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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oProAKB48 일루와봐 역사공부 다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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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농사’ 기술이 한국에 전수되었다고 날조한 일본의 역사왜곡

⑴ 요시노가리 유적


1988년, 북규슈[北九州] 사가현[佐賀縣] 요시노가리[吉野里]에서 야요이[彌生]시대부터 고분(古墳)시대에 걸쳐 유례를 볼 수 없는 대규모 유적이 발굴되었다. 일본 고고학계는 종전(終戰) 후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라며 흥분했다. 그동안 수수께끼처럼 여겨왔던 일본 역사의 기초를 이룩한 야마다이국[邪馬臺國]의 정체를 밝힐 근거라며 외치기도 했다. 한국 역사학자들은 가야(加耶)시대의 한국식 유물과 맥락을 같이하는 유물이 쏟아져 나와 관심을 집중했다.

일본은 지체없이 초·중·고교 역사 교과서마다 교육자료로 삼고 있다. 야마가와 출판 고교생용『일본의 역사』는 유적복원과 출토유물의 자신을 장식하고는 ‘야마토[大和] 왕권의 성립’이라는 단원으로 꾸며놓았다. 유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관한 설명은 없다. 본문의 중요한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벼는 일본형(쟈포니카종)과 인도형(인디카종)으로 나뉘는데 야요이[彌生]시대의 유적에서 발견된 것은 일본형이다. 일본형은 조선 반도 중남부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시즈오카현[靜岡縣] 도로[登呂]유적과 같이 논두렁으로 대규모의 무논을 구획하였고 수로도 만들었다...... 곡물을 저장하는 고상창고(高床倉庫), 환호집락(環濠集落)도 나타났다...... 또 긴키지방에서는 우리나라 독자의 형태를 띤 동탁(銅鐸)을 만들었다...... 야마다이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규슈설과 애마토설이 있다. 만일 야마다이국이 규슈에 있었다고 한다면 동모(銅矛), 동과(銅戈)의 분포권을 중심으로 한 지역적 연합국이며, 야마토에 있었다고 한다면 동탁분포권의 세력이 벌써 서일본을 지배한 것이 된다.”


주목되는 내용은 ‘야요이시대의 유적에서 발견된 벼는 일본형(쟈포니카종)’이라는 부분이다. 우선 야요이시대에 있었다는 쟈포니카종은 요즘에 보급되고 있는 쟈포니카종의 원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어쩌면 야요이시대의 벼 유전자(DNA)가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도 있겠으나 그것을 쟈포니카종의 원종으로 단정한 것은 잘못이다. 중국 남부에서 전래되었다거나 한국이 중국의 벼 품종을 도입하여 경작하다가 다시 야요이시대의 일본으로 전했다는 종래의 학설과는 다르다. 근원적으로 따지면 벼 품종의 기원은 중국이므로 중국품종이라 할 수 있고, 또한 한국을 통해 전래된 것이 정설이다.



일본 열도의 벼농사가 요시노가리에서 전파되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으며, 가야인들이 전파한 사실 또한 정설이다. 그럼에도 이 교과서는 쟈포니카종이었다고 엉뚱한 신설을 제시하고 있다.


80여년 전에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한국을 병탄한 후 한국 쌀이 일본 쌀보다 맛이 좋다고 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를 내세워 한국 농지를 빼앗아 경인선(京仁線)과 경부선(京釜線)을 부설하여 쌀을 수탈해 간 사실을 상기하더라도 한국품종이 일본품종보다 단연코 우수했음을 입증한다. 그래서 일본은 한국 벼 품종을 가져가 개량하여 ‘일본형(쟈포니카형)’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런데 이 교과서는 ‘일본형(쟈포니카형)은 조선 반도 중남부의 유적에서도 발견된다’고 하여 쟈포니카를 주어로 하여 학생들에게 마치 고대에 일본형이 한국으로 전파된 것처럼 서술해 놓았다. 주객전도(主客顚倒)의 기묘한 변조(變造)이자 기만(欺瞞)이다.



벼농사는 적지선정(適地選定), 모판 만들기, 용수관리(用水管理) 등 오랜 경험이 없이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분야이다. 고대 한국인들이 벼농사를 가지고 갈 때 일본 선주민들은 너무도 신기하여 ‘쓰시마 해협을 건너 온 신의 선물’이라고 우러렀다. 그런데도 이제는 논두렁, 무논, 수로 등 경작과정을 설명하면서 고대 일본의 경작기술이 능통했던 것으로 꾸며놓은 것이다.


일본에서 발굴되는 벼이삭 수확용의 돌칼 등 연장은 한국 것이 조형(祖型)이다. 그리고 “동탁분포권(銅鐸分布權)의 세력이 벌써 서일본을 지배한 것이 된다”는 부분도 이상하다. 실은 일본의 동탁문화권(銅鐸文化權)은 한국 동탁문화권의 연장이다. 동탁은 당시 고대 한국의 가야국에서 건너간 기마군단의 마탁(馬鐸), 즉 ‘말방울’의 일종이었다. 한국 김해지방의 동탁이 일본 동탁의 조상인 셈이다.


동탁이 야마토[大和]지방(나라[奈良]와 그 주변)에서 수량적으로, 또 형태가 큰 것이 많이 출토된다고 해서 야마토 왕국이 규슈 등 서일본 지역을 지배했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 문화는 강물처럼 선진문화권에서 후진지역으로 흘러가며, 그 과정에서 크기와 형태 등은 변화하기 마련이다. 형태가 크고 수량이 많다는 것은 통치체제가 강력했음을 추론할 수는 있으나 고대부터 일본 고유의 체제가 지속된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중학교 역사 교과서마다 요시노가리에서 발굴한 유물과 망루, 주거지 등의 사진을 화려하게 장식해 놓았다. 특히 파형동기(巴形銅器), 옹관묘(甕棺墓) 안의 머리가 없는 인골, 중앙묘지에서 출토한 동검(銅劍), 유리로 만든 옥(玉) 등의 사진을 돋보이게 배치하였다. 요시노가리 유적이 일본의 야요이[彌生]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이며 일본 고유의 문화라는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요시노가리에서 출토된 파형동기야말로 가야권의 세력이었음을 분명하게 증명하는 유물이다. 파형동기에는 화염꼬리 모양의 파(巴)가 있다. 한·일 양국에서 출토된 파형동기는 4개의 파, 7개의 파 등 다양하다. 요시노가리[吉野里]에서는 7개 파의 파형동기가 출토되었고, 파형동기를 주조한 주형(鑄型)까지 발견되었다. 다량으로 생산되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파형동기에 대한 연원은 해명하지 않은 채 ‘일본에서 출토되었으므로 일본 것’으로 교육시키고 있다. 파형동기는 일본 역사의 뿌리를 증명하는 중요한 근거인데 이를 외면하고는 병사의 방패 문양으로 치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 고대사를 해명하는 열쇠라고도 하는 파형동기는 무엇인가?



⑵ 파형동기는 김수로 군왕의 왕장



김수로왕릉(金首露王陵)에는 문루 중앙부에 붙은 9개의 파를 가진 파형문양이 있다. 굳이 문루 위에 붙여 놓은 것은 김수로(金首露) 군왕의 왕장(王章)이거나 김해 가락국(駕洛國)을 상징하는 국장(國章)이기 때문이다. 요시노가리의 파형동기(巴形銅器)는 김수로왕릉의 것과 꼭 같은 형태이며 파의 수가 적을 뿐이다.


김해 대성동 가야 유적 고분에서도 4개의 파(巴)를 가진 파형동기가 출토되었다. 요시노가리의 7개 파는 파의 수에 있어 비교할 만하다. 김수로왕릉의 9개 이상의 파수(巴數)를 가진 파형동기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파수가 많고 적고는 권위의 격차 때문일 것이다. 즉, 김수로왕릉의 파수가 가장 많은 것은 김해 금관가야(金官加耶)를 본국(本國)으로 하고 분국(分國)이나 왕자급의 경우 김수로왕릉 파수보다 적게 가지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해 대성동에서 4개 파의 파형동기가 출토된 것은 왕자급이나 왕손급의 분묘(墳墓)로 여겨진다. 파형동기와 함께 무기류가 출토되는 것은 당시는 왕자급이 지역소국의 정치와 군사 등 통치권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파형문양을 무기인 방패에 새긴 것도 발굴되었다. 그래서 한국의 어느 학자는 군대 표시라고 주장한 바 있다. 방패만 생각한다면 그러한 학설도 있음직하다. 그러나 단순히 군대 표시라면 김수로왕릉 문루 위에 있을 리 만무하다.


한편 요시노가리에서 수백개의 옹관묘(甕棺墓)와 원분(圓墳)들도 발견되었다. 모두 가락국 묘제이다. 이 무렵까지 일본 열도의 선주민 왜인들은 평장(平葬)이나 수장(水葬)이 주류였다. 일본 고유의 원분이나 옹관묘 유적이 전혀 없는 것으로도 알 만하다. 옹관묘는 황토를 원료로 대형 옹기를 성형하여 초벌구이로 견고하게 제작하는 특수기술의 토기로서 고도의 제작기술이 필요하다. 가야식 토기 기술이 아니고는 엄두도 못 낼 분야이다. 또한 봉토원분(峰土圓墳)을 축조하는 관습은 고대부터 한국인들의 조상 숭배관념에서 생성된 한국 고유의 묘제이며 가야인들의 분묘이다.



따라서 요시노가리는 일본의 기초를 형성한 야마다이국의 본거지였으며, 야마다이국은 바로 가야·신라 세력의 부족연합국이었다는 실증이다.



요즘은 요시노가리 유적을 화려하게 복원해 놓았다. 후세들의 교육장,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면서 ‘일본 고유 문화’로 선전하고 있다. 각급 역사 교과서마다 대대적으로 취급하여, 엄연한 한국 문화의 연장임을 무시하고는 일본 문화 우월성으로 오도하여 한국 문화 경시용으로 이용하고 있다.



⑶ 한국인이 벼 종자 전달 역할


『중학사회』34쪽은 ‘일본의 시작’이라는 단원이다. 일본 역사의 기초를 설명하느라 44쪽까지 범위를 넓게 잡았다. 33쪽은 ‘조선의 시작’이라는 항목인데, 이번에는 ‘일본의 시작’으로 한·일 역사를 대비하기 위해 편집한 모양이다.


고대 일본 열도는 한국사의 연장임이 정설인데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지금부터 약 1만년전........ 사람들은 죠몬토기[繩文土器]를 만들었다. 죠몬토기는 안이 깊은 토기가 많고, 식량을 끓여먹게 되었다. 토기를 만든 때부터 벼농사가 널리 보급되는 이전 시기를 죠몬시대[繩文時代]라고 한다.”


이런 내용과 함께 니이가타현[新潟縣] 유적에서 출토된 죠몬토기의 사진을 실어 놓았다. 토기상부와 둘레에 화염(火炎)장식, 즉 불꽃모양이 장식되어 있다. 요즘은 물결장식 혹은 뱀 문양이라는 이론이 제기되고 있다. 이 죠몬토기 사진 밑에는 “주로 음식을 끓이는 데 사용했다”는 설명문을 붙여 놓았다. 죠몬토기를 음식을 끓이는 생활용기로 인식시키기 위해서다. 실은 죠몬토기는 아이누족 토기이지 고대 일본인의 토기가 아니다.



죠몬토기 중에서 음식을 끓이는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더러 있으나 화염장식의 죠몬토기는 고대신앙의 종교행사에 쓰여졌다는 것이 통설이다. 화염무늬의 죠몬토기는 모양은 화려하지만 노천에서 만든 것이므로 매우 약해 음식을 끓이거나 물을 담기에는 부적절하다. 산과 들에서 채취한 과일, 채소, 마른 어물을 담기에 알맞은 용기이다. 그래서 이들 제물을 담아 원시신앙에 이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가야 토기는 초벌구이이긴 하나 밀폐된 요(窯)에서 환원염(還元炎0을 이용하여 구운 것이므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죠몬토기를 주로 음식을 끓이는 데 사용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일본 열도에서 음식을 토기에 보편적으로 끓여 먹기 시작한 것은 한국인들이 벼농사를 가져간 이후부터의 일로 야요이토기[彌生土器]가 이에 해당한다. 야요이토기는 가야·신라 토기가 주종이다. 한국인들이 정착하면서 손수 만들어 사용한 일상생활용의 그릇이었다. 한국인들이 야요이토기를 만들게 됨에 따라 죠몬토기는 명맥이 끊겼고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따라서 벼농사와 죠몬토기는 전혀 관련성이 없는 별개의 그릇이다. 그런데도 죠몬토기로 음식을 끓여 먹었다는 것은 한국인이 만든 야요이토기를 부정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또한 “일본인은 고대부터 화려한 그릇을 생활용기로 사용했다”면서 학생들을 기만하고 있다.



⑷ 일본 역사의 시작은 사실상 한국인들이 장식



36쪽으로 넘어가면 ‘벼농사의 시작과 야요이문화[彌生文化]’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지면의 상단에는 벼농사가 전래된 추정경로를 밝힌 한·일·중 삼국지도와 가가와현[香川縣]에서 출토된 동탁(銅鐸), 북규슈 후쿠오카[福岡]의 이타즈케[板付] 유적에서 발굴된 토기 사진을 화려하게 실었다. 그리고 지도의 일본 열도에는 ‘왜(倭)’라고 써 놓았다. 벼농사가 시작된 야요이시대에 일본은 이미 ‘왜’라는 통일국가를 이룩한 것으로 표시한 것이다. 허무맹랑한 날조이다. 규슈지방에 ‘왜’로 불리는 지역이 있었으나 ‘왜’는 고대 일본의 고유 국명이 아니다.



이 지도에는 중국의 산동반도, 양자강 유역, 중국 남부의 관동지방 등 네 지방에서, 그리고 한국 남부에서 일본 북규슈 지방으로 벼농사가 전파된 경로가 그려져 있다. 일본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경로로 벼농사가 전파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한반도에서 전파된 것이 주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본문 내용을 보면 학문 이전에 ‘말장난’의 연속이다. 본문을 요약해 보자.



“지금부터 약 2천 4백년전, 수전(水田)에 의한 벼농사가 북규슈로 전해졌다. 중국의 벼농사가 조선반도 남부에서 사람들이 이주하는 것과 함께 전해진 것이다. 쌀을 생산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채집이나 수렵하는 생활에서 계획적으로 식량을 생산하는 생활로 바뀌었고 정착하게 되었다. 탄화(炭化)한 쌀이 출토된 후쿠오카의 이타즈케 유적은 벼농사가 시작할 무렵의 유적이다. 벼이삭을 훑는 돌칼 등 농기구도 발견되었다. 벼농사는 얼마가지 않아 서일본의 각지로 급속히 퍼져, 아오모리현[靑森縣]에까지 이르렀다.”



이 내용도 ‘중국의 벼농사를 한국 남부의 사람들이 이주하면서 전한 것’이라는 논법이다. 마치 벼종자 보따리를 전하기만 했다는 의미이다. 거듭 지적하지만 결코 ‘전한 것’만이 아니다. 벼농사는 장기간 정착하여 경작하는 농법이다. 이주는 포괄적인 개념이며 ‘일본에 한국인이 대거 진출하여 세력을 형성하였고 벼농사를 경작했으며 이를 일본인이 처음으로 배웠다’고 해야만 옳을 것이다.



‘중국의 벼농사가 조선반도 남부에서 사람들이 이주하는 것과 함께 전해진 것’이라는 대목은 중국을 본위로 하여 한국 문물을 부정하는 서술이다. 당시의 일본 열도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다. 한국인들이 정착한 것은 국토확장의 일환이었다.



규슈나 서일본지방에 있는 야요이시대의 왕릉급 분묘는 모두 한국식 묘제에 속한다. 야요이시대 이래 한국의 삼한, 삼국에서 대거 일본 열도로 진출하여 지방별로 분국을 설치하여 세력을 떨친 왕급의 한국인 분묘로 보아야 할 것이다. 토기, 급속기, 철제무기, 동탁, 마구(馬具)에 이르기까지 유적 출토품은 한국 민족의 솜씨로 만들어 사용했던 것들이다. 요즘 특허법으로는 시효상실이라 하겠지만 문화재의 가치로 따진다면 한국의 지적소유권에 해당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⑸ 정설은 ‘한국 벼가 일본의 품종’



1990년 5월 16일, 아사히신문 주최로 한·일 고고학 심포지엄이 열려 벼농사 전승 등 고대 한·일관계사(韓日關係史)를 토론한 일이 있다. 필자가 취재한 중요 내용을 요약해 보자.



오오츠카 하츠시게 메이지대학 교수 “요시노가리 유적에서 발견된 환호집락이 한반도에서도 대규모로 발굴되었다. 기원전 300년 내지 400년경 일본에 벼농사 문화가 전해졌다. 야요이문화의 출발이다.”



한병삼 한국 국립박물관장 “신석기시대부터 한국 남부와 북규슈가 교류한 것으로 여긴다.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에 지석묘가 집중되어 있고, 마애석기(벼 훑는 돌칼)를 사용하여 벼농사를 하던 지석묘 사회의 사람들이 새로운 동검 문화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간 것으로 생각된다. 기원전 4세기경 전남 초포리 유적에서는 동검과 다뉴세문경 등이 출토되었다. 발달한 청동기문화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것 같다.”



니시다니 타다시 규슈대학 교수 “충청남도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출토된 탄화미(炭化米)를 보면 그 벼 품종도 일본에서 벼농사가 시작할 무렵의 품종과 같다. 탄화미가 나온 송국리의 특징인 수혈식 유적 역시 일본에도 벼농사가 시작될 무렵에 출현했다.”



김원룡 서울대학 명예교수 “북한 평양의 남경 유적에서는 기원전 1천년이 넘는 탄화미가 출토되었고 한강 연변에는 2세기경 늦게 전파되었다.”



오오츠카 교수 “규슈는 기원전 300년경 벼농사를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의 벼농사 개시에 이어 금속기가 출현했다. 일본에서 청동기가 출현한 시기는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몇차례 파도처럼 인구가 밀어닥친 시기라 생각된다. 국제일본문화연구소의 하니하라 가즈로 박사는 당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총 100만명쯤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요시노가리를 비롯하여 북규슈의 야요이 유적에서 수많은 인골이 발굴된다. 그들은 누구인가?”



니시다니 교수 “유명한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의 도이가하마 유적의 인골을 분석한 결과 죠몬인과는 형질이 다르고 평균신장도 3센티미터 정도 컸다.”



우에다 마사아키 교토대학 교수 “다뉴세문경(多紐細紋鏡)은 중국에는 없는 한국의 독자적인 거울이다. 일본에서도 출토된 것은 양국의 문화가 인연이 깊음을 말한다. 요시노가리 유적에서 약 3백체의 인골이 나왔는데 아직 정식 발표는 하지 않고 있으나 인류학자들은 ‘도래형이 많다’고 한다. 도래인 집단의 문화였다고 충분히 고려할 만한데, 도래인 문화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논의가 대두하고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는가?”



도래인(渡來人)이란 현해탄을 건너간 고대 한국인들을 말한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용어이며, 한국인을 천시하는 경우에도 쓰고 있다. 이들 저명한 학자들이 공개 심포지엄에서 분석한 내용은 정설이다.


그런데 우에다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도래인 문화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논의”가 요즘 위세를 부리고 있다. 이 교과서 내용은 한국 문화 전승을 부정하는 입장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정책에 따라 교과서 집필자들이 진실을 오도하는 교육에 혈안이 되고 있는 현상이다. 후세들에게 한국인 경멸풍조를 고조시키는 가공스러운 정략이기도 하다.
[기타] 최성규(崔性圭) 著『일본의 역사는 없다.』아시아문화사編(2000년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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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oProAKB48 イルルワブァ歴史勉強再びしよう

‘稲作’ 技術が韓国に伝授されたと捏造した日本の歴史歪曲

(1) ヨシノ−がリ遺跡


1988年, ブックギュシュ[北九州] 佐賀県[佐賀県] ヨシノ−がリ[吉野里]から彌生[彌生]時代から古墳(古墳)時代にかけて類例を見られない大規模遺跡が発掘された. 日本考古学界は以前(終戦) 後最大の考古学籍成果と言いながら興奮した. その間謎のように思って来た日本歴史の基礎を成した山田異国[邪馬台国]の正体を明らかにする根拠と言いながら叫んだりした. 韓国歴史学者たちは伽揶(加耶)時代の韓国式遺物と脈絡を一緒にする遺物が零れ落ち始まり関心を集中した.

日本は透かさず小・中・高校歴史教科書ごとに教育資料にしている. ヤマがと出版高校生用『日本の歴史』は遺跡復元と出土遺物の自分を飾ってからは ‘大和[大和] 王権の成立’という単元で構えて置いた. 遺跡がどんなに形成されたと言うのに関する説明はない. 本文の重要な内容を取りまとめて見れば次のようだ.


“稲は日本型(ジャポニカゾング)と引導型(インデ−カゾング)で分けられるのに彌生[彌生]時代の遺跡で発見されたことは日本型だ. 日本型は朝鮮半島中南部地域でも発見される...... 静岡県[静岡県] 道路[登呂]遺跡のように畦で大規模の無水田を区切ったし水路図作った...... 穀物を保存する固相倉庫(高床倉庫), ファンホジブラック(環濠集落)も現われた...... また近畿地方では我が国の独自の形態を帯びた童濯(銅鐸)を作った...... 山田異国の位置に対してはずいぶん前から九州説と愛馬吐説がある. もし山田異国が九州にあったと言ったら同謀(銅矛), 東と(銅戈)の分布圏を中心にした地域的連合国であり, 大和にあったと言ったら童濯分布圏の勢力がもう西日本を支配したのがなる.”


注目される内容は ‘彌生時代の遺跡で発見された稲は日本型(ジャポニカゾング)’という部分だ. まず彌生時代にあったというジャポニカゾングはこのごろに普及されているジャポニカゾングの原種という意味を持つ. もしかしたら彌生時代の稲遺伝子(DNA)が今日まで伝わることもできるがそれをジャポニカゾングの原種で淑やかなことは過ちだ. 中国南部で伝来されたり韓国が中国の稲品種を取り入れて耕作している途中また彌生時代の日本で伝えたという従来の学説とは違う. 根源的に計算すれば稲品種の起源は中国なので中国品種と言えて, また韓国を通じて伝来されたことが定説だ.



日本列島の稲作がヨシノ−がリで伝えたということは理論の余地がないし, 伽揶人たちが伝えた実はまた定説だ. それでもこの教科書はジャポニカゾングだったと無茶な新設を提示している.


80余年の前に日本帝国主義勢力は韓国を併呑した後韓国米が日本米より味が良いと言って東洋拓殖株式会社(東洋拓殖株式会社)を立てて韓国農地を奪って京仁線(京仁線)と京釜線(京釜線)を敷設して米を収奪して間事実を思い出しても韓国品種が日本品種より断然として優秀だったことを立証する. それで日本は韓国稲品種を持って行って改良して ‘日本型(ジャポニカヒョング)’で名付けたのだ.



ところでこの教科書は ‘日本型(ジャポニカヒョング)は朝鮮半島中南部の遺跡でも発見される’と言ってジャポニカを主語にして学生たちにまるで古代に日本型が韓国で伝えたように敍述しておいた. 酒客前も(主客顛倒)の奇妙な変造(変造)と同時に欺俗(欺瞞)だ.



稲作は適地選定(適地選定), 苗床作り, 用水管理(用水管理) など長年の経験がなくては意慾も出すことができない分野だ. 古代韓国人たちが稲作を持って行く時日本先住民たちはあまりにも不思議で ‘対馬海峡を渡って来た神さまの贈り物’と仰いだ. それなのにこれからは畦, 無水田, 水路など耕作過程を説明しながら古代日本の耕作技術がうまかったことで構えておいたのだ.


日本で発掘される稲穂収獲用のドルカルなど延長は韓国のが造形(祖型)だ. そして “童濯分布圏(銅鐸分布権)の勢力がもう西日本を支配したのがなる”と言う部分も変だ. 実は日本の童濯文化圏(銅鐸文化権)は韓国童濯文化圏の年長だ. 童濯は当時古代韓国の伽揶国で渡った騎馬軍団のマタック(馬鐸), すなわち ‘マルバングウル’の一種だった. 韓国金海地方の童濯が日本童濯の先祖であるわけだ.


童濯が大和[大和]地方(奈良[奈良]とその周辺)から数量的に, また形態の大きいことがたくさん出土されると言って大和王国が九州など西日本地域を支配したということは途方もない主張だ. 文化は川水のように先進文化圏で後進地域に流れて, その過程で大きさと形態などは変化するものと決まっている. 形態が大きくて数量が多いということは統治体制が力強かったことを推論することはできるが古代から日本固有の体制が持続したことで見做すことはできない.


中学校歴史教科書ごとにヨシノ−がリで掘り出した遺物と望桜, 住いなどの写真を派手に飾って置いた. 特に波形同期(巴形銅器), 甕棺墓(甕棺墓) 中の頭がない人骨, 中央墓地で出土した銅剣(銅剣), 硝子に作った玉(玉) などの写真を引き立つように配置した. ヨシノ−がリ遺跡が日本の彌生[彌生]時代を代表する遺跡で日本固有の文化という主張を強調するためだでしょう.


しかしヨシノ−がリで出土された波形同期こそ伽揶圏の勢力だったのを明らかに証明する遺物だ. 波形同期には火炎しっぽ模様のなが葱(巴)がある. 韓・日両国で出土された波形同期は 4個のなが葱, 7個のなが葱など多様だ. ヨシノ−がリ[吉野里]では 7個なが葱の波形同期が出土されたし, 波形同期を鋳造した鋳型(鋳型)まで発見された. 多量で生産されたという証拠だ.



ところで波形同期に対する淵源は解き明かさないまま ‘日本で出土されたので仕事をしたこと’で教育させている. 波形同期は日本歴史の根を証明する重要な根拠なのにこれをそっぽを向いてからは兵士の盾文様で心に刻んでおいている. それなら日本古代史を解き明かす鍵とも言う波形同期は何か?



(2) 波形同期は金首露君王の王将



金首露王陵(金首露王陵)には門樓中央部に付いた 9個のなが葱を持った波形文様がある. 敢えて門樓の上に付けておいたことは金首露(金首露) 君王の王将(王章)や金海駕洛国(駕洛国)を象徴する局長(国章)載せるからだ. ヨシノ−がリの波形同期(巴形銅器)は金首露王陵の物とまったく同じな形態でなが葱の数が書くだけだ.


金海大成洞伽揶遺跡古墳でも 4個のなが葱(巴)を持った波形同期が出土された. ヨシノ−がリの 7個売るなが葱の数において比べるに値する. 金首露王陵の 9個以上の見張り(巴数)を持った波形同期はどの所でも発見されなかった. 見張りが多くて少なくては権威の格差のためであるでしょう. すなわち, 金首露王陵の見張りが一番多いことは金海金冠伽揶(金官加耶)を本国(本国)にして分局(分国)や王子級の場合金首露王陵見張りより少なく持つようにしたからだでしょう. 金海大成洞から 4個なが葱の波形同期が出土されたことは王子級や王孫級の墳墓(墳墓)で思われる. 波形同期と一緒に武器類が出土されることは当時は王子級が地域小菊の政治と軍事など統治権を掌握していたことを志す.


波形文様を武器の盾に刻んだことも発掘された. それで韓国のどの学者は軍隊表示だと主張した事がある. 盾さえ思ったらそういう学説もあるに値する. しかし単純に軍隊表示なら金首露王陵門樓の上にあるはずがない.


一方ヨシノ−がリで数百個の甕棺墓(甕棺墓)とワンブン(円墳)らも発見された. 皆駕洛国墓祭りだ. この頃まで日本列島の先住民倭人たちは平章(平葬)や首長(水葬)が主類だった. 日本固有のワンブンや甕棺墓遺跡が全然ないことでも分かる. 甕棺墓は黄土を原料で大型陶器を成形して素焼きで堅固に製作する特殊技術の土器として高度の製作技術が必要だ. 伽揶式土器技術ではなくては思いもよらない分野だ. またボングトワンブン(峰土円墳)を逐造する慣習は古代から韓国人たちの先祖崇拜観念で生成された韓国固有の墓祭りで伽揶人たちの墳墓だ.



したがってヨシノ−がリは日本の基礎を形成した山田異国の本拠だったし, 山田異国はまっすぐに行くと・新羅勢力の不足連合国だったという実証だ.



このごろはヨシノ−がリ遺跡を派手に修復して置いた. 後世たちの教育長, 観光資原で活用しながら ‘日本固有文化’で宣伝している. 各歴史教科書ごとに大大的に扱って, 厳然な韓国文化の延長なのを無視とは日本文化優越性で誤導して韓国文化軽視用で利用している.



(3) 韓国人が稲種子伝達役目


『中学社会』34側は ‘日本の手始め’という単元だ. 日本歴史の基礎を説明するために 44ページまで範囲を広く取った. 33側は ‘朝鮮の手始め’という項目なのに, 今度は ‘日本の手始め’で韓・日歴史を備えるために編集したようだ.


古代日本列島は韓国史の延長なのが定説なのにどんなに記述しているのかよく見る事にしよう.


“今から約 1万年前........ 人々は縄文土器[繩文土器]を作った. 縄文土器は中の深い土器が多くて, 食糧をクルヨモックゲになった. 土器を作った時から稲作が広く普及される以前時期を縄文時代[繩文時代]と言う.”


こんな内容とともに新潟県[新潟県] 遺跡で出土された縄文土器の写真を載せておいた. 土器上部とまわりに火炎(火炎)飾り, すなわち花火模様が飾られている. このごろは波飾りあるいは蛇文様という理論が申し立てられている. この縄文土器写真下には “主に食べ物を沸かすのに使った”と言う説明文を付けておいた. 縄文土器を食べ物を沸かす生活勇気で認識させるためだ. 実は縄文土器はアイヌ族土器であって古代日本人の土器ではない.



縄文土器の中で食べ物を沸かすことに推定されることもたまにあるが火炎飾りの縄文土器は古代信仰の宗教行事に使われたということが通説だ. 火炎柄の縄文土器は模様は派手だが露天で作ったことなので非常に弱くて食べ物を沸かすとか水を盛るには不適切だ. 山と野で採取した果物, 野菜, 乾いた魚物を盛るのに適当な勇気だ. それでこれらお供えを盛って原始信仰に利用したことで見える. 伽揶土器は素焼きではあるが密閉された敷布団(窯)からファンワンヨック(還元炎0を利用して焼いたことなので比較にならない. したがって縄文土器を主に食べ物を沸かすのに使ったということは嘘だ.


日本列島で食べ物を土器に普遍的に沸かして食べ始めたことは韓国人たちが稲作を持って行った以後からの一路彌生土器[彌生土器]がここにあたる. 彌生土器は伽揶・新羅土器が主従だ. 韓国人たちが定着しながら手ずから作って使った日常生活用の器だった. 韓国人たちが彌生土器を作るようになるによって縄文土器は命脈が切られたし足跡を隠してしまった. したがって稲作と縄文土器は全然関連性がない別個の器だ. それなのに縄文土器で食べ物を沸かして食べたということは韓国人が作った彌生土器を否定しようとする意図が敷かれている. また “日本人は古代から派手な器を生活勇気で使った”と学生たちを欺瞞している.



(4) 日本歴史の手始めは事実上韓国人たちが飾り



36方へ移れば ‘稲作の手始めと彌生文化[彌生文化]’という内容が出る. この地面の上端には稲作が伝来された推定経路を明らかにした韓・日・の中で三国指導と家家臥硯[香川県]で出土された童濯(銅鐸), ブックギュシュ福岡[福岡]の李タジュするように[板付] 遺跡で発掘された土器写真を派手に積んだ. そして地図の仕事をした列島には ‘倭(倭)’と書いておいた. 稲作が始まった彌生時代に日本はもう ‘なぜ’という統一国家を成したことで表示したのだ. 虚無孟浪した捏造だ. 九州地方に ‘なぜ’と呼ばれる地域があったが ‘なぜ’は古代日本の固有国名ではない.



が指導には中国の山東半島, 揚子江流域, 中国南部の関東地方など君の脂肪で, そして韓国南部で日本ブックギュシュ地方で稲作の伝えた経路が描かれている. 日本歴史学者たちはこのような経路で稲作が伝えたと主張しているが韓半島で伝えたのが主類だったということが定説だ.



本文内容を見れば学問以前に ‘言葉の遊び’の連続だ. 本文を要約して見よう.



“今から約 2千 4百年戦, 水田(水田)による稲作がブックギュシュで伝わった. 中国の稲作が朝鮮半島南部で人々が移住することと一緒に伝わったのだ. 米を生産し始めると人々は採集や狩猟する生活で計画的に食糧を生産する生活に変わったし定着するようになった. 炭化(炭化)一米が出土された福岡の李タジュするように遺跡は稲作が始める頃の遺跡だ. 稲穂を扱くドルカルなど農機具も発見された. 稲作はいくら枝なくて西日本の各地で急速に広がって, 青森県[青森県]にまで至った.”



が内容も ‘中国の稲作を韓国南部の人々が移住しながら伝えたこと’という論法だ. まるでビョゾングザ包みを伝えてばかりしたという意味だ. 重ねて指摘するが決して ‘伝えられたこと’だけではない. 稲作は長期間定着して耕作する農法だ. 移住は包括的な概念で ‘日本に韓国人が大挙進出して勢力を形成したし稲作を耕作したしこれを日本人が初めて学んだ’と言えばこそ正しいだろう.



‘中国の稲作が朝鮮半島南部で人々が移住することと一緒に伝わったこと’という書き入れ時は中国を本位にして韓国文物を否定する敍述だ. 当時の日本列島は無主空山(無主空山)だった. 韓国人たちが定着したことは国土拡張の一環だった.



九州や西日本地方にある彌生時代の王陵級墳墓は皆韓国式墓祭りに属する. 彌生時代であると言う韓国の三韓, 三国で大挙日本列島で進出して地方別で分局を設置して勢力をふるったワンググブの韓国人墳墓で見なければならないでしょう. 土器, 急速期, 鉄製武器, 童濯, 馬具(馬具)に至るまで遺跡出土品は韓国民族の腕前で作って使ったものなどだ. このごろ特許法では時效喪失とするが文化財の価値で計算したら韓国の知的所有権にあたると言っても関係ない.



(5) 定説は ‘韓国稲が日本の品種’



1990年 5月 16日, 朝日新聞主催で韓・日考古学シンポジウムが開かれて稲作戦勝など古代韓・日関係史(韓日関係史)を討論した仕事がある. 筆者が取材した重要内容を要約して見よう.



大塚ハツの時なの明治大学教授 “ヨシノ−がリ遺跡で発見されたファンホジブラックが韓半島でも大規模に発掘された. B.C. 300年ないし 400年頃日本に稲作文化が伝わった. 彌生文化の出発だ.”



ハンビョングサム韓国国立博物官長 “新石器時代から韓国南部とブックギュシュが交流したことで思う. 全羅南道と慶尚南道に支石墓が集中されていて, 磨崖石器(稲扱くドルカル)を使って稲作をした支石墓社会の人々が新しい銅剣文化を持って日本に渡ったことと考えられる. B.C. 4世紀頃全南チォポリ遺跡では銅剣とダニュ−セムンギョングなどが出土された. 発達した青銅器文化を持って日本に渡ったようだ.”



NishidaだからTadashi九州大学教授 “忠清南道付与宋国利遺跡で出土されたタンファミ(炭化米)を見ればその稲品種も日本で稲作が始める頃の品種のようだ. 炭化米価出た宋国利の特徴である輸血式遺跡も日本にも稲作が始まる頃に出現した.”



ギムワンリョングソウル大学名誉教授 “北朝鮮平壌の南京遺跡ではB.C. 1千年が過ぎる炭化米価出土されたし漢江辺には 2世紀頃遅く伝えた.”



大塚教授 “九州はB.C. 300年頃稲作を始めたことと考えられる. 日本の稲作開始に引き続き金属器が出現した. 日本で青銅器の出現した時期は韓半島から日本列島で何回波のように人口が押しかけた時期で考えられる. 国際日本文化研究所のハニしなさいカズで博士は当時韓半島で日本に総 100万名ほど全ことで推正している. ヨシノ−がリを含めてブックギュシュの彌生遺跡で幾多の人骨が発掘される. 彼らはだれか?”



Nishidaだから教授 “有名なYamaguchi県下関のドイがするよ遺跡の人骨を分析した結果縄文人とは形質が違って平均身の丈も 3センチメートル位大きかった.”



UedaMasaaki京都大学教授 “ダニュ−セムンギョング(多紐細紋鏡)は中国にはない韓国の独自の鏡だ. 日本でも出土されたことは両国の文化が縁が深さを言う. ヨシノ−がリ遺跡で約 3白体の人骨が出たがまだ正式発表はしていないが人類学者たちは ‘到来型が多い’と言う. 到来である集団の文化だったと充分に考慮するに値するのに, 到来である文化で認めないという論議がもたげていることは変ではないのか?”



到来である(渡来人)と言う(のは)玄海灘を渡った古代韓国人たちを言う. 韓国人という事実を隠すための用語であり, 韓国人を蔑む場合にも使っている. これら著名な学者たちが公開シンポジウムで分析した内容は定説だ.


ところでUeda教授が指摘したように “到来である文化で認めないという論議”がこのごろ威勢を使っている. この教科書内容は韓国文化戦勝を否定する立場(入場)に重点を置いているのだ. 教育政策によって教科書執筆者たちが真実を誤導する教育に血眼になっている現象だ. 後世たちに韓国人軽蔑風潮を高めるがゴングスロウン政略でもある.
[その他] チェ・ソンギュ(崔性圭) 著『日本の歴史はいない.』アジア文化史編(2000年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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