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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일본인 마을,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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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낙동강 시대-스토리가 흐르는 마을] (18) 칠곡 구왜관마을 <2>

매일신문| 기사입력 2010-11-17 11:39 기사원문 칠곡군 약목면 관호2리 구왜관은 ‘왜(倭)’와 ‘백포(柏浦)’가 줄곧 갈등해온 마을이다.

그 보이지 않는 갈등은 조선 초기와 중기에서 비롯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구왜관의 지명은 조선 초기 낙동강변에 설치된 왜인들의 교역 공관, 왜관(倭館)에서 따왔다. 구왜관에는 마을 지명뿐 아니라 삼국시대 쌓은 백포산성이 왜성으로 불리고, 왜성모퉁이의 부정적 이미지도 여태 남아 있다.

상당수 주민들은 이 때문에 마을 이름도 구왜관 대신 마을을 둘러싼 백포산과 백포산성을 따 ‘백포’로 불리길 원하고 있다. 백포는 조선 중기 의병 조직과 제도 개혁에 상당한 역할을 한 문신, 채무(蔡楙;1588~1670)의 호이기 때문이다. 구왜관은 이처럼 부정적 이미지를 지닌 왜와 선비의 기개를 내포한 백포가 충돌하면서 변화해온 마을이다.

◆백포산과 산성

백포산은 해발 110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유구한 역사와 숱한 질곡을 간직한 산이다. 백포 채무가 정계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낸 지역이어서 백포산으로 불린다. 백포는 병자호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조직해 남한산성으로 향했고, 세금과 부역을 줄이고 제도를 개혁하는 등 선정을 베푼 문신.

삼국시대 백포산에 쌓은 산성이 백포산성인데, 약목면 관호리 지명을 따 관호토성 또는 관호산성으로도 불린다. 내성(內城)은 동서 18m, 폭 50m 정도이고, 외성(外城)은 북쪽에 흔적만 남아 있다. 성의 동쪽과 남쪽은 절벽 아래 낙동강이 흘러 자연지형을 그대로 활용한 셈이다. 경북대박물관 조사에 따르면 산성은 삼국시대 신라가 쌓은 토성으로, 지금도 성터 곳곳에 삼국시대 토기 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다.

백포산성은 조선과 근대로 넘어오면서 커다란 상처와 아픔을 겪었다. 각종 기록이나 주민들의 전언을 감안할 때 산성은 조선시대 왜관에 머물렀던 왜인들이 새로 돋우고, 임진왜란 당시 왜인들이 군사거점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주민 상당수는 이 산성을 삼국시대 신라인이 아닌 조선시대 일본인들이 쌓은 성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재수(69) 씨는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여 있었던 거라. 그래 이순신 장군이 스윽 둘러보고 돌아갔단 얘기가 있거든. 왜놈들이 진을 쳤응께 왜성이라캤지”라고 말했다.

또 ‘조선지’ ‘칠곡지’ 등에는 왜인들이 교역을 하면서 상품의 밀거래나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조그마한 야산(백포산)에 돌과 흙으로 왜관 담장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왜인들이 물품을 쌓아 보관하고, 이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기존 토성을 보수했을 것으로 점쳐진다.

산성은 또 60년대 제방공사 과정에서 많이 허물어진 것으로 보인다. 제방공사에 사용된 돌 대다수가 이 산성터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김윤수(73) 씨는 “산성에 돌이 많았는데, 산마루에서 밑으로 굴려가지고, 소달구지에 실어다가 돈 벌었지. 사촌형님이 소 구루마를 가지고 돌을 빼다가 (제방공사) 현장에 가져가고 그랬다”며 “공사현장에 실어 주면 그 돌로 방천을 쌓았다고. 돈 준다 캐니께 내나 없이 다 몰려서 돌을 뽑았지”라고 말했다.

“그때 돈 많이 벌어 묵었다. 돌 빼가 팔면 요새로 말하자면 하루 일당 돈 십만원 정도라. 산에서 밭에다 막 굴린기라. 돌 빼내면 순서대로 굴린기라. ‘요번에는 내 굴린다. 다음에는 니 굴리라’ 하는 식으로. 성 그거 무너뜨리고 그러는데 관에서 암말도 안했어. 왜성이니까 그대로 둔거라.”

이재수 씨도 백포산성의 돌이 낙동강 제방공사에 대다수 사용됐다는 증언을 실감나게 설명했다.

백포산성은 그렇게 삼국시대 토성에서 조선시대 왜인들의 군사거점과 왜관의 상품 보관창고, 근대 낙동강 제방의 골재로 활용되면서 1천500여년을 이어왔다.

◆왜성모퉁이, 침류대와 귀신바위

낙동강과 함께 구왜관의 대표적 상징인 백포산은 왜성모퉁이와 침류대, 귀신바위 등의 흔적과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주민들은 백포산 동쪽 끝 지점과 낙동강 양수장이 맞닿은 곳의 가파른 절벽 모서리를 ‘왜성모퉁이’라고 한다. ‘왜가 쌓은 성의 모퉁이’란 뜻이다.

왜성모퉁이는 낮과 밤을 통해 긍정과 부정의 이미지를 각각 가진 지형을 갖고 있다. 왜성모퉁이 절벽 위 침류대는 마을 어른들이 낮에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절벽 위 넓은 공터에서 마을 훈장과 어른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었다고 한다.

김윤수 씨는 “왜성모퉁이 절벽 위 소나무 옆에 크고 평평한 바위가 침류대인데, 글씨(시)도 쓰고, 놀기도 하던 그런 데였다”며 “옛 어른들이 풍류를 즐기던 큰 바위였는데, 세월이 흘러 많이 깎여나갔다”고 말했다.

귀신바위는 왜성모퉁이 절벽에서 밤이면 귀신이 보인다고 마을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홍영표(58) 씨는 “강에서 배를 타고 손전등을 비추면서 가는데, 바위 위에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가 서 있는 거라. 날이 흐리고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 제일 선명하고, 달빛 있는 날은 으스스하게 보인다”고 말했다.

다른 주민들도 낮이 아닌 밤에, 맑은 날이 아닌 비오는 날에 귀신처럼 보이는 바위여서 밤에는 왜성모퉁이를 잘 다니지 않는다고 했다.

왜성모퉁이 절벽 아래에는 또 자그마한 도로 준공비가 하나 있다.

4음절, 7행으로 된 이 비석 문구를 풀이해보면, ‘산이 험하고 강이 가로막아, 여기에 이르러 통하지 않으니, 위의 집은 새들의 길이요, 아래 (낙동강) 흐름은 용궁이라, 관과 민이 함께 힘을 모아/천 번을 실어 나른 후/공사의 마침을 기록한다’로 돼 있다.

새들의 길, 용의 궁이란 표현을 통해 옛 어른들의 풍류와 재치가 돋보이는 준공비이다.

이 비석은 주민들이 일제 강점기인 1941년 11월 왜성모퉁이 앞길이 좁고 위험해 시멘트 길을 내면서 비를 세웠는데, 70년대 양수장을 건립하면서 원래 있던 비와 받침돌을 깎아내는 과정에서 허물어진 바람에 별도로 세운 것이다.

김윤수 씨는 “왜정 때 몇몇 유지들이 돈을 내 길을 닦았어. 돌을 세웠는데, 뒤에 양수장 공사를 하면서 무너지는 바람에 탁본을 해 새로 만들었다고. 건설사에 요구해 돈을 좀 얻어가지고, 석물공장 하는 내 친구한테 얘기해 비를 새로 세웠거든”이라고 했다.

◆구왜관나루터와 어부

마을에 접한 낙동강의 상류쪽 왜관철교 인근에는 고대부터 나루가 있었다. 구왜관나루터는 예부터 사람들의 이동수단, 소금배를 비롯한 물자 교역 등 교통`물류의 핵심 통로로 활용됐다.

하지만 1930년대 중앙선과 경북선이 개통되면서 경북 북부지역 화물량이 줄고, 1941년 기존 경부선 왜관철교가 국도(왜관교)로 바뀌면서 나루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1904년 부설된 경부선이 41년 복선화되면서 왜관철교가 상류 100m 지점으로 옮겨 가설되고, 기존 왜관철교는 사람과 차량이 다닐 수 있는 왜관교(현 호국의 다리)로 활용됐던 것. 뱃길 대신 이동이 편리한 다리가 생기면서 나루는 자연스럽게 이용률이 떨어지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왜와의 교역통로로, 부산 소금배 및 강 건너 마을과의 교통로로 기능했던 구왜관나루터는 해방 이후 고기잡이배의 통로로만 활용됐다. 80년대 후반까지 구왜관에는 배를 활용해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꽤 있었지만, 지금은 매운탕집을 운영하는 홍영표 씨가 유일하다.

홍 씨는 “지금은 고성능 엔진으로 움직이지만, 옛날에는 노 저어 고기 잡고, 돛으로 바람타고 움직였지”라며 “구미공단이 점차 확대되면서 80년대 후반 물이 크게 나빠져 잉어회도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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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尚北道日本人村,倭館

[神さま洛東江時代-ストーリーが流れる村] (18) 漆谷旧倭館村 <2>

毎日新聞| 記事入力 2010-11-17 11:39 記事原文 src=http://imgnews.naver.com/image/088/2010/11/17/20101116_152352000.jpg漆谷郡若木面グァンホ2里旧倭館は ‘倭(倭)’と ‘白布(柏浦)’がずっと迷って来た村だ.

その見えない葛藤は朝鮮初期と中期から始まって今までつながっている. 旧倭館の地名は朝鮮初期洛東江弁に設置された倭人たちの交易公館, 倭館(倭館)から取った. 旧倭館には村地名だけではなく三国時代積んだ白布酸性がわい星と呼ばれて, わい星角の否定的イメージも今まで残っている.

かなり多い数住民たちはこのために村名前も旧倭館代わりに村を取り囲んだ白布山と白布酸性をいじめ ‘白布’と呼ばれるのを願っている. 白布は朝鮮中期義兵組職と制度改革に相当な役目を一入れ墨, 債務(蔡楙;1588‾1670)の号だからだ. 旧倭館はこのように否定的イメージを持ったなぜと士の意気を内包した白布が衝突しながら変化して来た村だ.

◆白布山と山城

白布山は海抜 110mのかなり低い山だが, 悠久な歴史と多い桎梏をおさめた山だ. 白布債務が政界で退いて余生を送った地域なので白布山と呼ばれる. 白布は丙子胡乱の時の故郷で義兵を組織して南漢山城で向けたし, 税金と賦役を減らして制度を改革するなど選定を施した入れ墨.

三国時代白布山に積んだ山城が白布酸性なのに, 若木面グァンホリ地名を取ってグァンホトソングまたはグァンホサンソングとも呼ばれる. 耐性(内城)は東西 18m, 幅 50m 程度で, 外姓(外城)は北に跡だけ残っている. 城の東と南側は絶壁の下洛東江が流れて自然地形をそのまま活用したわけだ. 慶北大博物館の調査によれば酸性は三国時代新羅が積んだ土星で, 今も城跡あちこちに三国時代土器切れなどが発見されている.

白布酸性は朝鮮と近代に越えて来ながら大きな傷と痛みを経験した. 各種記録や住民たちの言い伝えを勘案する時酸性は朝鮮時代倭館にとどまった倭人たちが新たに掻き立てて, 壬辰の乱当時倭人たちが軍事拠点で使ったことに推定される. このために住民かなり多い数はこの酸性を三国時代新羅人ではない朝鮮時代日本人たちが積んだ城で認識したりする.

リ・ジェス(69) さんは “壬辰の乱の時加藤紀要マーサ(加藤清正)がであっていたで. そう李舜臣将軍がスウック見回して帰ったという話があるよ. 倭人たちがチンをチョッウングにウェソングイラケッジ”と言った.

また ‘朝鮮誌’ ‘漆谷誌’ などには倭人たちが交易をしながら商品の密売や盗難を防止するためにやや小い野山(白布山)に石と土で倭館垣根を積んだという記録がある. 倭人たちが物品を積んで保管して, これを忘れてしまわないために既存土星を補修したことで占われる.

酸性はまた 60年代堤防工事過程でたくさん崩れたように見える. 堤防工事に使われた石大多数がこのサンソングトから出たからだ.

ギムユンス(73) さんは “酸性に石が多かったが, 山の端から下に転がしていて, 疎逹旧地に積んで来て金儲けしたの. いとこ御兄さんが牛1を持って石を抜いてから (堤防工事) 現場に持って行ってそうだった”と “工事現場に積んでくれればその石で防川を積んだと. お金払うケニに出すがなしにすべて追われて石を抜いたの”と言った.

“あの時お金たくさん儲けて泊った. 石ペが八面この頃に言うと一日日割りお金十万ウォン位だと. 山で畑にちょうどグルリンギだと. 石抜き取れば順にグルリンギだと. ‘今度は私の転がす. 次にはお前転がしなさい’ する式で. 性それ崩してそうするのに管でアムマルもしなかったの. わい星だからそのまま置いたので.”

リ・ジェスさんも白布酸性の石が洛東江堤防工事に大多数使われたという証言を実感の出るように説明した.

白布酸性はそのように三国時代土星で朝鮮時代倭人たちの軍事拠点と倭館の商品保管倉庫, 近代洛東江堤防の骨材に活用されながら 1千500余年を続いて来た.

◆わい星角, チムリュデと鬼岩

洛東江とともに旧倭館の代表的象徴である白布山はウェソングモトングとチムリュデ, 鬼岩などの跡と思い出をおさめている. 住民たちは白布山東末地点と洛東江揚水場が触れ合った所の険しい絶壁角を ‘わい星角’と言う. ‘なぜが積んだ城の角’と言う意味だ.

わい星角は昼と夜を通じて肯定と不定のイメージをそれぞれ持った地形を持っている. わい星角絶壁の上チムリュデは村大人たちが昼に風流を楽しんだ所だ. 絶壁の上広い空所で村勲章と大人たちがさかずきを傾けて詩を詠じたと言う.

ギムユンスさんは “わい星角絶壁の上松横に大きくて平たい岩がチムリュデなのに, 字(時)も書いて, 遊んだりしたそんなところだった”と “昔の大人たちが風流を楽しんだ大きい岩だったが, 歳月が経ってたくさん刈られて行った”と言った.

鬼岩はわい星角絶壁で夜なら鬼が見えると里人たちが付けた名前だ.

ホングヤングピョ(58) さんは “川で船に乗って手前等を照らしながら行くのに, 岩の上に白い素服を着た女が立っていると. 日が曇って雨がしとしとと降る日一番鮮かで, 月明りある日は薄ら寒く見える”と言った.

他の住民たちも昼ではない夜に, 清い日ではない雨降る日に鬼のように見える岩なので夜にはわい星角をよく通わないと言った.

わい星角絶壁の下にはまたやや小さいもとの通りに竣工費が一つある.

4音節, 7行になったこの碑石文具を解いて見れば, ‘山が険しくて川が塞いで, ここに至って通じないから, 上の家は鳥たちの道であり, 下の (洛東江) 流れは竜宮だから, 管と民が一緒に力を合わせて/千番(回)を積んで運んだ後/工事の終えることを記録する’になっている.

鳥たちの道, 容疑宮と言う(のは)表現を通じて昔の大人たちの風流と気ばたらきが引き立つ竣工費だ.

が碑石は住民たちが日帝強点期の 1941年 11月わい星角前の道が狭くて危なくてセメント道を作りながら雨を立てたが, 70年代揚水場を建立しながら元々あった雨降って下敷石を切ってやる過程で崩れたせいで別に立てたのだ.

ギムユンスさんは “倭政の時何人の維持たちがお金を出して道を磨いたの. 石を止めたが, 後に揚水場工事をしながら崩れるせいで拓本をして新たに作ったと. 建設社に要求してお金をちょっと得ていて, 石物工場する私の友達に話して雨を新たに立てたとなら”と言った.

◆旧倭館渡し場と漁夫

村に接した洛東江の上流側倭館鉄橋隣近には高麗大学から渡り場があった. 旧倭館渡し場は古くから人々の移動手段, 塩盃を含めた物資交易など交通`物流の核心通路に活用された.

しかし 1930年代中央線と慶北線が開通しながら慶北北部地域貨物量が減って, 1941年既存京釜線倭館鉄橋が国道(倭館校)に変わりながら渡り場は急激に衰退し始めた. 1904年敷設された京釜線が 41年伏線化されながら倭館鉄橋が上流 100m 地点に移して仮設されて, 既存倭館鉄橋は人と車が通うことができる倭館校(現護国の足)に活用されたこと. 波路代わりに移動が便利な橋ができながら渡り場は自然に利用率が落ちるようになったのだ.

朝鮮時代から日帝強点期までなぜとの交易通路で, 釜山塩盃及び川向こう村との交通路に機能した旧倭館渡し場は解放以後漁船の通路にだけ活用された. 80年代後半まで旧倭館にはお腹を活用して魚を捕る漁夫たちがかなりあったが, 今はメウンタン集を運営するホングヤングピョさんが唯一だ.

紅さんは “今は高性能エンジンで動くが, 昔には櫓を漕いで漁を取って, 帆でバラムタで動いたの”と言いながら “亀尾工業団地が徐徐に拡がりながら 80年代後半水が大きく悪くなって鯉のさしみも人気が落ち始めたの”と言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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