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손기정
孫基禎
1912년 5월 29일 평북 신의주~ 2002년 11월 15일
학력 고려대학교 경영 학사 (명예)
1936년 3월 9일 제 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2시간 29분 19초, 세계신기록, 등번호 382번)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1963), 대한육상경기연맹 고문(1965년), KOC(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1966년) 1957년 대한민국 체육상 1967년 서울신문사 체육상
13초 3: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주 마지막 100m 기록
2000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팀 고문
1985 KOC 상임고문
1937년 3월 양정고등보통학교, 1940년 3월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했다. 어릴 때부터 달리기를 좋아하여 점원, 인쇄공 일을 하면서도 달리기를 계속했으며, 16세에 일본 고학길에 올랐고 20세에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만학의 길을 걸었다. 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마라톤 선수생활을 시작하여 1935년 일본에서 열린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1차 예선대회에서 우승한 후, 같은 해 4월과 5월 서울에서 열린 국내 마라톤 대회에서 모두 우승했다. 그해 11월 일본에서 열린 베를린 올림픽 대회 최종예선을 겸한 전(全)일본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여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대표선수로 선발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를 잘 견디어내 숱한 스포츠 일화를 남겼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2시간 29분 19초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세계무대에 알려지지 않은 신인으로서 제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회 우승자인 아르헨티나의 자발라, 영국의 하퍼, 핀란드의 타미라 등 쟁쟁한 우승후보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2위를 차지한 영국의 하퍼는 레이스 도중 손기정에게 "서두르지 말라"는 충고를 보내주기도 하여 스포츠맨십의 귀감으로 전해졌다. 3위는 한국의 남승룡이 차지했다. 경기 후 한 기자가 반환점부터 그토록 스피드를 낸 이유를 묻자, "인간의 육체란 의지와 정신에 따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한다"고 대답하여 그의 스포츠맨십은 후배선수들에게 교훈으로 남았다. 그러나 시상식 게양대에 일장기가 오르고 일본국가가 연주되자 우승자의 모습에는 치욕의 표정이 역력했다. 또 그는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출전했는데, 〈동아일보〉의 이길용 기자는 일장기를 없앤 사진을 실어 민족혼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는 "당시 한국인들이 개인적으로 명성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지요. 그러나 스포츠는 예외였습니다.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나는 "꼭 1등을 하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전세계인은 "손기정은 한국인임"을 알게 될 테니까요"라고 그때를 회고해 그의 애국심에 고취된 정신력을 엿볼 수 있게 했다.
누가 보아다 그는 금메달 리스트가 아니었다. 그는 기쁨의 함성도 국기를 흔들지도 않은 채 패잔병의 모습으로 경기장을 빠져 나왔다.
시상식이 진행되던 그 시간에도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국기가 게양되고 일본의 국가가 연주되어도 그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는 마음으로 울고 있었다. 조국을 잃은 한 젊은이는 마음으로 울고 있었다.

손기정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후 얼마뒤 한국 친구에게 엽서를 보냈다. 그의 친필 엽서에는 "슬프다" 라는 단 한 문장만이 오륜 마크 밑에 적혀 있었다. 당시 식민지배하에서 일본 국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던 조선 청년의 통탄의 심경을 느낄 수 있다.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는 짧은 한문장이 적혀 있었다.
슬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