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
특히 13∼16세기에 걸쳐 한국과 중국의 연안에 수시로 침입하여 인명을 해치고 재산을 약탈하던 일본의 해적집단.“내가 죽으면 호국용(護國龍)이 되어 왜적을 막겠으니 바다에 묻어 달라”고 했다는 신라 문무왕(文武王)의 유언이 입증하는 바와 같이 한반도에서의 왜구의 침입은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있어 왔으나, 이들이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여 ·원(麗元)연합군이 일본원정에 실패한 고려 후기부터이다.
왜구는 1350년대를 전후한 충정왕 때부터는 그 규모가 100척 이상으로 확대되어 점차 경상 ·전라 ·충청 ·경기의 연안에까지 그 활동무대를 넓혔으며, 때로는 황해도 ·평안도에서도 노략질을 하였다. 왜구의 구성원은 전락한 지방 호족(豪族) ·무사(武士), 연해(沿海) 거주의 빈민 또는 밀무역집단으로 이루어졌고, 그 약탈대상물은 주로 식량이어서, 지방에서 조세(租稅)를 거두어 서울로 올라가던 조선(漕船:곡물운반선)은 그들의 좋은 ‘먹이’였으며, 육지에 올라와서는 재물은 물론 사람까지 잡아다 노예로 팔아넘기는 등 만행을 일삼아 연안과 농어촌 사회를 파괴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릉을 도굴, 이른바 문화재를 훔쳐가는 등, 그 약탈대상물이 다양하였다.
일본의 이키[壹岐] ·쓰시마[對馬] ·기타큐슈[北九州]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등을 근거지로 삼았던 왜구는 충정왕 ·공민왕 ·우왕에 이르는 40년 동안 100~500척의 선단으로 떼를 지어 마치 전쟁을 하는 군단을 방불케 하여 경기도 강화(江華)의 교동(喬桐)과 예성강(禮城江) 어구 등 수도의 코앞에서 노략질을 자행하였을 뿐 아니라 내륙 깊숙이까지 들어와 수도 개경(開京)의 치안까지 위협하였다.
고려는 무력으로 왜구를 토벌하는 한편 외교적으로 이를 타개하기 위해 1366년(공민왕 15) 이후 김일(金逸) ·나흥유(羅興儒) ·정몽주(鄭夢周) 등을 일본 무로마치바쿠후[室町幕府]에 보내어 왜구들에 대한 엄중단속을 요청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고려는 자체방위력의 강화에 힘써 74년(공민왕 23) 새로운 수군(水軍)의 창설을 주장한 이희(李禧)의 건의에 따라 전함을 건조하고, 연해의 여러 곳에 수군을 두어 이를 수군도만호(水軍都萬戶) ·만호 등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였다. 76년(우왕 2)의 경우는 왜구의 행패 때문에 그 해의 조운(漕運:서울로의 곡물운반)을 아예 그만두기도 하였으며, 한양 ·충주(忠州) ·철원(鐵原) 등에로의 천도(遷都) 의견까지 나왔다.
77년(우왕 3)에는 최무선(崔茂宣)의 건의에 따라 화통도감(火
都監)을 설치하여 화약 ·화포 등 각종 화기를 제조함으로써 왜구 격퇴에 큰 효과를 거두었다. 특히 화통도감을 관장한 최무선은 육화석포(六火石砲) ·철탄자(鐵彈子) ·주화(走火) ·화포 등 많은 종류의 화기를 만들어 80년(우왕 6) 충남 진포(鎭浦:舒川郡)에 침입한 왜구선 500척을 모두 불태운 큰 전과를 올렸다. 고려 말의 연중행사처럼 되어온 왜구의 침입은 정치의 불안정과 국가재정을 크게 기울게 하였으며, 이 때 왜구 토벌에 공이 컸던 이성계는 이를 계기로 더욱 정치세력을 굳히게 되었으며, 왜구는 고려 멸망의 큰 원인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이들 왜구의 침입은 그치지 않아 왜구의 침입이 잦은 해안지역에 만호(萬戶)와 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를 두어 해안을 엄히 방위하였다. 또한 왜구의 근절을 외교로써 이루고자 대일교섭을 통하여 왜구의 금압을 요구하는 한편, 회유책도 병행하여 수직왜인(受職倭人)이라 하여 조선 관직을 주어 우대하고, 투화(投化) ·향화(向化) 등의 왜인에게는 밭과 집을 주기도 하였다. 또한 그들이 조선에서 물자를 얻으려는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기 위해 무역의 길을 열어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도주(島主)에게 조선에 대한 무역통제의 특권을 주는 대신 왜구를 단속하는 책임을 지웠다. 이에 따라 경상도 동래의 부산포 등을 개항하여 왜선의 정박지로 정하고 이들 개항장에 왜관(倭館)을 설치해서 이곳을 중심으로 무역거래를 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럼에도 왜구가 근절되지 않자, 1419년(세종 1)에는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하여 쓰시마를 정벌하고 개항장인 3포(浦)를 폐쇄하기도 하였으나, 그들의 간청으로 부산포, 웅천(熊川)의 내이포(乃而浦:薺浦), 울산의 염포(鹽浦) 등 3포를 개항하여 이후 이 곳에는 사절로 들어오는 사송왜인(使送倭人), 교역을 위하여 오는 흥리왜인(興利倭人)이 수도서인(受圖書人)이라 하여 정식입국자로서 응분의 대우를 받았다.
고려시대 이래의 왜구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같은 여러 공식적인 호칭으로 변신(變身)하여 조선에 들락거리면서 공무역 또는 사무역을 하여 세종 말에는 부산포에 350명, 내이포에 1,500명, 염포에 120명이 거주하여 이들이 저지르는 폐해도 컸으므로, 당국도 거류왜인의 통제에 부심하였다. 3포라는 무역창구를 열어줌으로써 왜구의 약탈행위를 막아보려던 당국의 노력은 어느 정도 주효하였으나, 이들에 대한 강력한 통제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 삼포왜란(三浦倭亂, 1510)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 44) ·을묘왜변(乙卯倭變, 50) 등은 조선의 선린정책에도 불구하고 왜인은 ‘구(寇)’라는 해적 근성을 버리지 못하였음을 보여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