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칼이 울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장군들
이순신, 권율, 유성룡, 신립, 원균, 곽재우, 김시민, 李일, 김여물
임진왜란 왜군 장수
혼도 타다치카, 다이호우지 요시카즈, 다테 마사무네, 시로이시 무네자네, 하라다 무네토키 이코마 카즈마사, 가토 기요마사, 이로베 나가자네, 우츠노미야 구니츠나, 미야베 나가후사 신죠 나오타다, 오다테 요시자네, 고니시 유키나가, 고니시 유키카게, 나이토 죠안 스즈키 시게토모, 카키야 츠네후사, 오가모 모토키요, 사세 모토요시, 이이다 나오카게 구로다 나가마사, 고토 모토츠구, 모리 토모노부, 소 요시토시, 오오이시 토모히사 아리마 노리요리, 아리마 하루노부, 아카마츠 노리후사, 후쿠하라 나카타카, 하라다 타다스케 우키다 히데이에, 우키다 타다이에, 하나부사 마사나리, 오카 토시카즈, 토가와 미치야스 모리 테루모토, 모리 히데모토, 고바야카와 타카카게, 호이다 모토키요,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안고쿠지 에케이, 깃카와 하루이에, 시시도 모토츠구, 후쿠하라 히로토시, 사와 타카히데 요시미 히로요리, 다카하라 츠구카즈, 요시다 마사시게, 에무라 치카토시, 오토모 요시무네 시가 치카모리, 하라다 노부다네, 타지리 아키다네, 다치바나 무네시게, 다카하시 무네마스 몬쥬죠 무네카게, 에가와 노부토시, 사가와 노부토시, 고토 스미하루, 고토 하루마사 도쿠이 미치토시, 구루지마 미치후사,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키 요시타카 구키 히로타카, 구키 모리타카, 무라카미 다케요시, 무라카미 모토요시, 가토 요시아키 반 나오유키, 간 미치나가, 모리 무라하루, 토모나가 사키야스, 후쿠다 카네치카 쵸소카베 모토치카, 쵸소카베 모리치카, 코소카베 치카야스, 이토 요시카타, 이토 스케타카 시마즈 요시히로, 시마즈 토요히사, 시마즈 타다토키, 시마즈 타다츠네, 니이로 타다모토 이쥬인 타다무네, 다네가시마 히사토키, 아키츠키 다네나가, 가바야마 하사타카 요시히로 무네유키, 나베시마 나오시게, 오타 카즈요시, 마츠우라 시게노부, 츠쿠시 히로카도 하치츠카 이에마사, 이코마 치카마사, 쿠마다니 모토나오, 호소카와 타다오키 가메이 고레노리, 쵸쥰인 모리아츠 빠진 놈있으면 추가 알아서
명량대첩[鳴梁大捷]
이순신이 통제사(統制使)에서 물러난 뒤 원균(元均)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일본 수군과 대전했으나 다대포(多大浦)·칠천곡(漆川谷)에서 대패하여 해상권을 상실하였다. 원균의 패전으로 같은 해 백의종군(白衣從軍) 중인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패전 후 남은 13척의 전선과 수군을 정비하여 닥쳐올 전투에 대비하였다. 왜군에게 대패하여 얼마남지 않은 조선수군의 전력을 우려하자 당시 이순신은 선조에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함이 남아있습니다."라고 비장한 각오의 장계를 올렸다. 8월 왜선 8척이 해남의 어란포(於蘭浦)에 출현하자 이를 격퇴하고, 진(陣)을 진도(珍島) 벽파진(碧波津)으로 옮겼다. 9월 7일에는 서쪽으로 이동하던 왜선 55척 중 호위 적선 13척이 어란포에 나타나자, 한밤중에 이순신이 선두에서 지휘하여 적선을 격퇴시켰다. 다시 적의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9월 15일에 벽파진에서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옮긴 뒤 장병들에게 “必死則生, 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라고 말하고 필승의 신념으로 적의 내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9월 16일 왜선 133척이 어란포를 떠나 명량으로 공격해오자, 13척의 전선과 군사를 정비하여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지휘하는 왜선 31척을 무찔렀다. 이 싸움으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