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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의 강제동원 (비판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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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노동력을 착취하기 시작한 일제는 태평양 전쟁이 폭발된 후로 징용령을 실시하여 막대한 노동력을 공장, 광산, 군사 기지로 끌어갔으며 심지어 연약한 여성들까지도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였다. 이리하여 아시아 전역에서 비명에 죽고, 고초를 당한 우리 동포는 수백만이나 되었다. 


여기서의 ‘여자정신대’는 그들이 강제동원되어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이 없어 그 실체가 매우 애매하다. 그렇지만 그녀들이 끌려간 곳 가운데 ‘군사 기지’가 있어 그녀들의 성(性)이 일본군에 의해 착취되었음이 강하게 시사되고 있다. 간호부도 아닐진대 정신대란 이름의 여성이 ‘군사 기지’에서 달리 무슨 일을 하였겠는가? 나는 이 1968년의 언저리에서 정신대를 위안부와 동일시하는 민족설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망치질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2) 공교롭게도 전술한 대로 일제가 토지의 40%를 수탈했다는 신화도 바로 이 언저리에서 생겨났다. 신화의 속성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 위의 글을 썼으며, 그의 정신세계에서 어떠한 개인적 체험이나 정보가 상호작용을 일으켜 부지불식간에 양자를 오버랩시키게 했는지까지 파헤칠 필요가 있으나 추후의 연구과제로 미룰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와 같은 1968년 교과서의 정신대 서술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으며, 이후 1978년까지 교과서에서 정신대나 위안부에 관한 서술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다시 나타난 것은 1979년의 국정 교과서에서이며 이후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고 있다. 중등 교과서를 중심으로 서술이 변해온 과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79∼1982년: (일제는) 학도 지원병제와 징병제를 실시하여 우리 학생과 청년들을 전선으로 끌어갔으며 심지어는 젊은 여자들까지도 산업 시설과 전선으로 강제로 끌어갔다.


1983∼1996년: (일제는) 우리 청장년을 강제로 징용하여 공장에서 노동을 시켰고 마침내는 학도 지원병제와 징병제를 실시하여 우리 청년 학생들을 전선으로 끌어갔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자들까지도 침략 전쟁의 희생물로 만들었다.
1997∼2001년: 일제는 <중략> 강제 징병제와 학도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에 많은 한국의 청장년들이 각지의 전선에서 희생되었다, 이 때 여성까지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로 희생되기도 하였다.
2002년∼ : 일제는 여성들도 근로 보국대, 여자 근로 정신대 등의 이름으로 끌고 가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더욱이 많은 수의 여성을 강제로 동원하여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아시아 각 지역으로 보내 군대 위안부로 만들어 비인간적인 생활을 하게 하였다. 


1979∼1982년간은 젊은 여자가 끌려 간 곳 가운데 ‘산업 시설’이 있어 원래의 정신대를 가리키는 취지가 엿보이나 동시에 ‘전선’에도 끌려갔다고 하여 곧 위안부로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1983-1996년의 14년간에는 “여자들까지도 침략 전쟁의 희생물로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실제 어떻게 희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지만, 여자가 희생되었다고 할 때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연상하지 못할 중학생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오랜 기간의 망치질을 통해 드디어 작품이 완성되는 것은 1997년이다. 이후 2001년까지 중등 국사 교과서는 “여성까지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로 희생되기도 하였다”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여기에 이르러 정신대와 위안부를 등치시키는 한국인의 집단기억이 국사의 이름으로 훌륭히 공식화되었다. 
정신대와 위안부를 등치시키는 집단기억의 성립에는 국사 교과서만이 유일한 공로자가 아니었다. 특히 언론의 부주의하고 심지어 선정적이기까지 한 보도자세가 한 몫을 하였다. 위안부 문제가 한국인의 국민적 관심사로 떠 오른 것은 1992년이다. 그 해에 김학순(金學順) 할머니가 자신의 위안부 경력을 고백함으로써 성노예제를 조직한 구 일본군의 범죄행위를 국제사회에 고발하였다. 당시 도하 신문과 방송에서 위안부에 관한 공식 호칭은 거의 정신대 일색이었다. 역사가라고도 할 수 없는 어느 교수는 1944년 8월의 「여자정신근로령」을 낡은 법전에서 찾아 낸 다음, 일제가 순결한 여학생들을 위안부로 대량 동원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왔다고 소란을 떨었다. 그러자 가장 유력한 일간지의 하나가 그의 주장을 그대로 1면의 톱기사로 보도하였다. 
"1997년도 교과서의 극단적인 오류는 2002년에 이르러 수정되었다. 앞서 인용, 소개한 대로 2002년도 교과서는 정신대와 위안부를 구별하여 전자가 노동력의 착취임을, 후자가 성의 착취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 같은 수정은 역사를 사실에 근거하여 써야만 하는 역사가의 직업윤리에서 볼 때 환영할 만한 일이다. 저간에 위안부 문제에 관한 국내의 높아진 연구수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교과서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거기서는 아직 “젊은 여성들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지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하여 위안부를 일제가 동원한 정신대의 부분집합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게 한번 만들어진 민족설화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좀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면서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Ⅴ. 맺음말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지난 20세기 전반의 식민지기와 관련하여 그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몇 가지들, 예컨대 일제가 대규모 토지를 수탈하였다거나 대량의 쌀을 약탈하여 실어 날랐다든가 전시기에 여자정신대를 동원하여 일본군위안부로 삼았다든가 하는 대중적 이해는 역사가의 시각에서 지적하자면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그러한 오해가 국민의 집단기억으로 성립한 것은 이 글에서 추적한 대로 한국의 국사 교과서가 학생들을 그렇게 가르친 효과가 장기간 누적됨에 의해서이다. 해방 후부터 국사 교과서가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사실관계의 왜곡은 없었던 편이다. 신화가 만들어지는 조짐은 1960년대부터 조금씩 관찰되며, 1974년 이후 교과서 편찬제도가 국정으로 바뀌면서 전면화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토지의 40%가 수탈되었다는 이야기가, 식량의 절반이 수탈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이야기가 교과서에서 정설로 자리 잡는 것은 1974년부터이다. 1932년부터 존재한 위안부를 1943∼1945년간의 정신대와 혼동하는 교과서의 서술은 1979년부터 1997년까지의 18 년간에 걸쳐 서서히 완성되었다.

국민국가가 그의 국민을 고급스런 문명인으로 교육하고자 하는 그 교과서에서 사실관계에 기초하지 않은 신화가 근 30년간이나 전파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이나 배경은 무엇일까? 이 글은 거기까지 충분히 추적하지 않았다. 그것은 장래의 연구과제이다. 한 가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교과서 집필자들의 질적 수준이다. 특히 국정(國定)제도로 바뀐 이후 그 문제가 심각하였다. 예컨대 토지의 40% 수탈설의 경우 그 40%라는 수치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를 근 30년 동안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따진 적이 없음은 솔직히 말해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다.3) 그것도 처음에는 ‘전국의 토지’라 했는데 언제부턴가 ‘전국의 농토’로 표현이 바뀌고 있다. 심지어 같은 해의 중등 교과서와 고등 교과서의 표현이 ‘토지’와 ‘농토’로 서로 다르다. 그 둘의 뜻이 같지 않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지만, 교과서 집필자들은 그에 대해 무신경하였다. 대개 그들은 전임자가 쓴 것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기본 줄기는 그냥 답습하고 나머지 가지 부분은 마치 수필을 쓰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이러 저리 표현을 고쳤던 것이다. 정신대와 위안부에 관한 각 연도의 기술도 집필자들이 정성을 다해 정확히 쓴 것이라기보다 기존의 교과서를 적절히 윤색하다가 우연히 양자를 등치시키는 그 곳에까지 다다랐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렇지만 교과서의 집필자들에게만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국민을 정치적으로 동원함에 신화를 필요로 하였던 정치인들, 신화를 기꺼이 수용하였던 국민 대중, 나아가 이들 모두를 포섭한 20세기 후반 한국사회의 문명, 그 비교사적 수준과 구조적 특질, 이 모두가 신화 만들기의 주역과 조연으로서 앞으로 우리가 추적해야 할 대상들이다. 

나는 이 글을 20세기 전반 한•일 양국의 불행한 역사를 초래함에 중대한 책임이 있는 일본인들에게 그들의 식민지 지배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는 안도감을 주기 위해 쓴 것은 결코 아니다. 솔직히 말해 그 점에 대해 우려가 없지 않지만, 그 점을 회피하기 위한 전술적 고려에서라면 기존의 통념을 뛰어넘는 어떠한 글도 쓸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이 일본인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개의치 않는다. 나는 역사가로서 역사의 신이 주관하는 법정에 선 증인과 같은 심정으로, 오직 진실만을 말하리라는 선서에 기초하여, 말할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 글에 대해 한국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는다. 다만 한 가지 개의함이 있다면, 이 글이 한국인들이 그들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로부터 주체적인 책임의식과 통합적인 성찰을 얻음에 약간의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책임의식과 성찰이 배제된 역사의식은, 다시 말해 다른 민족과 다른 인간에 대한 비난과 분노만의 역사의식은, 국가 간에 또 사회구성원 간에 갈등과 대립만을 야기할 뿐이다. 거기서는 배려와 협동의 미덕을 상실한 인간들이 거칠게 충돌할 뿐이다. 나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각 층위에서 전개되고 있는 갈등과 대립의 현장을 목도하면서 우리 한국인들이 이미 그러한 충돌의 소용돌이에 깊숙이 빠진 것이 아닌가라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 소용돌이의 원천에는 내가 이 글의 서두에서 정의한 신화의 마성이 작용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 점을 다시 한번 경계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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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상과 같은 위안부의 역사와 관련하여 주로 참고한 전문 연구서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1997), 요시미(1999), 秦郁彦(1999), 尹明淑(2003), 정진성(2004) 등이다. 개략적인 서술이기 때문에 예민한 논점과 관련하여 일일이 주기를 달지 않음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2) 이 글의 초고를 읽은 朴枝香 교수는 이 대목에서 필자가 논리를 비약시키고 있다고 충고하였다. 박 교수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 부분을 수정할 의향이 전혀 없지 않았지만 원래대로 그냥 두었다. 내가 논리를 비약시키고 있다기보다 읽는 사람마다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교과서 서술의 애매함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3) 이 글에서 본격적으로 검토하지는 않았지만 2002년 이후 국사 교육의 현장에 종사하고 있는 교사도 함께 집필진에 참가하고 있는 『한국근현대사』라는 교과서에서도 납득할 수 없는 숫자가 함부로 제시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예컨대 김한종 외 5인은 위안부로 동원된 수를 ‘수십만’ 명으로, 한철호 외 5인은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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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軍慰安婦の強制動員 (批判では)-2

勤労保国隊という名前で労動力を搾取し始めた日製は太平洋戦争が爆発された後で徴用領を実施して莫大な労動力を工場, 鉱山, 軍事基地でクルオガッウであり甚だしくはか弱い女性たちまでも女従軍慰安婦(女子挺身隊)という名前で強制動員こんにちはだった. かくしてアジア全域で悲鳴に死んで, 苦楚にあったうちの同胞は数百万もなった. 


ここでの ‘女従軍慰安婦’は彼らが強制動員されて何の事をしたのかに大韓直接的な敍述がなくてその実体が非常にあい昧だ. ところが彼女たちが引かれて行った所の中 ‘軍事基地’があって彼女たちの性(性)が日本軍によって搾取されたことが強く時事されている. 看護婦もアニルジンデ従軍慰安婦と言う(のは)名前の女性が ‘軍事基地’で他に何の事をしたのか? 私はこの 1968年の生え際で従軍慰安婦を慰安婦と同一視する民族説話を作り出すためのマングチジルが始まったと思う.2) あいにくにもくだんの大道日帝が土地の 40%を収奪したという神話もまさにこの生え際でできた. 神話の速成を完全に理解するためには誰がの上の文を書いたし, 彼の精神世界でどんな個人的体験や情報が相互作用を起こして知らず知らず養子をオーバーラップさせるようにヘッヌンジまで暴く必要があるが追後の研究課題で延ばすしかない. 
しかし上のような 1968年教科書の従軍慰安婦敍述はあまり長続きしなかったし, 以後 1978年まで教科書で従軍慰安婦や慰安婦に関する敍述は見えない. それがまた現われたことは 1979年の国政ギョグァソエソで以後今まで切れていない. 中等教科書を中心に敍述が変わって来た過程を紹介すれば次のようだ.   1979〜1982年: (日製は) 学徒志願兵制と徴兵制を実施してうちの学生と青年たちを電線でクルオガッウでありはなはだしくは若い女達までも産業施設と電線で強制でひいて行った.


1983〜1996年: (日製は) 私たちの青壮年を強制に徴用して工場で労動をさせたしついには学徒志願兵制と徴兵制を実施してうちの青年学生たちを電線でひいて行った. だけでなく我が国の女達までも侵略戦争の生けにえで作った.
1997〜2001年: 日製は <中略> 強制徴兵制と学徒志願兵制度を実施した. ここに多い韓国の青壮年たちが各地の電線で犠牲された, この時女性までも従軍慰安婦という名前で引かれて行って日本軍の慰安婦に犠牲されたりした.
2002年〜 : 日製は女性たちも勤労保国隊, 女勤労従軍慰安婦などの名前で連れて行って労動力を搾取した. なおかつ多い数の女性を強制に動員して日本軍が駐屯しているアジア各地域に行かせて軍隊慰安婦で作って非人間的な生活をするようにした. 


1979〜1982年間は若い女が引かれて行った所の中 ‘産業施設’があって元々の従軍慰安婦を示す主旨が覗き見えるが同時に ‘電線’にも引かれて行ったと言ってすぐ慰安婦になったことを暗示している. 1983-1996年の 14年間には “女達までも侵略戦争の生けにえで作った”つらくてある. 実際どんなに犠牲されたのかに対しては言及がないが, 女が犠牲されたと言う時その言葉の意味が何なのか連想することができない中学生はあまりないと思う. こんなに長年の期間のマングチジルを通じていよいよ作品が完成されることは 1997年だ. 以後 2001年まで中等国史教科書は “女性までも従軍慰安婦という名前で引かれて行って日本軍の慰安婦に犠牲されたりした”と学生たちを教えた. ここに至って従軍慰安婦と慰安婦を等値させる韓国人の集団記憶が国史の名前に立派に公式化された. 
従軍慰安婦と慰安婦を等値させる集団記憶の成立には国史教科書だけが唯一の功労者ではなかった. 特に言論の不注意して甚だしくはエロチックできわまりない報道姿勢が一分け前をした. 慰安婦問題が韓国人の国民的関心事に浮び上がったことは 1992年だ. その年にギムハックスン(金学順) お婆さんが自分の慰安婦経歴を告白することで盛怒例題を組織した句日本軍の犯罪行為を国際社会に告発した. 当時渡河新聞と放送で慰安婦に関する公式呼称はほとんど従軍慰安婦一色だった. 史家ともできないどの教授は 1944年 8月の 「女精神勤労領」を古い法典で捜し出した後, 日製が純潔な女学生たちを慰安婦で大量動員した動くことができない証拠が出たと騷乱を落とした. すると一番有力な日刊紙の一つが彼の主張をそのまま 1面のトップ記事で報道した. 
1997年度教科書の極端的な間違いは 2002年に至って修正された. 先立って引用, 紹介したとおり 2002年度教科書は従軍慰安婦と慰安婦を区別して電子が労動力の搾取なのを, 後者が誠意搾取なのを明確にしている. このような修正は歴史を事実に根拠して書かなければならない史家の職業倫理で見る時歓迎するに値する仕事だ. 這間に慰安婦問題に関する国内の高くなった研究数与えたおかげさまだと思う. ところが高等学校教科書を見れば必ずそうでもない. そこではまだ “若い女性たちを従軍慰安婦という名前で強制動員して軍需工場等地で酷使させたし, その中一部は電線に連れて行って日本軍慰安婦にする蛮行をやらかしたと言って慰安婦を日帝が動員した従軍慰安婦の部分集合で説明している. そのように一度作られた民族説話を乗り越えるのは易しくない事だ. 私たちはもうちょっと多い時間と費用をかかりながら待たなければなら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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