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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の発展は韓国おかげさまで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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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強制占領期間所得不平深化
開発利益日本人に集中されて
組1先人たちは相変らず飢えたし
解放の後長い間貧乏苦しんで


日本植民地時期朝鮮少年たちが作った俵を売る市場の姿. 当時学校では貧しい学生たちに俵を組んで学費を補うようにする児童強制労役をさせた. 朝鮮総督府は米収奪のために俵組むのをぎっしりと計画, 管理した. 出処ソウル特別市社編纂委員会, <写真で見るソウル 2>” 日本植民地時期組1線少年たちが作った俵を売る市場の姿. 当時学校では貧しい学生たちに俵を組んで学費を補うようにする児童強制労役をさせた. 組1ソンチォングドックブは米収奪のために俵組むのをぎっしりと計画, 管理した. 出処ソウル特別市社編纂委員会, <写真で見るソウル 2>

それにもかかわらず植民地近代化論者たちは堂堂だ. たとえそれが ‘不便な真実’だが ‘客観的事実’であるからだというのだ. それで学者的良心でそのように言うしかないというのだ. ハンスン組教授は韓国の代表的な政治学者の一人だったし, <反日種族株の>の著者たちも高い学問的水準を持った学者たちだ. これらは自分たちの主張を裏付けるに値する遊んだのを枝で主張するの, センチメンタルで主張することではない.

植民地近代化論という用語は国史学界でドルスィウンフレームみたいなことだと言って, いざ植民地近代化論者本人たちはあまり有り難がらないようだ. それでこの用語を使うのが控え目だが, 本人たちが自分たちの学問思潮に対して他に何と規定しなくて便宜上その用語をそのまま書くようにする.

植民地近代化論というのはどんな一人の見解ではなく, 多様な研究者たちの集合されたつもりだ. 研究者たちの専攻も経済学だけではなく史学, 政治学, 社会学などとても多様で, 研究対象時期も組1線後期で現在に至るまで多様だ. それで共通分母を捜し出すことは易しくなくて, ややもすると一般化の間違いを犯すことはできるが, 時期別で植民地近代化論の核心的な主張を取りまとめて見れば次のようだ.

1 兆1線後期社会が生産力の崩壊といっしょに自滅するしかない危機に置かれていた.

2 日帝強制占領期間間日本から近代的な多くの制度が導入して先進的な資本が大挙投入されることで組1線が早い速度で開発されたし, その結果組1先人たちの生活水準も向上した.

3 このような植民地的開発の経験と遺産が解放後韓国経済の高度成長の歴史的背景になった.

鉄道・道路拡充に境地・生産性拡大

植民地近代化根拠提示するが

所得分配独占・不平等拡大再生産

日帝強制占領期間の資料たちをのぞき見ればその頃植民地組1線で刮目に値する開発が成り立ったことを易しく見抜くことができる. 近代的な日本の法が組1線に適用された. 市場制度が発展した. 鉄道・道路・通信・港湾などの社会基盤施設が拡充された. 先進的技術を持った日本の資本が大挙投入されて工場と鉱山が建設された. 河川が個数された. 農地改良と農業改良によって境地面積が拡がったし農業生産性も上がった. 都市計画と上下水道施設が普及された. こんな証拠たちはこの以外にもいちいち列挙するにも困る位にガレージあふれる.

不便な真実はここでできる. ‘こんな近代的な多くの変化が植民地組1線を開発させたはずで, その開発おかげさまで組1先人たちももうちょっとよく暮らすようにならなかっただろうか’という気がするのがおちだ. ‘日本人たちが開発の利益の多くの部分を持って行ったと言っても組1先人にもおこぼれがちょっと落ちたはずでそれで組1先人たちも少しはもっとよく暮らすようにならなかっただろうか’ する気がすることもできるというのだ.

ところで組1線が開発されたということからそれが組1先人にも利得になったはずだという論理展開の中には論理の飛躍という落とし穴がある. 組1線だという地域の開発と組1先人の開発を区別することができない飛躍だ. 日本人たちは猛烈な速度で組1線の土地を掌握して行ったし, 鉱工業資産は 90% 以上が日本人たち所有だった. 少数の日本人たちが土地や資本のような生産手段を集中的に所有したから, 所得分配が民族別で不平等になるしかなかった. このような不平等な所得分配構造は日本人たちにもっと多い生産手段を所有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するし, それが所得不平等を拡大させた. このような民族別不平等の拡大再生産過程が植民地時代組1線で起っていた開発の本来の姿だった.

不平等な開発は民族差別を拡大させた. 組1線の開発は日本の, 日本人たちによる, 日本人たちのための開発だったから元々この地の主人だった組1先人たちはそういう開発の局外者に過ぎなかった. 歳月が流れながらますますもっと民族別生産手段の不平等が拡がって経済的不平等が拡がるいわゆる ‘植民地的経済構造’に閉じこめられるようになった. したがって植民地体制が清算されない限り, 組1先人たちは植民地的経済構造から脱することができないし未来に対する希望も持つことができなくなった. 解放がまさにこの植民地的経済構造で脱皮することができる唯一の道だった. 正しくそんな点から民族独立運動が何より重要で大事だった. 筆者が以前に書いた本に <開発ない開発>という一見形容矛盾された題目を付けたわけもそこにあった.

筆者の言葉が反日種族注意のドグマを脱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極端的主張で聞こえるか? 筆者は長い間植民地近代化論が長期にするまさにその実証というのとして植民地近代化論を批判する論争を無数にして来た. 地面の制約のためここでその多い実証を具体的に扱うことはできない. 多くの実証的論争の中で一番重要ながらも簡単に説明することができる一つ指標を持って植民地近代化論の主張が事実ではないことを証明して見る事にする.

‘強点期組1先日たち背大きくなった’ と言う主張

去る 100余年食品需給表統計には

1918‾1945年栄養供給量減少傾向

所得増加したという命題成立だめで

植民地近代化論では ‘日帝強制占領期間間組1線で成り立った開発の結果, 組1先人の生の質も高くなった’と主張する. ‘日帝強制占領期間に組1先人たちの背が大きくなった’と言う主張もここで派生されたのだ. 植民地近代化論の一番核心的な主張の一つだ. <反日種族株の>の筆者の中一名人主翼種落星垈経済研究所研究委員の研究によれば日帝強制占領期間間組1先人たちの 1人当り国内総生産(GDP)が 60% 以上増加したし, 1人当り消費も大きく増加したと言う. 日帝強制占領期間間組1先人たちの生活水準が向上したという主張なのに, これは落星垈経済研究所で発行した <韓国の経済成長 1910‾1945>という研究結果を土台にする. 果してこんな主張が妥当だか?

ユックソヤング忠南大博士は 1910‾2013年の食品需給表を利用して組1線(韓国)の 1人 1日だ栄養供給量の変化を分析こんにちはだった. 韓国農村経済研究院は食品需給表を 1962年以来現在まで毎年露する. 六博士は食品需給表が存在しない 1910‾1962年に対する食品需給表を追加してその時系列を 1910年まで引き上げた. この食品需給表から 1人 1日だエネルギー, タンパク質, 脂肪質, 無機質(Ca, Fe), ビタミン(A, B1, B2, Niacin, C) などの栄養供給量が分かる. エネルギー, タンパク質, 脂肪質などの主要栄養供給量を中心にその分析結果を整理して見れば次のグラフのようだ.

グラフで見られるように 1918年までは栄養供給量が増加してから, その後 1945年までは減少傾向を見せて, 解放後反転して明らかな増加傾向を見せている. 1990年代中盤以後エネルギー供給量とタンパク質供給量がほとんど停滞していることは, この時期になればダイエットが主要関心事になるほどに栄養供給がもう飽和状態に到逹したことを意味する.

日帝強制占領期間の組1先人たちの所得は非常に低い状態だった. この期間に組1先人たちの所得が増加したと仮定して見よう. 低い所得のため食べ物をまともに食べ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時期, すなわちいつもお腹がすいていたそんな時期には所得が増加すれば当然何より先に食べ物を捜すはずで, 食べ物消費量が増えるでしょう. 栄養供給量が増加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話だ. ところでグラフを見れば日帝強制占領期間間栄養供給量は減少していたから組1先人たちの所得が増加したという命題は成り立つことができない.

一般的に人々のつける長くは二十歳まで大きくなっている途中その後には成長を止まる. 背と成長期の栄養供給量の間には強い良医係わり合いがあると言う. 成長期によく食べればそうでない場合に比べて平均背がもっと大きくなる. 日帝強制占領期間に栄養供給量が減少したということは平均背が大きくなったはずだと主張するすべての研究が事実ではない可能性が高さを強く示唆する.

留意しなければならない点は 1918年までの増加傾向だ. 筆者はこの増加が組1線が日本の植民地になった直後の初期統計が持つ問題点のためで現実ではないと主張して来た. 同時にこの期間の経済成長を取り囲んで植民地近代化論ともう幾多の論争をして来た. 結論的に言って 1910‾1918年の間にも栄養供給量は減少するとか停滞したと思うと正しいということが筆者の考えだ. 筆者の主張が信じる事ができなかったら, 争点になる期間を論外にするとか, それをそのまま受け入れて見ても結論は大きい差がない.

どんな一国の生活条件を物質的な消費だけで説明することはできない. 例えばブタンのような国は所得水準があまり高くないが幸せ指数は非常に高いと言う. しかし貧しくて食事さえ解決しにくい状況で幸せを話す事はあるか? そんな点で日帝強制占領期間に組1先人たちの生の質が好きになったとか, 生活水準が向上したというなどの主張は説得力がない.

広く知られたところのように解放後韓国は所得水準が非常に低い国の一つだった. 解放後長い間春の端境期という言葉が消えなかった位に常に飢えに苦しんだ国でもあった. 遥かな昔の話みたいだが筆者が住みながら経験した事だ. 日帝強制占領期間にそのように多い開発が成り立ったら, 解放後韓国がそんなに貧しくはなかったはずだ. こんな経験は上のグラフとも整合的だ. これがファクトではないか? 植民地近代化論の ‘不便な真実’は ‘不便な虚構’に過ぎない.

原文を見る

일본의 발전은 한국 덕분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소득불평등 심화
개발이익 일본인에게 집중돼
조1선인들은 여전히 굶주렸고
해방뒤 오랫동안 가난 시달려


일본 식민지 시기 조선 소년들이 만든 가마니를 파는 시장의 모습. 당시 학교에선 가난한 학생들한테 가마니를 짜 학비를 보충하도록 하는 아동 강제노역을 시켰다. 조선총독부는 쌀 수탈을 위해 가마니 짜기를 촘촘하게 계획, 관리했다. 출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사진으로 보는 서울 2>” 일본 식민지 시기 조1선 소년들이 만든 가마니를 파는 시장의 모습. 당시 학교에선 가난한 학생들한테 가마니를 짜 학비를 보충하도록 하는 아동 강제노역을 시켰다. 조1선총독부는 쌀 수탈을 위해 가마니 짜기를 촘촘하게 계획, 관리했다. 출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사진으로 보는 서울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당당하다. 비록 그것이 ‘불편한 진실’이겠지만 ‘객관적 사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학자적 양심에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승조 교수는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학자 중 한 사람이었고,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들도 높은 학문적 수준을 가진 학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논거를 가지고 주장하지, 감상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용어는 국사학계에서 들씌운 프레임 같은 것이라고 하여, 정작 식민지 근대화론자 본인들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용어를 사용하기가 조심스럽지만, 본인들이 자기들의 학문사조에 대해 달리 뭐라고 규정하지 않아 편의상 그 용어를 그냥 쓰도록 하겠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의 견해가 아니라, 다양한 연구자들의 집합된 생각이다. 연구자들의 전공도 경제학뿐만 아니라 역사학, 정치학, 사회학 등 아주 다양하고, 연구 대상 시기도 조1선 후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래서 공통분모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고, 자칫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는 있지만, 시기별로 식민지 근대화론의 핵심적인 주장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 조1선 후기 사회가 생산력의 붕괴와 더불어 자멸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놓여 있었다.

2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으로부터 근대적인 여러 제도가 도입되고 선진적인 자본이 대거 투입됨으로써 조1선이 빠른 속도로 개발되었으며, 그 결과 조1선인들의 생활수준도 향상되었다.

3 이러한 식민지적 개발의 경험과 유산이 해방 후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철도·도로 확충에 경지·생산성 확대

식민지 근대화 근거 제시하지만

소득분배 독점·불평등 확대 재생산

일제강점기의 자료들을 들여다보면 그 당시 식민지 조1선에서 괄목할 만한 개발이 이루어진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근대적인 일본의 법이 조1선에 적용됐다. 시장제도가 발전했다. 철도·도로·통신·항만 등의 사회기반시설이 확충됐다. 선진적 기술을 가진 일본의 자본이 대거 투입되어 공장과 광산이 건설됐다. 하천이 개수됐다. 농지개량과 농업개량에 의해 경지면적이 확대됐고 농업생산성도 올라갔다. 도시계획과 상하수도 시설이 보급됐다. 이런 증거들은 이밖에도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차고 넘친다.

불편한 진실은 여기에서 생겨난다. ‘이런 근대적인 여러 변화가 식민지 조1선을 개발시켰을 것이고, 그 개발 덕분에 조1선인들도 좀 더 잘살게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십상이다. ‘일본인들이 개발의 이익의 많은 부분을 가져갔다고 하더라도 조1선인에게도 떡고물이 좀 떨어졌을 것이고 그래서 조1선인들도 조금은 더 잘살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1선이 개발되었다는 것으로부터 그것이 조1선인에게도 이득이 되었을 것이라는 논리 전개 속에는 논리의 비약이라는 함정이 있다. 조1선이라는 지역의 개발과 조1선인의 개발을 구별하지 못하는 비약이다. 일본인들은 맹렬한 속도로 조1선의 토지를 장악해 갔고, 광공업 자산은 90% 이상이 일본인들 소유였다. 소수의 일본인들이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을 집중적으로 소유했기 때문에, 소득분배가 민족별로 불평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불평등한 소득분배 구조는 일본인들한테 더 많은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있게 하고, 그것이 소득불평등을 확대시켰다. 이러한 민족별 불평등의 확대재생산 과정이 식민지시대 조1선에서 벌어지고 있던 개발의 본모습이었다.

불평등한 개발은 민족 차별을 확대시켰다. 조1선의 개발은 일본의, 일본인들에 의한, 일본인들을 위한 개발이었기 때문에 원래 이 땅의 주인이었던 조1선인들은 그러한 개발의 국외자에 불과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점 더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경제적 불평등이 확대되는 이른바 ‘식민지적 경제구조’에 갇히게 되었다. 따라서 식민지 체제가 청산되지 않는 한, 조1선인들은 식민지적 경제구조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해방이 바로 이 식민지적 경제구조에서 탈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민족독립운동이 무엇보다 중요하고도 소중했다. 필자가 이전에 썼던 책에 <개발 없는 개발>이라는 일견 형용모순된 제목을 붙인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필자의 말이 반일종족주의의 도그마를 벗어나지 못한 극단적 주장으로 들리는가? 필자는 오랫동안 식민지 근대화론이 장기로 삼는 바로 그 실증이라는 것으로써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하는 논쟁을 무수히 벌여 왔다. 지면의 제약 때문에 여기서 그 많은 실증을 구체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 많은 실증적 논쟁 중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지표를 들어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해 보기로 한다.

‘강점기 조1선일들 키 커졌다’ 는 주장

지난 100여 년 식품수급표 통계엔

1918~1945년 영양 공급량 감소세

소득 증가했다는 명제 성립 안돼

식민지 근대화론에서는 ‘일제강점기 동안 조1선에서 이루어진 개발의 결과, 조1선인의 삶의 질도 높아졌다’고 주장한다. ‘일제강점기에 조1선인들의 키가 커졌다’는 주장도 여기에서 파생된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의 하나이다. <반일 종족주의>의 필자 가운데 한 명인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의 연구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동안 조1선인들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60% 이상 증가했고, 1인당 소비도 크게 증가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동안 조1선인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는 주장인데, 이는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펴낸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라는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한다. 과연 이런 주장이 타당할까?

육소영 충남대 박사는 1910~2013년의 식품수급표를 이용하여 조1선(한국)의 1인 1일당 영양 공급량의 변화를 분석하였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식품수급표를 1962년 이래 현재까지 매년 공표한다. 육 박사는 식품수급표가 존재하지 않는 1910~1962년에 대한 식품수급표를 추가하여 그 시계열을 1910년까지 끌어올렸다. 이 식품수급표로부터 1인 1일당 에너지, 단백질, 지방질, 무기질(Ca, Fe), 비타민(A, B1, B2, Niacin, C) 등의 영양 공급량을 알 수 있다. 에너지, 단백질, 지방질 등의 주요 영양 공급량을 중심으로 그 분석 결과를 정리해 보면 다음 그래프와 같다.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1918년까지는 영양 공급량이 증가하다가, 그 후 1945년까지는 감소 경향을 보이며, 해방 뒤 반전하여 뚜렷한 증가 경향을 보이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에너지 공급량과 단백질 공급량이 거의 정체해 있는 것은, 이 시기가 되면 다이어트가 주요 관심사로 될 정도로 영양 공급이 이미 포화상태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일제강점기의 조1선인들의 소득은 매우 낮은 상태였다. 이 기간에 조1선인들의 소득이 증가했다고 가정해 보자. 낮은 소득 때문에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던 시기, 즉 항상 배가 고프던 그런 시기에는 소득이 증가하면 당연히 무엇보다 먼저 먹을 것을 찾을 것이고, 음식물 소비량이 늘어날 것이다. 영양 공급량이 증가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래프를 보면 일제강점기 동안 영양 공급량은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1선인들의 소득이 증가했다는 명제는 성립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키는 길게는 스무살까지 커지다가 그 이후에는 성장을 멈춘다. 키와 성장기의 영양 공급량 사이에는 강한 양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한다. 성장기에 잘 먹으면 그러지 못한 경우에 비해 평균 키가 더 커진다. 일제강점기에 영양 공급량이 감소했다는 것은 평균 키가 커졌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연구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유의해야 할 점은 1918년까지의 증가 경향이다. 필자는 이 증가가 조1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된 직후의 초기 통계가 갖는 문제점 때문이며 현실이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동시에 이 기간의 경제성장을 둘러싸고 식민지 근대화론과 이미 수많은 논쟁을 벌여왔다. 결론적으로 말해 1910~1918년 동안에도 영양 공급량은 감소하거나 정체했다고 보아야 옳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의 주장을 못 믿겠다면, 쟁점이 되는 기간을 논외로 하거나,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더라도 결론은 큰 차이가 없다.

어떤 한 나라의 생활조건을 물질적인 소비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예컨대 부탄과 같은 나라는 소득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지만 행복지수는 매우 높다고 한다. 그러나 가난하여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행복을 운운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일제강점기에 조1선인들의 삶의 질이 좋아졌다든가,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는 등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해방 후 한국은 소득수준이 매우 낮은 나라의 하나였다. 해방 후 오랫동안 보릿고개라는 말이 없어지지 않았을 정도로 늘 굶주림에 시달리던 나라이기도 하였다. 아득한 옛날의 이야기 같지만 필자가 살면서 경험하였던 일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그렇게 많은 개발이 이루어졌다면, 해방 후 한국이 그렇게 가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경험들은 위의 그래프와도 정합적이다. 이것이 팩트 아닌가? 식민지 근대화론의 ‘불편한 진실’은 ‘불편한 허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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