メインへ

KJCLUB 日韓文化交流へようこそ。

韓国語と日本語

閲覧数 : 599
JA 255 dkfdkug 2,811,753

http://n.breaknews.com/sub_read.html?uid=200254&section=sc1

日本の多くの諸本の中には “ウがなの(第1期野馬も王朝)”佳約 73台(2100年)を日本の奈良(奈良)から統治したが, 長年の統治に気が抜けて遠くまで中央政府の力が及ぶことができない時に, キムスロ王(AD 199)の息子 7人が九州鹿児島県家事私奴ミサキ(鹿児島県 笠狭岬)に上陸してがラクニダに(韓国岳 : 伽揶の山)で “七熊(金 = 金 = 熊[音が同様])の村”を形成しながら住んで行って, 小さな王国を形成した.

AD 647年 12月新羅のキム・チュンチュ(当時 44歳)が日本を訪問した時の “日本書紀(AD720)” 記録には “顔がハンサムだったし楽しく談笑(談笑)する姿だった.”と書いている.

日本古代史学界元老だった “坂本茶炉(坂本太郎)”さんの家を尋ねた朴屏息先生は “日本書紀”に載せられているすべての童謡は韓国語で読むと私の意味が分かると言いながら, 彼らが今日まで “謎の童謡”と手もつ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歌が分かりやすい韓国語で易しく解いたように見えてまた説明をしたら, 彼は “ダイヘンナ煮こみ! = 大変な事になったな!”と言いながら大きいため息をついたと言う.

ところで童謡が国語になったことなら “古事記や日本書紀”の本文はどうなったことなのか? どうして歌は国語で本文は国語ではないことがあるか? という疑惑が生ずる.

当然国語ではなければならない. そうだからその本に柱石を月は日本学者たちもあちこちで “これは韓国語だ”という説明を付けている.

日本学者たちもその年だ語彙が国語であることが分かったからだと思う.

今私たちの読む和書は音引換された国語で被せられたことなのを悟らなければならない.

“デンチチォンファング” 10年(AD 663年)に百済(韓半島所在)から亡命して来た 60人余りに次官(次官)から中央官庁(中央官庁)の課長級職責をいっぺんに与えたと記録されている.

もしお互いに言葉が通じなかったら官庁の要職に 60人が越える唖を座らしたということのようなですね, 果してそんなことができたのか?

あの時に “デンチチォンファング”の百済人(百済人) 優待あいさつを責める次のような童謡が流行された.
 
原文 : 多致

翻訳を見る

한국어와 일본어

http://n.breaknews.com/sub_read.html?uid=200254&section=sc1

일본의 여러 책들 속에는 “우가야(제1기 야마도 왕조)”가 약 73대(2100년)를 일본의 나라(奈良)에서 통치하였는데, 오랜 통치에 기운이 빠져 멀리까지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때에, 김수로왕(AD 199)의 아들 7명이 규슈 가고시마현 가사사노 미사끼(鹿兒島縣 笠狹岬)에 상륙하여 가라꾸니다께(韓國岳 : 가야의 산)에서 “일곱 곰(김 = 금 = 곰[소리가 같음])의 마을”을 형성하며 살다가, 작은 왕국을 형성하였다.

AD 647년 12월 신라의 김춘추(당시 44세)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일본서기(AD720)” 기록에는 “얼굴이 잘생겼고 즐겁게 담소(談笑)하는 모습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일본 고대사 학계원로였던 “사까모도 다로(坂本太郞)”씨의 집을 찾아간 박병식 선생은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 모든 동요는 한국말로 읽어야 제 뜻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그들이 오늘까지 “수수께끼의 동요”라고 손도 대지 못하고 있던 노래를 알기 쉬운 한국말로 쉽게 풀어 보이고 또 설명을 하니, 그는 “다이헨나 고도다! = 큰일 났군!”이라고 하며 큰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그런데 동요가 우리말로 된 것이라면 “고사기나 일본서기”의 본문은 어떻게 된 것이냐? 왜 노래는 우리말이고 본문은 우리말이 아닐 수 있는가? 라는 의혹이 생긴다.

당연히 우리말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책에 주석을 달은 일본 학자들도 곳곳에서 “이것은 한국말이다”라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일본 학자들도 그 해당 어휘가 우리말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읽는 일본서적은 소리바꿈된 우리말로 씌어진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덴찌천황” 10년(AD 663년)에 백제(한반도 소재)에서 망명하여온 60여명에게 차관(次官)부터 중앙관청(中央官廳)의 과장급 직책을 한꺼번에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일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관청의 요직에 60명이 넘는 벙어리를 앉혔다는 것과 같은 말인데, 과연 그럴 수가 있었겠는가?

그때에 “덴찌천황”의 백제인(百濟人) 우대 인사를 비난하는 다음과 같은 동요가 유행되었었다.
 
원문 : 多致墦那墦  於能我曳多曳多  那例例騰母  陀麻爾農矩騰岐  於野兒  弘儞農俱

[ 일본식 읽기 ]
  다찌바나하  오노가에다에다  나레레도모  다마니누꾸도끼  오나지  오니누구

[ 일본식 해석 ]
  귤(橘)은 열릴 때는 제각각 다른 가지에 열리지만 옥(玉) 같이 실을 꿸 때는 한 줄에 꿰맨다.

일본 학자들의 이러한 해석을 납득할 사람은 일본 어디에도 없다.
 
우리 고어로 읽으면,
  다지파나바  오능아예다예다  나예예도모  다마니농구도기  오야아  홍니농구
우리 고어로 해석하면,
“관직을 모두 다 쥐어 파는 모양이구나, 오는 아이들에게 옛다 옛다 하고 마구 관직을 주니, 나요? 예, 예, 또 뭐 없는가요? 하고 받고 있는 너희들은 다만 구더기와 같은 놈들이다. 응석하는 아이처럼, 오냐 오냐 아항 하는구나.” 라는 내용으로 경상도 사투리가 넘쳐흐른다. 이와 같이 이 시기의 야마도(일본<日本>) 사람들은 동요도 우리말로 부를 만큼 일상용어로 우리말을 쓰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박병식 선생은 1984년 8월 초순경 우연히 읽게 된 “가까운 나라일수록 일그러져 보인다”라는 책에서, “수수께끼의 동요”라고 일컬어지는 노래가 “일본서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책의 저자인 하야시 다께히꼬(林建彦)씨는 “산께이신문(産經新聞)”서울 특파원을 지내고 서울에 있는 동안 한글을 배워서 우리말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당시 도까이(東海)대학 교수였었다고 말해 주었다.

두 사람의 만남이 오늘날 “수수께끼의 동요”를 박병식 선생이 일본말과 우리말 고어실력으로 간단하게 풀 수 있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사이메이천황” 6년의 “수수께끼의 동요”는 아래와 같다.

摩比邏矩都能   俱例豆例於能弊陀  乎邏賦俱能理歌理鵝  美和陀騰能理歌  美烏能陛陀  烏邏賦俱能理歌理鵝  甲子騰和與騰  美烏能陛陀  烏邏賦俱能理歌理鵝
 
일본학자들은 이글을 한 줄로 붙여서 읽으면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박병식 선생은 생각하기를 당시 우리말이 일본 음으로(日本音) 소리바꿈 되어가는 시기임을 알고 있었다.

“ㅍ”은 “ㅎ”으로 발음[예 : 弊/陛 = 폐 → 헤]되고, “능(能)”은 “는” 또는 일본식 발음으로 “노”라고 읽었다는 것과, 또 “어 → 오”로 [모음교체]되어 읽었으며, “등(騰)” “타(陀)” “미(美)” “아(鵝)” “호(乎)” 등도 일본식 발음인 “도” “다” “비” “가” “오”로 읽었었다. 일본 학자들이 뭐라고 읽을 방법이 없어 한문자 그대로 남겨둔 “갑자(甲子)” 는 “갑자”에서 받침을 떼고 읽어보니 순수 우리말 고어가 나타남을 발견하게 되었다.
 
일본식으로 읽으니 “마히라꾸즈노 구레쯔레오노헤다 오라후꾸노리가리가 미와다도노리가 미오노헤다 오라후꾸노리가리가 갑자(甲子)도와요도 미오노헤다 오라후구노리가리가”
우리고어로 풀어보니 답이 나왔다. 우리고어로 읽으면,

마비라구도는  구례두례오는헤다  오라부구노리가리가  비와다도노리가
비오는헤다  오라부구노리가리가  가자도와요도  비오는헤다  오라부구노리가리가
 
우리말 해석은,
<오-라 북노리 가리까   가는 길도 오는 길도    비오는 해다.   오-라 북노리 가리가>
여기서 “구례들”은 “구례(求禮)들”로서 섬진강으로 바다와 연결된 곳이었으므로, 야마터(邪馬臺國)로부터 백제로 건너가는 교통요지였을 것이다. “북노리 가리까”는 “전쟁하러 가리까”라는 말임으로, 나라가 망하여 거지 신세가 된 백제 사람들이 “야마터”로 오는 해다. 그런데 싸움하러 간다니 피비(血雨)가 올 것이다. 그러니 “가지 말라고 하는데도 싸우러 간다니 피비가 오고야 말겠구나”하는 내용이었으니, 백제의 왕성이 함락되고 왕과 그 가족이 당나라로 끌려간 것은 서기 660년인데, 2만7천여 병력을 거느리고 한반도로 떠나야할 야마터의 군사들은 “사이메이천황”의 명령이 내리지 않아 지금의 후꾸오까(福岡) 부근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반전(反戰) 무드를 선동하는 동요와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출진명령을 내려야할 여제(女帝)는 신수(神樹)를 베어 새 궁전을 짓고 태평세월(泰平歲月)을 읊으며 지냈으니, 그녀의 진심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그녀는 전 남편과 더불어 “석씨왕조(昔氏王朝)”를 세우려는 원대한 계획을 안고 전 남편과 이별한 후 “정치적”으로 “죠메이천황”에게 시집왔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백제를 도우려고 군대를 반도에 파견할 까닭이 있겠는가?

그녀가 시마네현 이즈모에 살 때 이름은 “다까라황녀”였고, 두 번째 남편이며 황제인 “죠메이 천황”이 죽고 남편의 뒤를 이어 천황이 되니 “고교꾸 천황”이었다. 아들이 어리다는 핑계로 동생인 “고도꾸 천황”을 내세우다가, 다시 사이메이 천황이란 이름으로 재집권하니 아들인 “덴찌천황”에게는 죽고 난 뒤 “천황”을 물려주게 되었는데, “덴찌천황”도 무서워서 7년간 천황궁에 들어가지 않고 외부에서 살았다.

그녀가 병으로 죽은 것은 서기 661년 7월이었다. 그녀가 죽은 후 “덴찌천황(천황이 되기 전 이름 : 나까노오-에)”에 의해 파견된 야마터(邪馬臺國) 장병 2만7000명(군선 170척)은 수수께끼의 동요가 예언한대로 서기 663년 9월까지의 한반도 구례 전투에서 피비(血雨)를 쏟으며 전멸당하니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다.

이 전쟁에서 겨우 남은 몇 척의 배에 실려 온 백제사람들 가운데는 “만옆집(萬葉集 : 여러 잎 모음)”에 수많은 노래를 남긴 “야마노 우에노 오꾸라(山上憶良)”의 아버지 “오꾸라이후꾸루(憶禮福留)”도 있었는데, 그는 후에 “야마터”조정에서 병법(兵法)을 가르치는 관직에 올랐다.
그 뒤 시마네현 이즈모 출신 “덴무천황”(사이메이천황의 전 남편인 석氏의 씨가 다른 왕자)이 “김수로왕의 후손들인 <김씨 왕조>” 사이에 석씨가 왕이 된 것은 서기 668년 고구려가 망하고 난 후 4년 뒤의 일이었다.

지금 일본은 “덴무천황” 이후 약 8대가 석씨이기 때문에 석씨는 천황가 제사에는 제외되어 제사도 지내지 않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일본(야마도)은 아라가야를 친 형님처럼 모시고 우가야를 아버지처럼 모셔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이 자랑하는 “만엽집”에 실려 있는 모든 노래는 결국 우리고어로 적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의 일본말이나 한자(漢字)로는 제대로 번역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위의 모든 자료는 “박병식 선생의 어원으로 밝히는 우리 상고사(용인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발행)”에서 참고하였다.

いいね・コメントにはログインが必要です。

コメント ( 7 )

投稿一覧

2,811,753

  1. KO 255 propertyOfJapan
  2. KO 20 Jumong8
  3. KO 255 morort
  4. KO 255 morort
  5. KO 255 morort
  6. JA 255 竹島先住民
  7. KO 255 propertyOfJapan
  8. KO 255 morort
  9. JA 255 竹島先住民
  10. KO 255 amateras16
  11. 閲覧数 : 79
    KO 255 avenger
  12. KO 255 jap6cmwarotaZ
  13. 閲覧数 : 109
    JA 255 milet
  14. KO 255 cris1717
  15. KO 255 amateras16
  16. 5 閲覧数 : 109
    JA 255 dom1domko
  17. 閲覧数 : 89
    JA 255 sonhee123
  18. JA 255 bluebluebluu
  19. KO 255 avenger
  20. KO 255 jap6cmwarota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