アメリカ陸軍インド・ミャンマー全域君所属
アメリカ展示情報局心理作戦組
APO 689
日本人虜審問補で
第49号.審問場所: レも虜収容所
審問期間: 1944年 8月 20日‾9月 10日
報告年月の: 1944年 10月 1日
レポーター: T/3 Alex Yorichi
虜: 朝鮮人慰安婦 20人
逮捕年月の: 1944年 8月 15日
到着年月の: 収容所に 1994年 8月 15日
前書き
が見てからは 1944年 8月 10日頃ミャンマーのミチナハムラック後の掃討作戦で逮捕した 20人の朝鮮人¥"慰安婦¥"と 2人の日本民間人に対する審問で得た情報によるのだ.
が見てからはこれら朝鮮人¥"慰安婦¥"を徴集するために日本軍が使った方法, 慰安婦の生活及び労動の条件, 日本軍兵士に対する慰安婦の関係と反応, 軍事情勢についての慰安婦の理解位を見せてくれている.
¥"慰安婦¥"と言う(のは)将兵のために日本軍に属している売春婦, すなわち 「従軍売春婦」に過ぎない. ¥"慰安婦¥"という用語は日本軍特有の物だ. この見て以外にも日本軍において戦闘が必要な場所にはどこにでも ¥"慰安婦¥"が存在して来たことを見せてくれる報告がある. しかしこの見てからは日本軍によって徴集されてまたミャンマー駐屯日本軍に属している朝鮮人¥"慰安婦¥"にだけついて記述したのだ. 日本は 1942年にこの女性たち約 7百3人を海上輸送したと伝わっている.
徴集;
1942年 5月初旬日本の取り持ち業者たちが日本軍によって新たに征服された東南アジア製紙役での ¥"慰安役する¥"を引き受ける朝鮮人女性を徴集するために朝鮮に到着した. これ ¥"役目¥"の性格は明示されなかったがそれは病院にある負傷兵を慰問して包帯を巻いてくれてそして一般的に言わば将兵を楽しくしてくれることに係わる事だと考えられた.
これらの取り持ち業者の誘引する言葉は多額の金銭と家族の団扇を返済することができる豪気, そこに楽な事と新天地-シンガポール-での新生活という将来性だった. このような虚偽説明を信じて多くの女性が海外勤務に応募して 2,3百円のアドバンスを受けた.
これら女性の中には売春に以前から関係していた者もちょっといたが大部分は売春について無知であり, 無教育だった. 彼女たちの締結した契約は家族の団扇弁済にあてるために前途された金額にしたがって 6ヶ月から 1年にわたって彼女たちを軍医規則と 「慰安所の包主」のための役目で縛っておいた.
これらの女性約 8百人がこのようにして徴集されて 1942年 8月 20日経元所の包主にひかれてランググングに上陸した. 彼女たちは 8人ないし 22人の集団で群がって来た. 彼女たちはここでミャンマーの多くの地方に通常は日本軍駐屯地近くにある相当な規模の都市に倍速された. 結局これら集団中の 4個が及ぶが近所に到逹した. これらの集団はキョエイ, グィンスイ, バロシンロ, 某某野党がだった. コエイウィアンソはMaruyamaクラブと呼ばれているのに及ぶが駐屯部隊長であるMaruyama対座が彼の名前とそっくりな名称であることに異意を申し立てたから慰安婦たちが到着した時改称された.
性向;
審問によって判明されたところでは平均的な朝鮮人慰安婦は 25歳ほどで無教育, 幼稚, 気まぐれでそして自分勝手だ. 慰安婦は日本式基準で見るとか白人式基準で言っても美人ではない. とにかく自己中心的で自分に関する巻くに値したがる.
分からない人の前では物静かで静かな態度を見せるが女として知るのはすべて分かっている. 自分の職業が嫌いだと言っているし職業についてや家族仕事に関しても話したがらない.
虜としてミチナとレドの米軍から親切な待遇を受けたから米軍が日本軍隊よりも人情が多いと思っている. 慰安婦は中国兵士と引導兵士を恐がっている.
生活及び労動の条件;
ミチナで慰安婦たちは各部屋がある 2階の大規模家屋(普通は学校の教師)に宿泊とあった. それぞれの慰安婦はそこで寝食をして営業をした. 彼女たちは日本軍から決まった食料品配給を受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からミチナでは慰安所の包主から彼が調逹した食料品を買っていた.
ミャンマーでの彼女たちの生活は他の所と比べるとぜいたくな位だった. この点はミャンマー生活 2年の間に対して特に強調す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 食料と物資の配給量は多くなかったが願う物品を購入するお金を充分にもらっていたから彼女たちの暮し向きは良かった. 彼女たちは故郷から送った慰問品を受けた軍人が与える各種贈り物に追加してそれを補う衣類, 履き物, 巻煙, 化粧品を買うことができた.
彼女たちはミャンマー滞留の中で将兵と一緒にスポーツ行事に参加しながら楽しく過ごしてまたピクニック, 演芸会, 晩さん会に出席した. 彼女たちは蓄音機を持っていたし都市ではショッピングしに外出するのが許容された.
料金制も;
慰安婦の営業条件は軍によって規制されて慰安所の利用度が
米軍記録を通じる慰安婦実態の評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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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기록을 통한 위안부 실태의 평가
미국 육군 인도·버마 전역군 소속
미국 전시정보국 심리작전반
APO 689
일본인 포로 심문보고
제49호.심문장소: 레도 포로수용소
심문기간: 1944년 8월 20일~9월 10일
보고연월일: 1944년 10월 1일
보고자: T/3 Alex Yorichi
포로: 조선인 위안부 20명
체포연월일: 1944년 8월 15일
도착연월일: 수용소에 1994년 8월 15일
서론
이 보고는 1944년 8월 10일경 버마의 미치나함락 후의 소탕작전에서 체포된 20명의 조선인"위안부"와 2명의 일본 민간인에 대한 심문에서 얻은 정보에 따른 것이다.
이 보고는 이들 조선인"위안부"를 징집하기 위해서 일본군이 사용한 방법, 위안부의 생활 및 노동의 조건, 일본군 병사에 대한 위안부의 관계와 반응, 군사정세에 관해서의 위안부의 이해정도를 보여주고 있다.
"위안부"란 장병을 위해서 일본군에 소속되고 있는 매춘부, 즉 「종군 매춘부」에 불과하다. "위안부"라는 용어는 일본군 특유의 것이다. 이 보고 이외에도 일본군에 있어서 전투가 필요한 장소에는 어디에나 "위안부"가 존재해 왔음을 보여주는 보고가 있다. 그러나 이 보고는 일본군에 의해서 징집되어 또 버마주둔 일본군에 소속돼 있는 조선인"위안부"에만 관해서 기술한 것이다. 일본은 1942년에 이 여성들 약 7백3명을 해상수송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징집;
1942년 5월 초순 일본의 주선업자들이 일본군에 의해서 새로이 정복된 동남아시아 제지역에서의 "위안역할"을 맡을 조선인 여성을 징집하기 위해 조선에 도착했다. 이 "역할"의 성격은 명시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병원에 있는 부상병을 위문해서 붕대를 감아주고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장병을 즐겁게 해 주는 것에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되었었다.
이들의 주선업자가 유인하는 말은 다액의 금전과 가족의 부채를 변제할수 있는 호기, 거기에 편한 일과 신천지-싱가포르-에서의 신생활이라는 장래성이었다. 이와같은 허위 설명을 믿고 많은 여성이 해외근무에 응모하여 2,3백엔의 전도금을 받았다.
이들 여성 중에는 "매춘"에 이전부터 관계하고 있던 자도 약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매춘에 관해서 무지 하며, 무교육이었다. 그녀들이 체결한 계약은 가족의 부채변제에 충당하기 위해 전도된 금액에 따라서 6개월에서 1년에 걸쳐 그녀들을 군의규칙과 「위안소의 포주」를 위한 역할로 묶어 놓았다.
이들의 여성 약 8백 명이 이렇게 해서 징집되어 1942년 8월 20일경"위안소의 포주"에 끌려서 랑궁에 상륙했다. 그녀들은 8명 내지 22명의 집단으로 몰려왔다. 그녀들은 여기에서 버마의 여러 지방에 통상은 일본군 주둔지 근처에 있는 상당한 규모의 도시에 배속됐다. 결국 이들 집단 중의 4개가 미치나 부근에 도달했다. 이들의 집단은 쿄에이, 귄스이, 바로신로, 모모야였다. 코에이위안소는 "마루야마 클럽"으로 불려지고 있는데 미치나 주둔부대장인 마루야마 대좌가 그의 이름과 흡사한 명칭인 것에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에 위안부들이 도착했을때 개칭되었다.
성향;
심문에 의해서 판명된 바로는 평균적인 조선인 위안부는 25세 가량이며 무교육, 유치, 변덕스럽고 그리고 제멋대로이다. 위안부는 일본식 기준으로 보거나 백인식 기준으로 말하더라도 미인은 아니다. 어쨌건 자기중심적이며 자기에 관한 말만하고 싶어 한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차분하고 조용한 태도를 보이지만 "여자로서 알 것은 다 알고 있다." 자기의 "직업"이 싫다고 말하고 있으며 직업에 관해서나 가족 일에 관해서도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포로로써 미치나와 레도의 미군으로 부터 친절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미군이 일본군대보다도 인정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위안부는 중국병사와 인도병사를 무서워하고 있다.
생활 및 노동의 조건;
미치나에서 위안부들은 각 방이 있는 2층의 대규모 가옥(보통은 학교의 교사)에 숙박하고 있었다. 각각의 위안부는 거기에서 침식을 하고 영업을 했다. 그녀들은 일본군으로부터 일정한 식료품 배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미치나에서는 "위안소의 포주"로부터 그가 조달한 식료품을 사고 있었다.
미얀마에서의 그녀들의 생활은 다른 곳과 비교하면 사치스러울 정도였다. 이 점은 버마생활 2년 동안에 대해서 특히 강조할 수 있을 것이다. 식료와 물자의 배급량은 많지 않았지만 원하는 물품을 구입할 돈을 충분히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들의 살림살이는 좋았었다. 그녀들은 고향에서 보내온 위문품을 받은 군인이 주는 각종 선물에 추가해서 그것을 보충할 의류, 신발, 권연, 화장품을 살 수가 있었다.
그녀들은 버마 체류 중 장병과 같이 스포츠 행사에 참가하면서 즐겁게 지내고 또 피크닉, 연예회, 만찬회에 출석했다. 그녀들은 축음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도시에서는 쇼핑하러 외출하는 것이 허용됐다.
요금제도;
위안부의 영업조건은 군에 의해서 규제되고 위안소의 이용도가 놏은 지역에서는 규칙은 엄격히 실시되었다. 이용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군은 요금 이용 우선순위 및 특정지역에서 작전을 실시하고있는 각 부대를 위한 이용시간 할당제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
업자에게 속았다고는 하지만 가족의 빚을 변제한다는 이유로 자발로서 응모하여 위안부가 되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위안이라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거기에 대하여 추긍할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고 보인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직업」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 한국에서 주장하는 「성노예」와는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는 일본에서「가족에게 팔렸다」라는 주장과 관계가 있어보인다. 그들의 가족은 위안부 응모에 적극적이였다고 추측된다.
한국에서 주장하는 「성노예로서 폭력을 휘두르고 야만적으로 대하였다」라는 부분과는 대조되게 그들은 일본군보다 중국병사나 인도병사에 대해서 두려워한다.
그들의 대부분은 일본으로부터 식료품이나 배급을 받지 못했지만 위안부 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충분히 생활하고 있었고 때로는 일본군이 고향으로부터 받는 위품을 받기도 하고 있는 것을 보아 한국의「업자가 돈을 빼앗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벌지 못했다」라는 주장과는 상반된다.
또 그들은 「장병과 같이 스포츠 행사에 참가하면서 즐겁게 지내고 또 피크닉, 연예회, 만찬회에 출석했다. 그녀들은 축음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도시에서는 쇼핑하러 외출하는 것이 허용됐다.」라는 기록을 보아 한국이 주장하는 「납치, 감금, 강간」과는 다르게 비교적 자유로워 보인다.
참고로 현재의 한국의 매춘실태는 「납치, 감금, 강간」이 성행하고 있다. 현재의 한국과는 사뭇 다른 형태로서 활동되어 있던 것 같다.
미국 전시정보국 심리작전반
APO 689
일본인 포로 심문보고
제49호.심문장소: 레도 포로수용소
심문기간: 1944년 8월 20일~9월 10일
보고연월일: 1944년 10월 1일
보고자: T/3 Alex Yorichi
포로: 조선인 위안부 20명
체포연월일: 1944년 8월 15일
도착연월일: 수용소에 1994년 8월 15일
서론
이 보고는 1944년 8월 10일경 버마의 미치나함락 후의 소탕작전에서 체포된 20명의 조선인"위안부"와 2명의 일본 민간인에 대한 심문에서 얻은 정보에 따른 것이다.
이 보고는 이들 조선인"위안부"를 징집하기 위해서 일본군이 사용한 방법, 위안부의 생활 및 노동의 조건, 일본군 병사에 대한 위안부의 관계와 반응, 군사정세에 관해서의 위안부의 이해정도를 보여주고 있다.
"위안부"란 장병을 위해서 일본군에 소속되고 있는 매춘부, 즉 「종군 매춘부」에 불과하다. "위안부"라는 용어는 일본군 특유의 것이다. 이 보고 이외에도 일본군에 있어서 전투가 필요한 장소에는 어디에나 "위안부"가 존재해 왔음을 보여주는 보고가 있다. 그러나 이 보고는 일본군에 의해서 징집되어 또 버마주둔 일본군에 소속돼 있는 조선인"위안부"에만 관해서 기술한 것이다. 일본은 1942년에 이 여성들 약 7백3명을 해상수송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징집;
1942년 5월 초순 일본의 주선업자들이 일본군에 의해서 새로이 정복된 동남아시아 제지역에서의 "위안역할"을 맡을 조선인 여성을 징집하기 위해 조선에 도착했다. 이 "역할"의 성격은 명시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병원에 있는 부상병을 위문해서 붕대를 감아주고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장병을 즐겁게 해 주는 것에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되었었다.
이들의 주선업자가 유인하는 말은 다액의 금전과 가족의 부채를 변제할수 있는 호기, 거기에 편한 일과 신천지-싱가포르-에서의 신생활이라는 장래성이었다. 이와같은 허위 설명을 믿고 많은 여성이 해외근무에 응모하여 2,3백엔의 전도금을 받았다.
이들 여성 중에는 "매춘"에 이전부터 관계하고 있던 자도 약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매춘에 관해서 무지 하며, 무교육이었다. 그녀들이 체결한 계약은 가족의 부채변제에 충당하기 위해 전도된 금액에 따라서 6개월에서 1년에 걸쳐 그녀들을 군의규칙과 「위안소의 포주」를 위한 역할로 묶어 놓았다.
이들의 여성 약 8백 명이 이렇게 해서 징집되어 1942년 8월 20일경"위안소의 포주"에 끌려서 랑궁에 상륙했다. 그녀들은 8명 내지 22명의 집단으로 몰려왔다. 그녀들은 여기에서 버마의 여러 지방에 통상은 일본군 주둔지 근처에 있는 상당한 규모의 도시에 배속됐다. 결국 이들 집단 중의 4개가 미치나 부근에 도달했다. 이들의 집단은 쿄에이, 귄스이, 바로신로, 모모야였다. 코에이위안소는 "마루야마 클럽"으로 불려지고 있는데 미치나 주둔부대장인 마루야마 대좌가 그의 이름과 흡사한 명칭인 것에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에 위안부들이 도착했을때 개칭되었다.
성향;
심문에 의해서 판명된 바로는 평균적인 조선인 위안부는 25세 가량이며 무교육, 유치, 변덕스럽고 그리고 제멋대로이다. 위안부는 일본식 기준으로 보거나 백인식 기준으로 말하더라도 미인은 아니다. 어쨌건 자기중심적이며 자기에 관한 말만하고 싶어 한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차분하고 조용한 태도를 보이지만 "여자로서 알 것은 다 알고 있다." 자기의 "직업"이 싫다고 말하고 있으며 직업에 관해서나 가족 일에 관해서도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포로로써 미치나와 레도의 미군으로 부터 친절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미군이 일본군대보다도 인정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위안부는 중국병사와 인도병사를 무서워하고 있다.
생활 및 노동의 조건;
미치나에서 위안부들은 각 방이 있는 2층의 대규모 가옥(보통은 학교의 교사)에 숙박하고 있었다. 각각의 위안부는 거기에서 침식을 하고 영업을 했다. 그녀들은 일본군으로부터 일정한 식료품 배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미치나에서는 "위안소의 포주"로부터 그가 조달한 식료품을 사고 있었다.
미얀마에서의 그녀들의 생활은 다른 곳과 비교하면 사치스러울 정도였다. 이 점은 버마생활 2년 동안에 대해서 특히 강조할 수 있을 것이다. 식료와 물자의 배급량은 많지 않았지만 원하는 물품을 구입할 돈을 충분히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들의 살림살이는 좋았었다. 그녀들은 고향에서 보내온 위문품을 받은 군인이 주는 각종 선물에 추가해서 그것을 보충할 의류, 신발, 권연, 화장품을 살 수가 있었다.
그녀들은 버마 체류 중 장병과 같이 스포츠 행사에 참가하면서 즐겁게 지내고 또 피크닉, 연예회, 만찬회에 출석했다. 그녀들은 축음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도시에서는 쇼핑하러 외출하는 것이 허용됐다.
요금제도;
위안부의 영업조건은 군에 의해서 규제되고 위안소의 이용도가 놏은 지역에서는 규칙은 엄격히 실시되었다. 이용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군은 요금 이용 우선순위 및 특정지역에서 작전을 실시하고있는 각 부대를 위한 이용시간 할당제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
업자에게 속았다고는 하지만 가족의 빚을 변제한다는 이유로 자발로서 응모하여 위안부가 되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위안이라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거기에 대하여 추긍할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고 보인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직업」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 한국에서 주장하는 「성노예」와는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는 일본에서「가족에게 팔렸다」라는 주장과 관계가 있어보인다. 그들의 가족은 위안부 응모에 적극적이였다고 추측된다.
한국에서 주장하는 「성노예로서 폭력을 휘두르고 야만적으로 대하였다」라는 부분과는 대조되게 그들은 일본군보다 중국병사나 인도병사에 대해서 두려워한다.
그들의 대부분은 일본으로부터 식료품이나 배급을 받지 못했지만 위안부 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충분히 생활하고 있었고 때로는 일본군이 고향으로부터 받는 위품을 받기도 하고 있는 것을 보아 한국의「업자가 돈을 빼앗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벌지 못했다」라는 주장과는 상반된다.
또 그들은 「장병과 같이 스포츠 행사에 참가하면서 즐겁게 지내고 또 피크닉, 연예회, 만찬회에 출석했다. 그녀들은 축음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도시에서는 쇼핑하러 외출하는 것이 허용됐다.」라는 기록을 보아 한국이 주장하는 「납치, 감금, 강간」과는 다르게 비교적 자유로워 보인다.
참고로 현재의 한국의 매춘실태는 「납치, 감금, 강간」이 성행하고 있다. 현재의 한국과는 사뭇 다른 형태로서 활동되어 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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