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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曜日に読む戦争社]日清戦争当時朝鮮軍はどうしてお互いに銃口を狙わ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だろう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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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君は日本軍と, 地方君は青軍と連合してお互いに交戦
定見なくて戦略ないリーダーの "コウモリ外交"が作った惨劇




開港以後高宗の中央親衛どおり養成された別技軍姿. 壬午軍乱以後また既存 5軍営体制で帰ってから甲午改革以後再び作られるのを繰り返した.(写真=ウリヨックサネッ)



[アジア経済イ・ヒョンウ記者]普通韓国の植民地化に段初になったと言う戦争で評価を受ける日清戦争. この戦争と係わって国史教科書を見ていれば一つ疑問を持つようになる. 日清戦争直前まで東学君を討伐したという朝鮮の "官軍"は一体何をしたのか可否だ. 外国君が進駐して自分の地で戦争をしたら確かにこれを阻んでも, 誰かと連合して争っても交戦内容が出ると正常だが朝鮮軍の動きに対してはグックサチェックでダングツェ出ない.

それならその時朝鮮軍は一体何をしていただろうか? この質問に対する答は一つではない. 中央で派遣されたザングウィヤング(壮衛営) 軍隊は日本軍と連合して青軍と戦ったし, 当時平壌観察使が導いた平壌の地方駐屯軍である衛戍兵(偉戌兵)たちは青軍と連合して日本軍と戦った. 全羅道地域の地方君たちは東学君と連合して日本軍を打つと北上したし人々を攻撃したことは日本軍と連合した朝鮮官軍だった. このように日清戦争で朝鮮軍は朝鮮軍どうし銃口を狙って戦闘をした.

こんな情けないチァックイオブヌン行動が出た理由は当時国王高宗と彼の政治的パートナーだった明成皇后, そして集権閔さん戚族が最悪の外交を見せてくれたからだった. 普通日清戦争と言えば単純に日製の野慾が発端になったように知られているが, 実際発端になったことは国王高宗の誤った "派兵要請"だった.

日清戦争当時歩哨を立っている朝鮮軍と青軍虜姿. 写真裏側に朝鮮人たちと日本軍姿も見える. 青軍虜の中には朝鮮地方君たちもまじていた.(写真=ウィキピデ−ア)




1894年 2月, 東学百姓軍が一揆して北上し始めたし, 調整で派遣した討伐君も敗退し始めると緊急では高宗は清に派兵を要請しようとした. しかし大臣たちが皆反対した. 1885年, 清と日本が締結したティエンジンゾヤックに基づいて清に派兵を要請する場合日本も派兵するはずでそのようになれば朝鮮が両国の戦地になることが自明だったからだ.

しかし朝鮮王室である前週李さん家門の跋扈誌である前週が東学君に陷落された以後高宗は清に派兵することを粘り強く主張したし, 結局王命によって清に派兵が要請された. 青軍はティエンジンゾヤックによって日本政府に派兵を知らせたし, 日本は待ったというように済物浦に兵力を上陸させて景福宮を不時に襲って占領, 高宗の身近を確保した後朝鮮に内政改革案 5個グループとともに親日内閣を立ててしまった.

景福宮陷落過程もものすごかった. 元々日本軍は当時朝鮮軍の武将状態によほど緊張した状況だったし景福宮襲撃日動員された兵力も 1000人余りに経たなかった. また都城の外に兵士らが日本軍の大闕侵犯消息に入城して交戦を広げたし当時新武器だった機関銃など各種重火器で武装した朝鮮軍はよほど宣伝した. しかし日本軍が高宗の身近を確保すると高宗は朝鮮軍に武器を捨てなさいと人を下げたし, これによって朝鮮軍は交戦を止めて日本軍に降伏した.

日清戦争当時日本軍姿. 機関銃もなかったし貧弱な村田小銃で武装した状態だったし食糧と弾薬普及も落ちた状態だったが綱紀面で先に進んでいて主に盗賊の群れで構成された青軍を退ける.(写真=ウィキピデ−ア)



こんなに自ら火を呼び入れた高宗と閔姓の政権の以後行動はもっと不様な様子だった. 中央君は日本軍とともに連合して青軍と戦うように人を下げて地方君にはまた密命を下げて青軍と連合して漢陽で進撃, 宮廷で日本軍を追いなさいという命令を下す. 結局朝鮮軍は団合して外勢を退けることができずに最高リーダーの愚かな決定によって外勢に徹底的に利用されてしまったのだ.

清軍隊も日本軍より武将力がずっと優秀だったし普及もがっちりしている方だったが軍隊綱紀が台無しだったし, 兵士ら大部分が盗賊出身だから正規前に慣れ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結局平壌に駐屯した青軍 1万3000人余りと朝鮮軍は似ている数字の日本軍に会って一日ぶりに大敗する. 当時日本軍は弾薬不足と食糧不足に苦しんでもし朝鮮と清連合軍が一日だけもっと平壌城を射手したら分かって自滅する危機に処していたが結局軍隊綱紀の差が勝敗を割った.

露日戦争の前当時ロシアで韓半島状況を皮肉ったはがき姿(写真=ウィキピデ−ア)



このような日清戦争の経過にも高宗と朝鮮調整は真面な内政改革と国力養成よりはもう一つのコウモリ外交を通じて以夷制夷のみを狙う. 高宗と明成皇后は三国干渉で日本がラオトン半島を清に返還することを見てロシアに接近, 親ロ政策を広げたしこの過程で明成皇后は乙未事変に除去される. ここに高宗はまた俄館播遷を通じてロシア公使館で逃走したしロシアの力を借りて親日内閣をこなごなに壊してこの過程で幾多の開化派知識人たちを首切りする.

結局植民地化で行く亡国の町角で, 日製の野慾劣らず国王である高宗と閔さん戚族たちの政治, 外交的行動は大きく一役したわけだ. 韓半島を取り囲んだ危機感が高まっている状況で当時高宗と閔さん戚族が見せてくれた最悪の政治, 外交的歩みは今日にも多くの時事点を与え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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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요일에 읽는 전쟁사]청일전쟁 당시 조선군은 왜 서로 총구를 겨눠야했을까?

중앙군은 일본군과, 지방군은 청군과 연합해서 서로 교전
줏대없고 전략없는 지도자의 "박쥐외교"가 만든 참극




개항 이후 고종의 중앙 친위대로 양성됐던 별기군 모습. 임오군란 이후 다시 기존 5군영체제로 돌아갔다가 갑오개혁 이후 또다시 만들어지기를 반복했다.(사진=우리역사넷)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보통 한국의 식민지화에 단초가 됐다는 전쟁으로 평가받는 청일전쟁. 이 전쟁과 관련해 국사교과서를 보다보면 한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청일전쟁 직전까지 동학군을 토벌했다는 조선의 "관군"은 대체 뭘했는지 여부다. 외국군이 진주해 자기네 땅에서 전쟁을 벌였다면 분명 이를 막든, 누군가와 연합해서 싸우든 교전내용이 나와야 정상이지만 조선군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국사책에서 당최 나오질 않는다.

그렇다면 그때 조선군은 대체 뭘하고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한가지가 아니다. 중앙에서 파견된 장위영(壯衛營) 군대는 일본군과 연합해 청군과 싸웠고, 당시 평양감사가 이끌던 평양의 지방주둔군인 위수병(偉戌兵)들은 청군과 연합해 일본군과 싸웠다. 전라도 지역의 지방군들은 동학군과 연합해 일본군을 친다며 북상했고 이들을 공격한 것은 일본군과 연합한 조선 관군이었다. 이처럼 청일전쟁에서 조선군은 조선군끼리 총구를 겨누고 전투를 벌였다. 

이런 한심하기 짝이없는 행태가 나왔던 이유는 당시 국왕 고종과 그의 정치적 파트너였던 명성황후, 그리고 집권 민씨 척족이 최악의 외교를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보통 청일전쟁이라 하면 단순히 일제의 야욕이 발단이 된 것처럼 알려져있지만, 실제 발단이 된 것은 국왕 고종의 잘못된 "파병요청"이었다. 

청일전쟁 당시 보초를 서고 있는 조선군과 청군포로들 모습. 사진 뒤쪽에 조선인들과 일본군 모습도 보인다. 청군 포로 중에는 조선 지방군들도 섞여있었다.(사진=위키피디아)




1894년 2월, 동학 농민군이 봉기해 북상하기 시작했고, 조정에서 파견한 토벌군도 패퇴하기 시작하자 다급하진 고종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코자 했다. 그러나 대신들이 모두 반대했다. 1885년, 청나라와 일본이 체결한 톈진조약에 의거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할 경우 일본도 파병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조선이 양국의 전쟁터가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왕실인 전주 이씨 가문의 발호지인 전주가 동학군에 함락된 이후 고종은 청나라에 파병할 것을 줄기차게 주장했으며, 결국 왕명에 따라 청나라에 파병이 요청됐다. 청군은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 정부에 파병을 알렸고,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물포에 병력을 상륙시키고 경복궁을 불시에 습격해 점령, 고종의 신변을 확보한 뒤 조선에 내정개혁안 5개조와 함께 친일내각을 세워버렸다. 

경복궁 함락 과정도 기막혔다. 원래 일본군은 당시 조선군의 무장상태에 상당히 긴장한 상황이었고 경복궁 습격 날 동원된 병력도 100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도성 밖에 병사들이 일본군의 대궐 침범소식에 입성해 교전을 펼쳤으며 당시 신무기였던 기관총 등 각종 중화기로 무장한 조선군은 상당히 선전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고종의 신변을 확보하자 고종은 조선군에 무기를 버리라고 명을 내렸고, 이에따라 조선군은 교전을 멈추고 일본군에 항복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모습. 기관총도 없었고 빈약한 무라타 소총으로 무장한 상태였으며 식량과 탄약보급도 떨어진 상태였지만 기강면에서 앞서있어 주로 도적떼로 구성됐던 청군을 물리친다.(사진=위키피디아)



이렇게 스스로 화를 불러들인 고종과 민씨 정권의 이후 행태는 더욱 가관이었다. 중앙군은 일본군과 함께 연합해 청군과 싸우도록 명을 내리고 지방군에는 또한 밀명을 내려 청군과 연합해 한양으로 진격, 궁궐에서 일본군을 쫓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결국 조선군은 단합해서 외세를 물리치지 못하고 최고지도자의 어리석은 결정에 따라 외세에 철저히 이용되고 만 것이다. 

청나라 군대도 일본군보다 무장력이 훨씬 우수했고 보급도 탄탄한 편이었지만 군대 기강이 엉망이었고, 병사들 대부분이 도적출신이라 정규전에 익숙치 못했다. 결국 평양에 주둔하던 청군 1만3000여명과 조선군은 비슷한 숫자의 일본군을 만나 하루만에 대패한다. 당시 일본군은 탄약부족과 식량부족에 시달리며 만약 조선과 청나라 연합군이 하루만 더 평양성을 사수했다면 알아서 자멸할 위기에 처해있었지만 결국 군대 기강의 차이가 승패를 갈랐다. 

러일전쟁 전 당시 러시아에서 한반도 상황을 풍자한 엽서 모습(사진=위키피디아)



이러한 청일전쟁의 경과에도 고종과 조선조정은 착실한 내정개혁과 국력양성보다는 또다른 박쥐외교를 통해 이이제이만을 노린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는 것을 보고 러시아에 접근, 친러정책을 펼쳤으며 이 과정에서 명성황후는 을미사변으로 제거당한다. 이에 고종은 다시 아관파천을 통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주했으며 러시아의 힘을 빌려 친일내각을 박살내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개화파 지식인들을 숙청한다. 

결국 식민지화로 가는 망국의 길목에서, 일제의 야욕 못지 않게 국왕인 고종과 민씨 척족들의 정치, 외교적 행태는 크게 한몫했던 셈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당시 고종과 민씨 척족이 보여줬던 최악의 정치, 외교적 행보는 오늘날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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