대가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이긴 나라의 최고권력자이고 보면. 실은 이 모든 판이 조선땅을 군사점령하고 있는 일본 손바닥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에 고종이 다시 한번 눈 뜨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군사력에 의한 국권 강탈판이 기본이었던 것이다.
도덕적 저능아 이토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때 이토의 대응에 부답(不答)의 공갈이 동시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종은 그전 두 번에 걸쳐 만났을 때까지는 건드리지 않았고, 그동안 “신료(臣僚)는 물론, 종친에조차 입떼지 않았던 것”을, 이번에는 몇 번의 만남이 만들어 낸 친근무드를 믿었던지 끄집어 냈던 것이다.
고종이 어찌 몽매에라도 명성황후 문제를 잊을 수 있었겠는가.
당시 한국정부는 사건을 대원군과 왕궁경비 훈련대의 소행으로 몰아, 세 사람의 훈련대 사관(士官)을 암살자로 처형했다.
당시의 친일정부가 일본측에 농간당한 것이다.
고종은 해가 바뀌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자마자, 사건진상조사부터 지시했다.
사건의 진상을 반년도 안가 고종은 파악했다.
그리고 미우라 공사를 비롯한 일본 폭도들이 귀족 작위도 회복하고, 징벌되지 않았을 뿐더러, 일본사회가 영웅시한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일본 측은 배후를 미우라에서 끊었지만, 고종은 믿지 않았을 것이다.
내알현 자리의 눈앞에 있는 당시의 일본 내각총리대신 이토는 원천적, 도의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이므로 뭔가 한마디 할 거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고종은 “…생각이 이에 미치면 너무도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하기 그지없다.”고까지 했던 것이다.
‘위문특사’ 이또는 위로와 사과는커녕, 일거에 ‘이나오리 강도’의 자세로 돌변한 것이다.
‘암살 문제’의 거론에는 부답인 채, ‘이나오리 강도’로 말을 받음으로써, 공갈메뉴에 일거에 ‘암살’을 올리는 형국을 이토는 고종을 상대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토의 도덕불감증에 대해서는 하나 더 짚어 둘 것이 있다.
1990년대에 번역되어 한국에서도 화제를 일으켰던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의 역작 <민비(閔妃)암살>의 끝 부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민비의 유체 옆에 있었던 일본인 중에, 동포인 나로서는 쓰기가 어려운 행위가 있었던 것이 보고되어 있다.
전 법제국(法制局) 참사관으로, 당시 조선정부의 내부(內部·내무부) 고문관이었던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가 법제국장관 스에마쓰 겐초(末松謙澄)에게 보낸 보고서 속에 ‘참으로 이것을 붓으로 옮기기 견딜 수 없지만 …’이라 전제하고서, 그 행위를 구체적으로 써 놓았다.”
뭘 더 적시할 수 있을 것인가. 여러명의 일본인들 속에서 이 짓을 했다니, 이는 근대화했다고 떠벌렸지만 그때의 일본인들이 인간 미달의 인종임을 나타내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일본은 그 뿌리 깊은 야수적 야만성을 서양사람들한테만 감추려고 발버둥치다가 결국 망한 것이다.
조선의 국모(國母)를 향한 이 능멸을 왕정은 없어졌어도 조선사람들은 1000년이 가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한민족(韓民族) 전체의 상징에 가한 능멸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여기 쓰는 것은, 위에서 든 보고서를 받은 스에마쓰는 이토의 사위로서, 이토 정보인맥의 핵심적 존재였다는 사실 때문이다.(佐佐木 隆, <伊藤博文의 情報戰略>, 中公新書) 스에마쓰가 책임 맡았던 법제국이란 일본 근대화 작업의 선도기관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참살당한 황후에 가해진 일본인들의 능멸을 절대로 모를 수 없는 이토가 고종이 황후 얘기 끄집어내니까, ‘이나오리 강도’의 자세를 취하고 나왔다는 것,
이건 뭘 얘기하는가. 메이지의 제일 문관 이토의 국권강탈자로서의 유능성과 도덕적 저능아성을 동시에 알려주는 것이다.
근대일본이 패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압축해서 이토 속에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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