쯔보이 시게하루라는 한 일본인 여류작가는 관동대지진 당시 한인에 대한 색출과 학살 현장의 살벌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경찰.군인.자경단 등은 버스.열차 안 혹은 길거리에서 승객들에게 “15엔(円) 15전(錢)”, “ぱぴぷぺぽ (빠삐뿌뻬뽀)”등과 같은 어려운 일본말을 발음하게 하거나 ‘교육칙어’를 암송하도록 해 발음이 이상하면 한국인으로 단정하고 칼과 몽둥이,죽창으로 마구 찔러 처참하게 살해하여 강물에 던지거나 불에 태웠다고 한다. 일본 관헌들은 일인들에게 머리에 흰띠를 두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 방법만으로 구분이 어려워지자 ‘아이우에오’로 시작되는 일본 "가나"를 전부 외워보라든가, "링고(사과)"를 발음해 보라, 심지어는 역대 일본 일왕의 이름을 대라 하여 제대로 하지 못하면 한국인으로 단정했다고 한다. 한인을 골라내기 위한 수단은 천인 천 가지였다. 다분히 주관적이며 명확한 근거가 없었다. 군중 심리에 좌우되어
▲흰띠를 한 자경단의 조선인 살해 장면누군가 ‘조선인이다’라는 한 마디만 하면 와! 하면서 개떼처럼 달라 들어 처참하게 죽였다. 이들은 이성을 가진 집단.국가가 아니라 저능한 동물집단이나 할 짓을 저질렀다. 붙잡힌 사람은 일본인이라 할지라도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고 몰매를 맞거나 죽임을 당했다.
이와 함께 중국인 폭동설도 유포되면서 중국인도 수백 명 학살됐다고 한다. 피의 악마에 물든 일본인들은 죽창이나 몽둥이, 총칼 등으로 닥치는 대로 한국사람을 죽여 강물에 던지거나 불에 태웠다고 한다. 학살 방법은 잔인함의 극치였다. 피에 굶 줄인 악령들의 축제를 일본국가가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 요코하마(橫濱) 근처에는 속칭 “根岸별장” 이라 불리는 요코하마 형무소가 있었다. 지진으로 형무소의 콘크리트 벽이 파손되어 도망쳐 나온 죄수들이 7,8백 명 되었다. 이들도 한인을 잡는 수사대에 합세하는 참으로 귀가 막히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그들은 동네를 이 잡듯이 뒤지며 한국인을 철야로 사냥하여 살해했다. 한인 시체는 쿠라모토다리(倉本橋) 제방 가에 줄지어 선 벚꽃나무 가지에 매달았다. 살아있는 사람은 매달아 놓고 린치를 가했고, 죽은 사람은 매단 줄을 끊어 시체를 물 속에 빠뜨렸다. 하천은 몇백 명의 시체가 쌓여 붉게 물들어갔다. 마을 수색대에 의한 참극은 5일이 넘어서까지 계속되었다. 살기에 찬 이들 자경단원들은 한국인을 거리나 집안에서 찾아내 죽이는데 그치지 않았다. 유치장에 일시 보호되어 있는 사람들까지 학살했다.
◈ 군마현(群馬縣) 경찰서 토건업체인 까시마구미(鹿島祖)가 고용하고 있던 한국인 14명을 회사측 요청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문을 들은 자경단대표가 경찰서로 달려와 한인들을 넘겨달라고 아우성이었다. 4,5명의 경찰관들은 서장이 오면 결정하자고 했지만 군중들은 당장 넘기라고 우겼다. 결국 자경단원과 2백여 군중이 몰려와 소동을 벌이다가 14명의 한국인을 전부 살해했다.
◈ 기거정(奇居町) 경찰서 유치장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10여 명이 살해되었다. 9월 4일 요코하마 네기쪼(根岸町)에서 자경단에 붙잡힌 한 한국인은 몸에 지니고 있던 감기약을 독약으로 오인 받아 파출소 옆에 동여 매인 채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 가메이도(龜戶)경찰서에서 벌어진 사건은 학살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한인학살은 자경단이나 경찰에 의해서만 자행된 것이 아니었다. 계엄령 미명 아래 동경시내에 진주해 들어온 군대도 가세했음이 여러 증언자들이 밝히고 있다. 도쿄지역에 치안유지를 위하여 배치된 군인들은 가메이도경찰서 연무장에 도착하자마자 총칼로 한인들을 밤 세워 죽이기 시작했다. 피에 굶 줄인 군인들은 온몸이 피범벅이 되었다. 그 비명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고, 일대의 강아지들은 참혹함의 극치에 미동조차 하지 못하였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처참한 학살의 현장이었다. 가메이도 경찰서에서만 하룻밤 사이에 320여 명에 이르는 한인이 학살됐다. 경찰서 구내에서 벌어진 이러한 학살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경찰이 강력히 이를 제지하지 않고 사실상 묵인, 방조하는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관동대지진 당시 한국인 학살은 인간이기를 거부한 뼈아픈 사건이다. 천재(天災) 속에 살아남은 사람들을 학살이라는 천인공노할 인재(人災)였다. 1923년 9월 1일 바로 이날은 “한국인 대학살의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