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인 카미카제 탁경훈 소위)
이들 조선인 카미카제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이들 16명의 조선인 카미카제들은 사후 한국, 일본 어디에서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악랄한 식민지 착취를 당했던 조선인들이면서도 이들은 지배국가 일본을 위해 가장 극단적 충성의 방법으로 목숨을 바쳤다. 경남 사천에 탁경훈의 위령비를 건립하려던 일본인의 시도가 지역 주민의 반대로 무산된 일이나, 노용우의 유족이 그의 유골을 극비리에 일본 정부로부터 돌려받은 사실등이 그들에 대한 한국민과 한국정부의 입장을 보여준다.
그들은 총 24만명에 달하는 강제 징병, 강제 동원 동포들(일본 자료)과는 달리 한국과 한국민들에게서 철저하게 버려진 사람들이다. 그들이 조선인 카미카제 였다는 사실도,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있다는 사실도 한국인들에게는 알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진실이다.
그들은 어떤 이유로 카미카제에 지원했고,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친 걸까 ? 진심으로 일본이 승리하기를 바랬던 것일까 ? 아니면 단지 조종사가 되고 싶은 꿈을 이룬 후 카미카제를 강요받은 불쌍한 조선 청년들일 뿐일까 ?
이들중 육군 특별 조종 견습사관 1기 생이었던 노용우, 김상필, 탁경현, 석교지량등 4명은 초기 지원자가 많았던 당시 상황상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엘리트였다. 즉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길이라는 점이다. 일본군에 자원 입대해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카미카제에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왜 그들은 망해가는 일본을 위해 죽기로 결심한 것일까 ? 심플하게 단지 그들은 맹목적인 일본 충성파였기 때문이었나 ? 그렇게 믿기에 마음에 걸리는 몇 가지들이 있다.
탁경현은 1945년 5월 10일 오키나와 출격 하루 전 날, 비행 학교 내 육군 식당에서 조국의 노래라며 아리랑을 울며 불렀다고 한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조선인임을 주위에 밝힌 것이다. 왜 그랬을 까 ???

(아리랑 노랫소리를 먼 조국에 남겨놓고 간 11명. 조선반도 출신 특공대원 11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이 비석을 세운다 - 치란 특공 평화 회관 조선인 카미카제 기념패)
일본 하늘에서 미군 B-29 폭격기를 들이받고 숨진 노용우는 죽음의 출격을 할 당시 호주머니에 조선 엽서를 간직하고 있었으며, 조선의 가족들에게 만일 자신이 죽을 경우 고향집에 있는 자신의 기록을 모두 불태워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카미카제로 죽고 조국이 광복됬을 경우, 자신의 죽음이 어떻게 평가받을 지 어느정도 예상했다고 보여진다.
개인적으로도 이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지 난감하다. 친일 행위를 한 것이 맞으니 친일파는 맞지만, 그렇게 쉽게 치부해 버릴수 없는 뭔가가 그들에게 있었던 듯 싶다. 조선인 카미카제 16명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대체로 그들은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품은 채로 욱일 승천기 아래 목숨을 바친 것이다.
뭐였을 까 ?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은 ?
비슷한 시기,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카미카제 훈련을 받았던 87세의 유수영씨가 당시를 회고하며 쓴 글에서 그 실체를 어렴풋이나마 찾아 볼 수 있다.
저는 일정(日政) 때 조선인 징병 1기 해당자로 금년에 86세가 됩니다. 우리 세대의 해는 이미 저물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그나마 앞으로 얼마 안 있어 모두 사라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의 세대는 영원히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꼭 해두고 싶은 말을 지금부터 하겠습니다. 일본 자살 특공대 가미카제(神風) 대원이었던 경남 사천시 출신 탁경현씨가 1945년 5월 11일 비행기를 몰고 오키나와 섬에 정박 중이던 미군 함대를 향해 돌진, 자폭하여 생을 마감했던 바로 그날, 저는 당시 대전에 있었던 일본군 제224부대 병영 안에서 징집된 육군 일등병으로 폭약상자를 등에 메고 적군의 전차 밑으로 뛰어들어 자폭하는 훈련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만일 전쟁이 몇달만 더 끌었더라면 저는 아마 어느 전선엔가 보내져서 훈련받은 그대로 인간 지뢰가 되어 적군의 전차 밑으로 뛰어들어 죽었을 것입니다. 탁경현씨와 저는 나이도 그 당시 20대 전반으로 같은 세대였습니다. 저희들 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일본 국민이었습니다. 그것도 무기력하게 나라를 잃은 선대들의 원죄를 물려받아 병역의무가 없는 대신 참정권이 없어 일본인들로부터 온갖 차별을 받는 열등한 2등 국민이었습니다. 그 서러움은 젖먹이 나이 때부터 일본에서 자라난 저에게는 더욱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 닿았습니다. 같은 동족 어른들 사이에서 "조선 독립"이라는 속삭임이 간혹 어렴풋이 들리긴 했지만, 그것은 시궁창에서 살고 있는 소녀가 꿈속에서 신데렐라를 보는 것만큼이나 현실성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조선인에게도 병역의무가 주어져 저 자신이 징집 1기에 해당되게 되었습니다. 사실이지 두려웠습니다. 죽는 게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부터 저희들을 대하는 일본인들의 태도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바로 대놓고 "조센진(朝鮮人)" 하고 민족을 비하(卑下)하여 부르던 그들이 그 말을 쓰는 것을 스스로 금기시하게 되고, 대신 지역을 말하는 "한토진(半島人)"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너희들에게도 곧 참정권이 주어져서 우리들과 같은 권리행사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일본인 친구가 늘어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