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独立運動のために徹底的に自分を偽装した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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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ヨンファン

http://data.ygosu.com/editor/attach/2/20120311/RlHEyWHdo4YmoFXSP3tMHy.jpg

1887-1946


 

朝鮮時代後期, 日帝強制占領期間の有名な 勝負師と同時に破落戸.[1] 慶北安東出身の著述家で <両班町内騷動期>, <私の両班文化踏査記> などの著者である尹学準教授は ¥"朝鮮 3台破落戸¥"で興宣大院君李ハウン, 1930年代衡平社運動の主役である金男囚とともにこの人を指折った.


 

慶尚北道安東一帯で認める名家だった擬声金さん終値の長孫で, 朝鮮時代の義兵長ハックボングキム・ソンイルの 13代孫でもあった.


 

当時安東一帯の賭博場には必ず立ち込めたと言って, 宵の口から賭博をしている途中明け方になれば掛け金をかけて最後のベッティングをする主特技があったと.


 

もしベッティングが的中してお金を取れば良くて, そうではなくてベッティングに失敗すれば夜明け棒はして大きい声で叫んだが, この音が出ればギャンブリングハウス周辺に張りこみしていた彼の荷受 20人余りが棒を持って現われて掛け金を袋に掃きためて悠悠と消えたと言う.(...)


 

家のおびただしい財産と田畑を賭博でだめにして(現在値で約 200億以上), 門中の子孫たちが十匙一飯でお金を集めてまた終値にドエサズゴンしたと言う. 家亡骸墨を宗孫が出たと舌打ちをしながら. 仕方ないことが終値は門中の求心点なので消えてはいけないからだった.


 

一人娘が詩集に行く時婚家で用箪を用意しなさいと準お金も賭博で蕩所, 結局一人娘は実家お母さんが使った古い用箪を持って泣きながら詩集に行ったと言う. それに婚家の加勢が傾くとその古い用箪が鬼に取り付かれた用箪だと言って川辺砂場に取り出している途中壊して燃やすまでしたと.


 

賭博は敗家亡身の近道やお辞儀どおりしてはいけないだろう事実を知らせてくれる人物.


 

しかし...




 

がすべてのものなどは偽装だった.


 

彼の真正な正体は満洲で活動した独立軍に独立資金を集めて伝達した独立闘士だったことだ.


 

金ヨンファンは先親が日製時代に倭軍前で強制でムルブクルリンゴル小さい頃に目撃して独立運動を助けることに心に決めるようになったと言う. お爺さんギムフングラックの影響を受けて 1908年イ・ガンニュン義兵部隊に参加したし, 1911年には金サンテ義兵部隊に参加するなど安東地域の義兵活動の中心だった. 3.1運動以後には満洲マングミョングギルに上がったが新義州で日本警察に逮捕して安東に帰って来たし, 1921年には満洲吉林の軍政書と繋がれて軍資金を調逹するための団体である義勇団の西紀に活躍した. ただ大多数の符号たちは親日だったから大きい效果はおさめ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 1922年日本警察にまた逮捕する.


 

1922年逮捕した時もう彼は軍資金調逹疑いで三番目逮捕した後だった. そうだったから彼の以後人生は身の毛がよだつほどの徹底的な自分偽装で一貫こんにちはだった. その莫大な財産を賭博で蕩盡したことで偽装して皆満洲に行かせたのだ. 娘が婚家から用箪死と受けたお金も独立運動資金で満洲に行かせた. こんなに送った財産が現在現価で約 100億ウォンに推定される.


 

臨終頃にこの事実が分かっていた独立軍同志が枕元でこれからは満洲にお金送った事実を話しても良くないか?と言うと士として当然すべきことをしただけなのに話す必要ないと言いながら死んだと言う.


 

莫大な財産を捨てて, 名門家長孫という名誉も捨てて, 周辺人たちには破落戸だと軽蔑受けて, 甚だしくは一つだけである一人娘に恨みと憎さを受けながらも, 死ぬ瞬間まで祖国の独立のために献身した人物だ. 本当ノーブルリースオブルリゼにふさわしい方とする.


 

金ヨンファン先生の一人娘金の後翁女史は 1995年お父さん金ヨンファンの功労で建国勳章を踊って受ける. 勲章を受けるその日お父さんに対する尊敬と悔恨を ¥"私たちアベ参奉旦那さま¥"という文で発表する.


 

どうにかこうにかして年次序シブユックセにお嫁になったら

青松マピョングソさん門に婚姻はしたが

新行決まっても行くことができないいたわしい事情

新行の時農買って来なさい婚家で預けたお金

そのお金さえ持って行ってどこで使ったのか?

私たちアベ待って新行日延ばしてから

大きいオメ使った古い農新行足に積んで行ったら周りでこそこそと

それから嫁入り暮らしいじけてそわそわ

終わらせる鬼付いて来たと言って川辺砂場に取り出している途中壊して燃やしたら

桐三段のたんすが炎はどうしてあまりも高かったか

嫁御傲慢醤油その光景オトハルで

がすべてのもの私たちアベ恨んで

変な詩集住もうとして傲慢醤油とかしたら

今日には分かってみればこのすべてのものあのすべてのもの

独立軍資金ためにその多かった泉石財産すべて捧げても足りなくて

一つだけである一人娘婚家で送ったノングガブ, それさえ捧げたな

やぱりそうだ私たちアベ参奉旦那さま

私の思ったとおり, 絶対他人達が言う破落戸ではないのに


 

余談だが, 彼の職人であるこの中業は 1914年安東と烽火市場に檄文を回して, 1919年ベルサイユ会談に送る請願書に入れる江原道, 慶尚北道地域の維持たちの署名を受けて中国に行った途中死亡した. 彼の妻の母であるギムラックはイェアン面万歳運動に参加してから日本警察につかまって 56歳の年に拷問にあって実名した. 妻男を含めた彼の妻家も独立運動に邁進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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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을 위해 철저히 자신을 위장한 사람

김용환

http://data.ygosu.com/editor/attach/2/20120311/RlHEyWHdo4YmoFXSP3tMHy.jpg

1887-1946


 

조선시대 후기, 일제강점기의 유명한 도박꾼이자 파락호.[1] 경북 안동 출신의 저술가로 <양반동네 소동기>, <나의 양반문화 답사기> 등의 저자인 윤학준 교수는 "조선 3대 파락호"로 흥선대원군 이하응, 1930년대 형평사 운동의 주역인 김남수와 함께 이 사람을 꼽았다.


 

경상북도 안동 일대에서 알아주는 명가였던 의성 김씨 종가의 장손으로, 조선시대의 의병장 학봉 김성일의 13대손이기도 했다.


 

당시 안동 일대의 노름판에는 꼭 끼었다고 하며,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걸고 마지막 베팅을 하는 주특기가 있었다고.


 

만약 베팅이 적중하여 돈을 따면 좋고, 그렇지 않고 베팅에 실패하면 "새벽 몽둥이야" 하고 큰소리로 외쳤는데, 이 소리가 나오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그의 수하 20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자루에 쓸어담아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


 

집안의 엄청난 재산과 전답을 도박으로 말아먹고(현재가로 약 200억 이상), 문중의 자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걷어 다시 종가에 되사주곤 했다고 한다. "집안 망해먹을 종손이 나왔다"고 혀를 차면서. 어쩔 수 없는 것이 종가는 문중의 구심점이므로 없어지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외동딸이 시집을 갈때 시댁에서 장롱을 마련하라고 준 돈 역시 도박으로 탕진, 결국 외동딸은 친정 어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들고 울면서 시집을 갔다고 한다. 게다가 시댁의 가세가 기울자 그 헌 장롱이 귀신들린 장롱이라고 해서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기까지 했다고.


 

도박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며 절대로 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인물.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위장이였다.


 

그의 진정한 정체는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군에게 독립자금을 모아서 전달하던 독립투사였던 것이다.


 

김용환은 선친이 일제시절에 왜군앞에서 강제로 무릎꿇린걸 어린시절에 목격하고 독립운동을 돕기로 마음먹게 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김흥락의 영향을 받아 1908년 이강년 의병 부대에 참가하였으며, 1911년에는 김상태 의병 부대에 참가하는 등 안동 지역의 의병 활동의 중심이었다. 3.1운동 이후에는 만주 망명길에 올랐으나 신의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안동으로 돌아왔으며, 1921년에는 만주 길림의 군정서와 연결되어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단체인 의용단의 서기로 활약하였다. 다만 대다수의 부호들은 친일이었기 때문에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고, 1922년 일본 경찰에 다시 체포된다.


 

1922년 체포되었을 때 이미 그는 군자금 조달 혐의로 세번째 체포된 후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이후 인생은 소름끼칠 정도의 철저한 자기위장으로 일관하였다. 그 막대한 재산을 도박으로 탕진한 것으로 위장해서 모두 만주로 보냈던 것이다. 딸이 시댁에서 장롱 사라고 받은 돈 역시 독립운동 자금으로 만주로 보냈다. 이렇게 보낸 재산이 현재 시가로 약 100억원으로 추정된다.


 

임종 무렵에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독립군 동지가 머리맡에서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 해도 되지않겠나?"고 하자 "선비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 할 필요없다"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한다.


 

막대한 재산을 버리고, 명문가 장손이라는 명예도 버리고, 주변사람들에게는 파락호라고 경멸받고, 심지어 하나뿐인 외동딸에게 원망과 미움을 받으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진정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걸맞는 분이라 하겠다.


 

김용환 선생의 외동딸 김후옹 여사는 1995년 아버지 김용환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는다. 훈장을 받는 그 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글로 발표한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 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서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 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데


 

여담이지만, 그의 장인인 이중업은 1914년 안동과 봉화 장터에 격문을 돌리고, 1919년 베르사유 회담에 보낼 청원서에 넣을 강원도, 경상북도 지역의 유지들의 서명을 받고 중국으로 가던 도중 사망했다. 그의 장모인 김락은 예안면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56세의 나이에 고문을 당하다 실명했다. 처남을 비롯한 그의 처가 역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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