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辰の乱当時日本軍の被害規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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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戦死朝鮮役』に現われた歴史の真実
壬辰の乱勃発初期に日本軍は破竹の勢いで朝鮮の核心地域を占領下だった. 1592年 4月 13日日本軍 1群が釜山零度に上陸した以後, 4月 14日釜山性, 4月 15日東莱性が陷落されたことを始まりに 5月 3日漢陽性, 6月 15日平壌城が陷落された. この期間の間大部分朝鮮の聖恩戦闘らしい戦闘も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まま陷落された. 官軍が動員された常住戦闘, 忠州弾琴台戦闘, 臨津江戦闘, 容認戦闘で朝鮮軍は一方的に敗れた.
しかし私たちが全然分からなくているだけに関心の外だった壬辰の乱過程で参戦日本軍の死亡者数を計算して見れば全然違った事実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る. 1924年日本軍部が発刊した 『日本戦死朝鮮役』の記録によれば, 国史に記述されたよりもっと多い日本軍が壬辰の乱に真実電荷だった. なおかつ私たちがその間見逃したおびただしく多くの日本軍が戦闘の中に死亡した事実が記録されている. それも明軍隊が参戦する以前である 1593年 1月以前に言葉だ.
壬辰の乱過程で参戦した日本軍の死亡者数に対して私たちは全然分からなくているだけに関心を持たなかった. 『日本戦死朝鮮役』の記録によれば, 国史に記述されたよりもっと多い日本軍が壬辰の乱に真実電荷だった. なおかつ私たちは私たちの被害のみを憶えるために考えが及ぶことができなかったが, 明軍隊が参戦する前にもおびただしく多くの日本軍が戦闘の中に死亡したという事実が立証される.
1592年 4月壬辰の乱開戦超から参戦した日本軍は 1ボンデで 9ボンデまで 15万 8,700人で, 九州の名古屋性(名古屋城)に予備軍で用意した兵力は 10ボンデで 16ボンデまで 11万 8,300人で総 28万人が超える.2) 日本側記録には 1592年 4月 1次で 1‾9ボンデが朝鮮に上陸したことになっていて, その外の部隊が朝鮮に上陸したのかに対しては明示上に明らかにしていない. しかし日本側記録を詳らかによく見れば, 名古屋に駐屯していた日本軍長寿が朝鮮の主要都市を占領したという記録がある. 同時に 1593年 6月朝鮮に駐屯した日本軍の点呼記録に名古屋の予備台に属した大部分の長寿名前と導いた部隊の軍事数が記録されている.3) 壬辰の乱初期戦闘から日本軍の兵力損失が甚だしくて名古屋に待機した予備兵力が追加配置されたという証拠だ. これは壬辰の乱開戦超から朝鮮軍の抵抗が激しかったという事実を傍証するのではないか.
日本戦死に参戦記録が確かな日本軍数字のみを計算する場合, 壬辰の乱初期から参戦した日本軍は 22万 4,774人で, 2次晋州城戦闘開始の前(1593年 6月) 豊臣秀吉(豊臣秀吉)の晋州城攻撃命令書に記録された 9万 3千人と予備兵力を含んだすべて兵力数は 12万名余だ. これを計算すれば 1592年 4月から 1593年 6月 2次晋州城戦闘以前まで日本軍戦死及び失踪者は 10万人以上にある. 2次晋州城戦闘で死亡したことに推定される 3万 8,000人を合算すると 13万 8,086人が壬辰の乱間死亡・行方不明になったし, 暮して日本に帰った日本軍数は 8万 6,688人に過ぎない. なおかつ名古屋に駐屯したことになっている予備兵力皆が参戦したことで上程する場合参戦日本軍数は 28万 6,840人で損失者数は 20万 152人で日本軍は 1年 3ヶ月の間参戦者の 69.73%が朝鮮で死亡または失踪されたことで見られる.
より具体的に, 日本軍がずっと勝利したことに記録された壬辰の乱初期 1年間, 日本軍の漢陽性占領以後朝鮮 8度を分割占領する過程で発生した各軍医地域別死亡者数値をよく見れば, 朝鮮軍と民が日本軍に対していくら猛烈に抵抗したのか分かる. 開戦初期豊臣秀吉は作戦命令書を下逹して 1ボンデで 9ボンデまでの部隊にとって朝鮮 8度を分割占領するようにした. 日本軍の先鋒で一番多い戦闘記録を残したし, 平壌まで占領した事があった小西ユキナが(小西行長)の 1ボンデは 1592年 3月朝鮮出兵当時 18,700人規模だったが, 9ヶ月の後の 1593年 3月には 6,626人万が生存して損失率が 64.56%に達する. また戦闘記録が多くない黄海道に駐屯した日本軍 3番(回)(代表長寿: 黒田長正[黒田長政])は同じ期間の間損失率が 53.80%, 江原道にあった日本軍 4番(回)(代表長寿: 森Yoshinari[毛利吉成])の損失率は 56.35%, 忠清道に駐屯した 5番(回)(代表長寿: HukushimaMasanori[福島正則])の損失率は 45.27%にのぼる. またこれらの部隊に持続的に兵力が補充されたという事実を勘案すれば損失率はこれよりずっと高いことに推定される. 一言で日本軍は無謀な戦争を起こしたこと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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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피해규모
『일본전사 조선역』에 드러난 역사의 진실
임진왜란 발발 초기에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조선의 핵심 지역을 점령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 1군이 부산 영도에 상륙한 이후, 4월 14일 부산성, 4월 15일 동래성이 함락된 것을 시작으로 5월 3일 한양성, 6월 15일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이 기간 동안 대부분 조선의 성은 전투다운 전투도 벌이지 못한 채 함락되었다. 관군이 동원된 상주전투, 충주 탄금대전투, 임진강전투, 용인전투에서 조선군은 일방적으로 패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을 뿐더러 관심 밖이었던 임진왜란 과정에서 참전 일본군의 사망자 수를 계산해보면 전혀 다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924년 일본군부가 발간한 『일본전사 조선역』의 기록에 따르면, 우리 역사에 기술된 것보다 훨씬 많은 일본군이 임진왜란에 참전하였다. 더욱이 우리가 그 동안 간과했던 엄청나게 많은 일본군이 전투 중에 사망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도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기 이전인 1593년 1월 이전에 말이다.
임진왜란 과정에서 참전한 일본군의 사망자 수에 대해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을 뿐더러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일본전사 조선역』의 기록에 따르면, 우리 역사에 기술된 것보다 훨씬 많은 일본군이 임진왜란에 참전하였다. 더욱이 우리는 우리의 피해만을 기억하느라 생각이 미치지 못했지만,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기 전에도 엄청나게 많은 일본군이 전투 중에 사망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1592년 4월 임진왜란 개전 초부터 참전한 일본군은 1번대에서 9번대까지 15만 8,700명이고, 규슈의 나고야성(名古屋城)에 예비군으로 준비된 병력은 10번대에서 16번대까지 11만 8,300명으로 총 28만 명이 넘는다.2) 일본 측 기록에는 1592년 4월 1차로 1~9번대가 조선에 상륙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밖의 부대가 조선에 상륙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일본 측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나고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장수가 조선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동시에 1593년 6월 조선에 주둔하던 일본군의 점호 기록에 나고야의 예비대에 속한 대부분의 장수 이름과 이끌던 부대의 군사 수가 기록되어 있다.3) 임진왜란 초기 전투에서부터 일본군의 병력 손실이 막심해서 나고야에 대기하던 예비 병력이 추가 배치됐다는 증거이다. 이는 임진왜란 개전 초부터 조선군의 저항이 격렬하였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일본전사에 참전 기록이 확실한 일본군 숫자만을 계산할 경우, 임진왜란 초기부터 참전한 일본군은 22만 4,774명이고, 2차 진주성전투 개시 전(1593년 6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진주성 공격 명령서에 기록된 9만 3천 명과 예비 병력을 포함한 총 병력 수는 12만여 명이다. 이것을 계산하면 1592년 4월부터 1593년 6월 2차 진주성전투 이전까지 일본군 전사 및 실종자는 10만 명 이상이 된다. 2차 진주성전투에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3만 8,000명을 합산하면 13만 8,086명이 임진왜란 동안 사망·행방불명이 되었고, 살아서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군 수는 8만 6,688명에 불과하다. 더욱이 나고야에 주둔한 것으로 되어 있는 예비 병력 모두가 참전한 것으로 상정할 경우 참전 일본군 수는 28만 6,840명이고 손실자 수는 20만 152명으로 일본군은 1년 3개월 동안 참전자의 69.73%가 조선에서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일본군이 계속 승리한 것으로 기록된 임진왜란 초기 1년 동안, 일본군의 한양성 점령 이후 조선 8도를 분할 점령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각 군의 지역별 사망자 수치를 살펴보면, 조선군과 백성이 일본군에 대해 얼마나 맹렬히 저항하였는지 알 수 있다. 개전 초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작전명령서를 하달하여 1번대에서 9번대까지의 부대로 하여금 조선 8도를 분할 점령하도록 하였다. 일본군의 선봉에서 가장 많은 전투기록을 남겼고, 평양까지 점령한 바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번대는 1592년 3월 조선출병 당시 18,700명 규모였으나, 9개월후인 1593년 3월에는 6,626명만이 생존하여 손실률이 64.56%에 달한다. 또한 전투기록이 많지 않은 황해도에 주둔했던 일본군 3번대(대표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같은 기간 동안 손실률이 53.80%, 강원도에 있던 일본군 4번대(대표장수: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의 손실률은 56.35%, 충청도에 주둔했던 5번대(대표장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의 손실률은 45.27%에 이른다. 또한 이들의 부대에 지속적으로 병력이 보충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손실률은 이보다 훨씬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마디로 일본군은 무모한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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